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85화 (85/204)

| 85화

85화. 혹시 모를 가능성

“내가 말했지? 접으라고. 자꾸 그러면 너만 힘들어진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좀 닮아서 그렇습니다.”

“닮아? 뭐가?”

말라즈는 말없이 손안의 상자를 바라보는 프로스트에게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되물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수줍게 꼬물거리는 손가락만 봐도 절로 우웩 소리가 튀어나왔다.

예쁜 아가씨라면 모를까, 저보다 큰 시커먼 사내놈이 저런 꼴을 하는 건 영 달갑지 않았다.

“에이, 나는 모르겠으니까 퍼뜩 그거 치워놓고, 아. 또 왜 그런 눈인데?”

“비 전하의 선물입니다.”

“그건 나도 알거든?”

“예의를 표해야 합니다.”

“……진심이냐?”

“네.”

혹시나 해서 물어봐도 눈먼 사내의 고개는 망설임 없이 끄덕여질 뿐이었다.

말라즈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계속 못 볼 꼴을 볼 바에는 차라리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편이 나았다.

“야. 됐어. 청소 안 도와줘도 되니까 얼른 사라져.”

“가져다만 놓고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됐으니까, 저리가. 가서 위대한 선물을 주신 비 전하께 드릴 답례라도 생각하든지 말든…….”

말라즈는 말을 하다 멈추고 슬쩍 눈치를 살폈다.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입에서 나온 대로 지껄였던 건데, 상대는 대단한 충격이라도 받은 양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양이었다.

* * *

“아가씨, 혹시 시간 있으세요?”

“아무리 바빠도 미샤에게 내줄 시간은 있지. 들어와.”

나는 쓰던 편지를 멈추고 펜을 내려놓았다.

“뭐 하세요?”

“티어드롭에 보낼 편지를 쓰고 있어.”

“그 인간이 뭐 예쁘다고 편지까지 써주세요.”

미샤는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는 내가 아버지와 꾸준히 연락하는 걸 퍽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수고를 할 만한 가치가 있으니 그렇지.”

“가치요?”

“아무래도 알아차린 것 같거든.”

나는 반쯤 쓴 편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샤리에트가 알차게 이용해 먹고 있는 아이디어는 결국 내 것이었다.

내가 뭘 메모해두었는지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뭘 알아차린다는 거예요?”

“우연이 아니라는 거.”

“우연이요?”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그게 반복된다면 그건 더는 우연이 아니잖아.”

나는 아버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눈치가 빠른데다가 무엇보다 분명한 것을 좋아했다.

내가 메모해둔, 하지만 아직 샤리에트가 시도하지 않은 계획들을 미리 언급해두는 것만으로도 의문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을 푸는 것 역시.

그 와중에 내 메모가 드러나면 좋을 것이었고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아버지가 또 한 번 샤리에트에게 실망했다는 사실이니까.

“사람의 기준은 대부분 자신에게 맞춰져 있어. 특히 티어드롭 공작처럼 실패를 모르는 사람은 더 그렇고.”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가주가 되어 티어드롭을 4대 가문에 비견될 만큼 성장시킨 인물이었고, 그만큼 본인만의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나만 하더라도 늘 아버지의 뒤를 쫓기 위해, 그리고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허덕거리곤 했으니까.

현실적으로 따지면,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않은 샤리에트가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건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는 샤리에트에게 기대했다.

그녀는 특별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혈육이 자신만큼 해내지 못할 리 없으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다.

“기대를 많이 하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지.”

반복되는 기대와 실망은 결국 편견을 만들기 마련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아버지는 샤리에트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게 되고, 결국엔 샤리에트를 무능하다 여길 것이었다.

‘그럼에도 차기 티어드롭 공작은 샤리에트가 되겠지만.’

아버지가 이 정도로 샤리에트를 버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귀족에게 핏줄이라는 건 의미가 남달랐고, 특히 티어드롭처럼 특별한 전설이 있는 가문일수록 더 예민한 법이었다.

아버지가 샤리에트가 진짜라고 믿고 있는 한, 티어드롭의 주인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후계자에도 격이 있는 법이었고, 무엇보다 티어드롭은 아버지의 자랑이었다.

기준에 차지 못한 샤리에트에게 모든 것을 쥐여줄 리 없었다.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사가 여전히 복잡하다는 것 정도는 알겠네요.”

