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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78화 (78/204)

| 78화

78화. 누우세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질문해도 되나요?”

“뭘 질문하실 건데요? 음식?”

“좋아하는 색상을 묻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면 간접적으로나마 저 잘생긴 입에서 좋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언제쯤 그가 내가 원하는 말을 해줄지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그건 아시지 않나요. 예전에 이미 말씀드렸는데.”

“물론 기억하죠. 아마 녹색이었죠?”

“은색도 나쁘지 않습니다.”

“고작 나쁘지 않은 정도예요?”

장난스럽게 눈에 힘을 줬다.

그러다가 이내 마주친 눈에 웃어버렸다.

“이제 화는 풀리신 거죠?”

“치료 후에 화낼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틈을 안 주셔서.”

“그런 것치고 미리 계획한 것처럼 절 안고 자겠다고 말씀하셨는걸요.”

“이건 치료의 일환이죠.”

사내는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사이, 거리가 벌어진 걸 놓치지 않았다.

나는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그게 어딜 봐서 치료의 일환이죠?”

“주무시다가 다친 발을 써서 고생하시는 것보다 미리 예방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저 잠버릇 안 심해요.”

“제 소견으로는 아니던걸요.”

“그럴 리가요.”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봤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잠버릇이 심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실제로 자고 일어나면, 처음 누운 그대로 깨어나곤 했으니까.

“몇 번이나 이불을 걷어차고 주무셔서 제가 다시 덮어드린 적도 있는걸요.”

“…….”

“잠꼬대로 이상한 소리를 하신 적도 있고.”

“…….”

“또, 뭐더라?”

“……진짜인가요?”

나름 확신이 있었는데, 태연히 고개를 까닥거리는 사내를 보니 의문이 들었다.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잠버릇은 알 수 있는 게 아니긴 했다.

특히 방금 블러쉬가 한 말 중 이상한 잠꼬대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가만 보면, 장부의 숫자 하나 허투루 넘기시지 않는 분이 정작 이런 부분에서는 쉽게 속으시더군요.”

“…….”

“잠버릇 안 심하십니다. 얌전히 주무시는 편이에요.”

“……저는 진짜인 줄 알고 걱정했단 말이에요.”

프로스트를 걱정할 게 아니라, 날 걱정해야 하는 거였어.

나는 또다시 블러쉬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 사내는 슬슬 날 골리는 데에 재미를 붙여가는 듯 보였다.

“다음부터는 안 속을 거예요.”

“네. 그러시죠.”

웃음기 섞인 입술이 이마를 눌러왔다.

늘 그렇듯 사내는 지나치게 능숙한 구석이 있었다.

그간 얼마나 경험이 많았던 건지 자연스레 의심이 들 만큼.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지나간 여자들을 질투해봤자 내 손해라는 걸 알지만 기분까지 어떻게 할 순 없었다.

다른 여자에게도 똑같이 굴었을 블러쉬를 생각하니 창자가 뒤틀린 것처럼 속이 나빠졌다.

이제껏 몰랐던 사실인데 나는 사실 질투가 많은 편이었다.

“속아서 화나신 건가요?”

찡그린 내 표정을 오해한 건지, 블러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뇨. 화 안 났어요.”

질투가 나도 티 낼 수 없는 건, 미리 공부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연애 서적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연인의 과거를 캐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어도 모른 척 넘어가 주는 편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좋다고 했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이성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감정은 그렇지만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게 되기 마련이었지만.

* * *

어제 이야기를 하다가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나는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렸다.

처음에는 안겨서 잠든다는 게 이상했는데 이러고 있으니 따뜻해서 좋긴 했다.

좋은 냄새가 나기도 하고.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블러쉬가 자고 있는 틈을 타 모른 척하고 좀 더 품으로 파고들 참이었다.

일순간 찌릿한 통증이 느껴지지만 않았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놀라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정신 차려서 소리를 삼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통증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녹슨 기계처럼 잘 움직이지 않는 몸에 인상을 썼다.

마치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뻐근하고 아팠다.

