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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74화 (74/204)

| 74화

74화. 잡힐 듯 말듯

내가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준비되었지만 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찻잔을 쥐기만 한 채 뿌옇게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와중에 준비된 건 내가 좋아하는 차였다.

“잘 지냈니?”

“저야 잘 지냈죠. 아버지는요?”

무척이나 어색한 안부 인사였다.

그간 떨어져 있던 시간의 간극은 확연히 티가 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를 보면서 이토록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혹시나 직접 만나면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건 무색한 일이었다.

오랜 내 짝사랑은 어느샌가 완벽하게 끝이 나 있었다.

나와 같은 녹색 눈동자를 마주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나는 네가 많이 생각나더구나.”

그리움 섞인 눈이 나를 향했다.

아버지의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정도로는 내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아버지껜 그 아이가 있잖아요.”

“…….”

“잘 지내고 있나요?”

“그래. 잘 지내고 있지.”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아버지를 다시 보지도 않으려고 했었죠.”

나는 찻잔 주둥이를 매만졌다.

손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도자기는 낡은 여관에 어울리지 않는 최상품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편한 삶은 아니었죠. 하지만 마음은 훨씬 편해요.”

“편하다고?”

“솔직히 처음에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그 아이가 미웠어요. 제 자리를 빼앗겼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죠. 여행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여행?”

“네. 그냥 정처 없이 떠돌고, 가끔 마음 드는 곳에서 머물며 일하면서 그렇게 살았죠.”

거짓말을 가장 그럴싸하게 들리게 하는 방법은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는 것이었다.

나는 태연히 거짓말을 이어가며 웃었다.

“힘들었겠구나.”

“말씀드렸잖아요.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고.”

“…….”

“저는 이제 티어드롭에 별 욕심 없어요. 그냥 제 자리가 아니었구나 생각할 뿐이죠. 오늘 이렇게 나온 것도 뭔가 바라고 나온 건 아니고요. 그냥…….”

일부러 말을 멈췄다.

나는 오늘의 내가 처연하고 안타까워 보였으면 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얼굴은 보고 싶더라고요.”

“그렇다면 진작에 찾아오지 그랬니. 아니, 적어도 내가 쭉 찾을 때 나타났기라도 했다면-”

“그러면 아버지께 폐가 되잖아요.”

“…….”

“지금 이렇게 나온 것도 한참 고민하다 나온 거예요. 이제 제 존재는 티어드롭의 명예를 더럽힐 뿐이니까요.”

“그럴 리 있겠니. 너도 내 딸인걸.”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저 말에 가장 많이 흔들렸다.

나도 아버지의 딸이라는 말은 항상 내게 헛된 기대를 남기곤 했으니까.

“아버지의 딸로 기억되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착하고 좋은 딸이요.”

“네 마음이 어떤지는 안단다. 네 말대로 너는 정말로 착하고 좋은 딸이었으니까.”

“그렇게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겠네요.”

아버지의 환심을 사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가 원하는 상을 연기하면 되었으니까.

티어드롭을 욕심내지 않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딸의 모습을.

“자꾸 어딜 간다고 그러는 거니. 네가 있을 곳은 티어드롭인데.”

“…….”

“네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제 자리요?”

“픽스가 널 입양하기로 해줬단다. 네 삼촌 말이야. 기쁜 일이지.”

미래는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지난날 삼촌의 딸이 되어 살았던 삶을 기억했다.

“세간에는 내 조카로 불리긴 하겠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란다.”

아버지는 그때도 저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약속은 지켜진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 그다음은 삼촌, 마지막으로는 고모.

원래는 나를 양녀로 들이려 했던 아버지는 뒤늦게 후계 승계가 걱정되었는지 나를 삼촌에게 넘겼고, 삼촌도 다를 바 없었다.

나를 양녀로 들이는 조건으로 많은 것을 받기로 한 삼촌은 아무것도 손에 떨어지지 않자, 만만한 고모에게 나를 넘겼다.

결국 마지막 죽는 순간의 나는 누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채 죽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대용품, 그 자체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티어드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란다.”