“복잡해?”

“네. 무척요. 솔직히 요정 기준으로 보면 인간들은 너무 복잡하게 살거든요.”

“요정이랑 비교하면 그렇긴 하지.”

“뭐, 그래도 상관없긴 해요. 이해는 못 해도 아가씨 말은 잘 따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거면 된 거죠.”

결론이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만족하면 된 거겠지.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샤를 보며 따라 웃었다.

“차라도 마실래? 할 이야기 있으면 마시면서 하자. 내가 차 내려줄게.”

“당연히 좋죠. 저는 아가씨가 해주시는 거라면 흙탕물도 마실 수 있어요.”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우는 미샤에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와 곁들일 좋은 간식이 생각난 참이었다.

“다행스럽게 내 집무실에는 흙탕물은 없어서 말이야. 대신, 쿠키는 어때?”

“쿠키요?”

“멜시가 오늘 아침에 가져왔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챙겨뒀지. 달콤한 거 좋아하잖아.”

“잘됐네요. 마침 달콤한 것이 필요했던 참이었거든요.”

“마침?”

“실은 이것 때문에 온 거거든요.”

미샤는 품에 안고 있던 유리병의 뚜껑을 가볍게 툭툭 쳤다.

그녀의 머리통만 한 유리병 안에는 조약돌이 한 움큼 들어가 있었다.

“정령의 알?”

“네. 맞아요.”

“그걸 왜 가져온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저번에 시험 삼아 가져온 정령의 알들이 부화했거든요. 그래서 설탕이라도 좀 먹이려고 데려왔어요.”

미샤가 들고 있던 유리병을 티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물론 내 눈에는 정령 대신, 안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조약돌만이 보일 뿐이었지만 신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벌써 부화한 거야?”

“네. 덕분에 밤에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

미샤는 툴툴거리면서 뚜껑을 열고 유리병 안에 쿠키를 넣어주었다.

“쿠키를 먹는 거야?”

“없어서 못 먹죠.”

“나는 설탕만 먹는 줄 알았는데.”

“그거 말라깽이가 알려준 거죠? 걔는 나이도 어린 게 융통성이 없어서 정석대로만 하려고 한다니까요. 어차피 이 녀석들은 단 거면 다 좋아하는데 말이죠.”

이번 쿠키는 미샤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유리병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쿠키를 보며 슬쩍 몸을 그쪽으로 움직였다.

“나도 쿠키 줘봐도 돼?”

“당연히 되죠. 사실 아가씨가 주시면 더 좋아할걸요.”

미샤는 선뜻 유리병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는 미샤가 그랬던 것처럼 쿠키 하나를 집어 유리병 안에 넣었다.

쿠키가 좋은 건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나 유리병 안의 쿠키가 아까보다 더 많이 흔들렸다.

“뭐 하고 계십니까?”

“아, 플렌. 잘 다녀왔어?”

“저야 늘, 이런. 정령이 깨어났군요.”

이제 막 집무실로 들어온 플렌이 정령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정령을 볼 수 있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있던 곳에서 벗어나 부화 시기가 늦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밖에 있는 녀석들보다 빠르네.”

“환경 탓이겠지.”

“…….”

“따지고 보면, 급 높은 정령들보다 하급 정령들이 더 본능에 충실하잖아. 본능적으로 알아본 거겠지.”

미샤는 성의 없이 대꾸하고는 유리병을 검지로 톡톡 쳤다.

플렌은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는 미샤의 옆에 앉았다.

나는 슬쩍 둘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뗐다.

“혹시 얘네가 일찍 깨어난 게 나쁜 징조인 건 아니지?”

“그렇지 않아요.”

“그런 건 아닙니다.”

내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곧장 나온 대답과 다르게 둘의 표정은 영 밝지 않았다.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줘도 되는데.”

“정말로 괜찮습니다. 별문제 아닙니다.”

“그런 것치곤 너무 삭막한 얼굴인걸.”

“그게…….”

“말하기 곤란한 내용이야?”

나는 일부러 밝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엘프의 표정은 여전히 묘했다.

“말하기 곤란하다면 하지 않아도 돼.”

“아뇨, 그것보다는 오히려, 아씨! 망할 금기 같으니라고!”

미샤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가 답답한지 거칠게 무릎을 쳤다.

플렌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길게 뱉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일이 있다기보다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거죠.”

“가능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