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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82화 (82/204)

| 82화

82화. 노리고 있는 건

* * *

“매번 일찍 일어나시던 분이 늦잠이라뇨. 확실히 어제 일이 고되긴 했나 봅니다.”

“응. 아무래도 그랬지.”

꼭 그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말라즈 앞에서 사생활을 떠들 생각은 없었다.

“저도 더 주무시게 두고 싶었는데, 이게 저희 선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서 말입니다.”

“응. 잘했어.”

“…….”

“왜?”

“혹시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말라즈가 몸을 낮추며 슬쩍 눈을 굴렸다.

“아냐. 그럴 리가.”

“그런데 왜 이렇게 방 분위기가 썰렁한 것 같죠? 특히…….”

말라즈의 시선이 슬쩍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리를 꼬고 앉은 블러쉬가 가만히 말라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뭐 또 잘못한 겁니까?”

말라즈가 불안한 눈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나로선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말라즈는 그런 내 행동에 잠시 턱을 괬다가 슬쩍 블러쉬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꽤나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보였다.

“전하, 제가 저번 주에 노름판에 간 건 말입니다. 원래 제 뜻이 아니라, 타라스, 녀석이 한 번 가자고 해서-”

“또, 노름을 했다고?”

“그거 때문에 노려보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닌데.”

“…….”

말라즈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이내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혹시, 저, 저번 주에 군용 창고에서 벌꿀주를 몇 병 빼돌린……, 물론 그런 일을 제가 할 리는 없죠!”

“말라즈.”

“네, 전하.”

말라즈의 떡 벌어진 어깨가 초라하게 처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용서해줄 블러쉬가 아니었다.

“일주일간 훈련소 청소는 네 놈에게 전부 일임할 테니, 매일 페잔에게 확인받도록.”

“전하. 훈련소는 기사 훈련생이나 하는 일이지만……, 저는 청소를 좋아하죠. 제 별명도 바로 청결한 말라즈 아닙니까.”

“페잔에게 제대로 전달했는지 확인해볼 거다.”

블러쉬의 선고가 끝나자마자, 말라즈의 시선이 곧장 나를 향했다.

처진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한 주를 더 늘려야 정신을 차리겠군.”

“저, 지금부터 청소하러 가겠습니다. 아주 깨끗하고 청결하게 말이죠.”

말라즈는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내게 흘끔흘끔 눈치를 보냈다.

살려달라는 간절한 신호였다.

나는 고심하다가 결국 손을 들었다.

“훈련소는 혼자 청소하기에 너무 크지 않나요?”

블러쉬의 명령에 토 달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심통 난 것처럼 보였으니까.

방금 전, 침실에서의 시간을 방해한 데에 대한 원한이 섞여 있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훈련소를 청소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빼앗기면 원래 일을 못 할 거 아니에요.”

“…….”

“아닌가요?”

살짝 웃어 보이자, 블러쉬는 빤히 날 바라봤다.

그리고는 짧은 한숨과 함께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반절만 시키는 걸로 하죠.”

“정말이십니까?”

“그래.”

블러쉬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펄럭거렸다.

퇴출 명령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말라즈는 그 신호에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양 눈을 반짝이며 서둘러 방을 벗어났다.

“미안해요. 명령에 끼어들어서요.”

“상관없습니다.”

“상관없을 리가요.”

아무리 자유로운 모나차르트라도 위계질서가 있는 법이었다.

이미 대공이 명령을 내렸는데, 멋대로 끼어들어 그의 의견을 바꾸게 하는 건 솔직히 좋은 일이 아니었다.

“말을 잘못했군요. 상관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니다.”

“네?”

“심포니아가 제게 뭔가를 부탁하는 일은 드무니까요.”

“…….”

“그 부탁이 말라즈 녀석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썩 달갑진 않지만요.”

블러쉬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역시, 여자를 상대하는 데에 익숙하네.’

이런 건 티 내면 좋지 않다고 해도 불쑥 떠오르는 질투를 어찌할 순 없다.

나는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불만을 삼키며 책상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들었다.

말라즈가 아침부터 급하게 우릴 찾은 건 티어드롭 공작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대단한 건 없고, 안부 편지예요.”

“안부 편지요?”

블러쉬가 눈을 찡그렸다.

“무사히 잘 돌아갔는지, 혹시 무슨 일은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있죠.”

“아무 일도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거군요.”

“실패한 일에 굳이 손을 담글 이유는 없잖아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습격자의 얼굴을 확인했다는 걸 알았을 텐데요.”

“아쉽지만 그건 제대로 된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어째서죠?”

“습격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거든요.”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 바로 알아차렸을 뿐, 보통 경우였다면 그들이 아버지의 사람이라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가린 얼굴은 바로 알아차리기 어려운데다가 습격을 당한 상황이었다.

긴급한 상황 속 그들의 얼굴을 파악하는 건 어려웠고,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습격자들 모두 죽자마자 얼굴이 망가졌어요.”

“……망가졌다?”

“그림자란 존재하되, 어디에도 있어선 안 되는 자들이니까요.”

“…….”

“티어드롭의 그림자 기사들은 입단할 때 낙인을 새기고 저택으로 들어와요. 그리고, 그들이 죽는 순간 낙인이 발동해 신분을 유추할 수 있는 걸 전부 지워버리죠.”

“당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뇨. 모를 거예요. 티어드롭 공작은 적어도 제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 굴었거든요. 굳이 어두운 그늘을 보여주진 않았죠.”

적어도 샤리에트가 돌아오기 전까진.

나는 뒷말은 목구멍으로 삼키며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 티어드롭 공작은 제가 자신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죠.”

“오만한 판단이군요.”

“정확히 말하면, 이미 경험해본 거죠. 저는 오래전에 한 번 선택했거든요.”

“어쩐지 예전에 한 번 들었던 것 같군요.”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내심 무거운 마음을 떨쳐내진 못했다.

그걸 알았기 때문일까, 블러쉬도 굳이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그저 그는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티어드롭 공작은 지금 두 가지를 착각하고 있어요.”

“어떤 것 말입니까?”

“첫 번째, 제가 여전히 자신을 따른다 여기는 것.”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편지에서는 희미하게 레몬 향이 났다.

이건 단순한 안부 편지가 아니었다.

타인에게 들키지 않고 내게만 은밀하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담겨 있는 비밀 편지였다.

나는 램프의 뚜껑을 열어 편지를 가까이 가져갔다.

열이 닿자, 감춰졌던 글씨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블러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장소군요.”

“엘프들 앞에선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 같단 티를 냈거든요. 당연히 호기심을 자극했을 테고, 비밀리에 둘만 만나고 싶어졌을 거예요.”

“저는 반대입니다.”

내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블러쉬가 말했다.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단호했다.

결코 양보해 주지 않겠다는 입장이 선명히 보였다.

“저도 딱히 갈 생각은 없어요.”

“없다고요?”

“네.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요.”

나는 순순히 블러쉬의 뜻을 받아들였다.

결국 아버지와 다시금 재회해야 하긴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쉽게 손에 넣으면 그만큼 쉽게 느껴지는 만큼 조금 더 애태우면 안달 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애당초 제가 노리고 있는 건 다른 쪽이었거든요.”

“다른 쪽이요?”

“말씀드렸잖아요. 티어드롭 공작은 지금 두 가지 착각을 하고 있다고.”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손가락을 두 개 폈다.

처음부터 내 목표는 하나였다.

샤리에트 블랑 티어드롭 공작 영애, 아니. 그녀의 탈을 쓴 가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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