뻗어진 성마른 손이 나를 찾았다.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보다 큰 손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버지의 손은 내 기억보다 훨씬 작게 느껴졌다.

가장 크고 단단한 손이라 하면 당연히 아버지의 것이라 생각했던 과거가 무색할 정도였다.

“저는 명예로운 가문에 저라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그게 아버지께서 주신 가르침이었잖아요. 어떤 순간이든 티어드롭을 소중히 여기라고.”

“…….”

“물론 저는 이제 티어드롭의 후계자는 아니지만요. 그래도 마음만큼은 그곳에 있으니까요. 서운해도 이해해주세요.”

아버지가 좋아하는, 완벽한 이별을 만들어내며 나는 웃었다.

그물은 던져두었으니 이제는 미끼를 뿌려둘 차례였다.

“네가 왜 오점이니. 너만큼 잘 해내던 아이가 어딨었다고.”

“그렇다 해도 저는 이대로 사라지는 편이 나아요. 마침 절 받아주겠다는 곳도 생겼고요.”

“받아주겠다는 곳? 설마 모나차르트니?”

모나차르트를 발음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감출 수 없는 혐오감이 엿보였다.

나는 치미는 분노를 삼켜내며 웃었다.

“모나차르트가 아니라, 숲이에요.”

“숲?”

“기억하세요? 미샤. 예전에 플렌이 데려왔던 엘프 아이요.”

내가 몸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미샤가 로브를 벗었다.

그녀는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인사도 없이 도도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기억나는 것 같구나.”

“플렌을 찾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동행 중이에요.”

“플렌?”

“지금은 실종 상태이긴 하나, 제 대리인으로 일해줬던 사람 말이에요. 저도 최근에 알았는데, 플렌이 하프 엘프라고 하더라고요.”

“……하프 엘프였다고?”

아버지의 답지 않은 동요는 플렌을 죽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프 엘프를 죽였기 때문일까.

나는 후자 쪽이 맞을 거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플렌은 어머니는 인간이지만 아버지가 엘프였대요. 혼혈이죠.”

“…….”

“특히 플렌은 불법적으로 노예상에게 끌려가던 엘프들을 구출해주거나, 외부와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어서 다들 그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요정은 포괄적인 표현으로, 크게 보면 엘프도 요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래전부터 티어드롭은 유일하게 엘프와 연이 닿아있었고 그만큼 종종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왔다.

그런 티어드롭에게 있어서 혼혈이라 해도 엘프를 죽였다는 건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종족애가 강한 엘프가 그 사실을 알면 더는 티어드롭을 형제라 부르지 않게 될 테니까.

티어드롭 입장에서는 든든한 아군을 잃는 셈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플렌의 죽음은 영원히 침묵해야 하는 비밀이 된 셈이었다.

정작 플렌은 지금쯤 타란을 마시며 오래간만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을 테지만.

“일단 저는 플렌과 사이가 좋았으니까요.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어서요. 일단 미샤와 함께 숲으로 돌아가 다른 엘프들과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그런 일이라면 너무 힘들지 않겠니? 특히 여자애 둘이서 움직이는 건 더 그렇고.”

아버지가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그는 내게 바라는 대답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내 이야기는 플렌의 사건을 덮기에도 좋고 엘프들과의 관계도 돈독하게 할 수 있는 기회처럼 느껴질 테니까.

하지만 나는 선뜻 그 기회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원래 미끼는 곧장 쥐어지는 것보다 잡힐 듯 말 듯 앞에서 살랑거리는 쪽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법이었다.

“괜찮아요. 중대한 사안인 만큼 특별한 엘프가 도와주고 있거든요. 장로님께서 저희를 특별히 배려해주셨죠.”

“특별한 엘프라고?”

“아버지께서도 들어보셨죠? 가끔 유독 뛰어난 힘을 가진 엘프가 태어난다는 거요.”

나는 이번에는 프로스트를 바라봤다.

미샤가 그랬던 것처럼 프로스트 역시, 천천히 로브를 벗었다.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자식이라 여겨지던 백색증 환자의 독특한 외형에 엘프라는 이름이 더해지자, 누구도 그를 혐오 어린 눈으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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