“뭐 하고 계신 겁니까?”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말하고 싶었는데 아침부터 맛본 통증에 드는 생각은 결국 하나였다.

“몸이 아픈 것 같아요.”

“아프시다고요? 어디가요?”

블러쉬의 얼굴에 답지 않게 곤란함이 서렸다.

그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내 상태를 살폈다.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니에요.”

“그건 의사가 판단할 문제겠죠.”

“그게, 몸을 움직일 순 있는데요.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뻐근하고 아파서요. 누가 제 몸에 추라도 달아놓은 것 같아요.”

내가 울상을 짓자, 블러쉬의 표정이 묘해졌다.

“잠시만요.”

블러쉬가 손을 뻗어 내 어깨와 팔을 주무르듯이 만졌고, 그럴 때마다 내 입에선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피부를 눌러서 아픈 건 어제 부은 발목이 건드려졌을 때와 비슷했다.

“아무래도 근육이 놀란 모양이군요.”

“네? 어디가 놀라요?”

“근육통입니다.”

“저는 운동 같은 거 하질 않는…….”

문득 스치고 가는 어제의 기억에 얼굴을 구겼다.

아무래도 어제의 불행은 발목을 삐게 한 걸로는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평소에 잘 움직이지 않으시니, 어제 일이 꽤나 고됐을 겁니다.”

“잘 안 움직인다니요. 제가 얼마나 잘 돌아다니는데요.”

“운동을 말하는 겁니다.”

“…….”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마지막으로 승마하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작년, 승마장에서 탔죠. 그것도 여유롭게.”

어제처럼 격하게 말을 탄 건 승마를 배운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말에서 뛰어내리며 오두방정을 떤 것도 처음이었고.

생각을 깊게 하면 할수록 내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다.

블러쉬는 그런 나를 보고 어깨를 감싸 쥐었다.

“움직이는 게 많이 불편하십니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이렇게 몸이 무거운 건 이상해서요. 마치 제 몸인데, 제 몸이 아닌 것 같은걸요.”

나는 울상을 지으며 손을 쥐었다가 펴봤다.

이젠 하다 하다 손가락조차 뻐근한 것 같았다.

“그럼 조금 도와드릴까요?”

“네? 이런 것도 도와줄 수 있는 건가요?”

“근육통을 푸는 데에는 확실히 ‘그것’만 한 게 없으니까요.”

블러쉬는 쉽게 말했지만, 내게는 어떤 말보다 신뢰성 있게 들렸다.

그는 훈련을 일상으로 달고 살았고, 그만큼 근육통에 대한 지식이 풍부할 터였다.

“그게 뭔데요?”

“뭉친 근육을 풀어서 통증을 완화시키는 거죠.”

“근육을 어떻게 풀어요? 그런 게 가능한가요?”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알려주지.

나는 들뜬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해보시겠습니까?”

“당연하죠. 솔직히 이대로라면 오늘 일도 제대로 못 할 거예요.”

좋은 방법이 있는 게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똑똑한 남편을 두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블러쉬는 침대 시트를 정리할 뿐이었다.

“근육을 풀어주시기로 한 거 아닌가요?”

“네. 해드릴 겁니다.”

“그런데 왜 침대 시트를 정리하시는 거예요?”

침대 시트를 정리하는 건 하녀의 몫이잖아.

심지어 우리는 다 기상한 상황이고.

떠오르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블러쉬는 마저 침대 시트를 정리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방금 정리한 자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누우셔야 하니까요.”

“누워요? 왜요?”

우리 분명 같은 주제로 대화하는 것 같은데 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느낌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야 마사지하기 편하거든요. 얼굴을 아래로 하고 누우시면 됩니다.”

“마사지요?”

“네. 마사지요.”

블러쉬가 침대를 가리켰다.

나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눈만 끔벅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머릿속에서 따로따로 놀던 조각들이 비로소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했다.

나는 드디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헛숨을 삼켰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블러쉬는 준비를 마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안 누우실 건가요?”

“……”

“누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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