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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73화 (73/204)

| 73화

73화. 눈이 시려왔다

* * *

친애하는 아버지께.

나는 그렇게 첫 문장을 시작한 후, 천천히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물론 그것은 진심이 담긴 편지는 아니었다.

블러쉬와 결혼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착한 딸인 척 굴었으며, 마지막에는 사랑한다는 말까지 썼으니까.

정작 편지를 쓰는 내내, 나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실링 왁스를 녹여 편지 봉투를 봉한 후 앞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멜시에게 건넸다.

“이것 좀 바로 부쳐줘.”

“어디로 보내야 하는 거죠?”

“수도의 티어드롭 저택.”

“티어드롭이요? 그 공작가요?”

멜시가 놀란 듯 눈을 끔벅거렸다.

“맞아. 거기.”

“그럼, 누구에게 보내면 될까요?”

“누구겠어. 티어드롭 공작 각하지.”

“티어드롭 공작과도 연이 있으셨어요?”

“뭐, 일단은.”

멜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나차르트 성 내에서 내가 티어드롭 공작 영애의 대용품이었다는 걸 알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 입장에선 이상하게 여겨질 법도 했다.

“보내는 사람은 모나차르트 대공비 말고, 그냥 이름으로만 해주고.”

“이름만요?”

“응. 샤리에트라는 이름으로 해줘. 아, 그리고 편지 부치러 가면서 미샤에게 방으로 오라고 좀 전해주고.”

내가 말할 때마다 멜시는 더욱 상황이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더 이상 군말은 하지 않았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시려나.’

나는 미샤를 기다리며 책상에 놓인 요정의 주화를 잡아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손바닥으로 주화를 잡아 눌렀다.

손을 뗐을 때 드러난 주화의 뒷면에는 축언이 적혀있었다.

요정의 주화는 티어드롭의 입장권으로도 쓰이는 동시에 행운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가씨, 저예요. 들어가도 되나요?”

“응. 들어와.”

멜시가 바로 전달해줬는지 금방 미샤가 찾아왔다.

미샤는 종종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가 내 손에 들린 주화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요정의 주화 아니에요? 어디서 난 거예요?”

“편지가 왔거든. 티어드롭 공작으로부터.”

“그 인간이 뭐래요?”

아버지가 언급되자마자 미샤의 양 볼이 부풀어 올랐다.

“티어드롭 공작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제 언제요? 저는 그런 적 없어요! 아가씨의 적은 제 적이란 말이에요!”

“티어드롭을 적으로 돌려도 괜찮은 거야?”

“희석될 대로 희석된 요정의 피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요.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의 티어드롭은 그냥 평범한 인간 무리일 뿐이에요. 요정과 인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던 건 다 옛말이죠.”

미샤는 단호히 말하고는 내게서 요정의 주화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만지자, 주화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요정의 주화는 엘프를 포함한 요정들에게 반응하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아가씨께서 후계자가 되신 이후에는 그나마 기대해볼 만했을 텐데요.”

“매번 날 너무 띄워주는 거 아냐?”

“농담이 아니라, 아가씨였다면 하실 수 있으셨을걸요. 멍청한 인간들이 그걸 몰라봤을 뿐이죠.”

미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요정의 주화를 내려놓았다.

요정의 주화는 더는 빛이 나지 않았다.

미샤는 빛이 사라진 요정의 주화를 가만히 보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두고 보세요. 다들 후회할 테니까요.”

“후회하게 해주려면 일단 미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는데 도와줄 수 있어?”

“저야 아가씨 부탁이라면 뭐든 하죠. 뭘 부탁하시게요?”

“거짓말을 조금 해줬으면 해.”

“거짓말이요?”

“나, 티어드롭 공작을 만나볼 생각이거든.”

편지에 약속 장소를 제안했다.

만약 아버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곧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정말로 만나시는 거예요?”

“슬슬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좋아요. 그러면 저는 어떤 독을 준비하면 될까요?”

미샤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나는 언제든 맡겨달라는 듯 주먹을 꽉 쥔 미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죽이려는 거 아니야.”

“이런 기회에 흔히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 틈에 얼른 죽여버려야죠. 그것도 가장 고통스러운 독으로요.”

미샤의 말에 문득 오래전의 샤리에트를 떠올렸다.

죽어가는 내게 그녀는 내가 먹은 독이 가장 고통스러울 거라 말했지만, 정작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겠지.

아무리 대단한 독을 먹는 것보다 진짜 샤리에트를 잃은 고통보다 괴로울 수 없으니까.

* * *

아버지는 모나차르트에서 만나는 걸 꺼렸고, 나는 수도에서 만나는 걸 거절했다.

결국 서로의 조건을 맞춘 건, 그 중간 지점에 있는 작은 여관이었다.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여관을 보며 슬슬 속력을 줄였다.

‘정말로 오래간만이네.’

여관에 도착하자, 나는 슬슬 말 고삐를 잡았다.

이럴 때는 기본 소양으로 승마를 배워둬서 다행이다 싶었다.

“괜찮아?”

“네! 물론이죠!”

내 앞에 탄 미샤가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반짝거렸다.

발갛게 물든 양 볼은 소풍 나온 아이처럼 들떠있었다.

나는 먼저 말에서 내린 후, 미샤에게 팔을 벌려줬다.

미샤는 한껏 행복한 얼굴로 내 품에 안겼다.

“프로스트는 어때? 괜찮아? 올 만했어?”

“저는 괜찮은데, 비 전-”

“쉿. 여기선 그렇게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댄 채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프로스트는 당황해 발을 동동 굴렀다.

“다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수고했어.”

“저는 오히려 즐거웠는걸요. 물론 공작을 만나면 얼굴에 독을 뿌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만요.”

“그건 정말 하면 안 돼. 약속.”

“설마 제가 그러겠어요?”

“믿어볼게.”

나는 일부러 가벼운 대화를 던져 몸을 풀었다.

여관 안으로 들어가면 아버지를 상대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신호를 주시면 됩니다. 신호 기억하시죠?”

“기억하니까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돼.”

나는 나보다 긴장한 듯한 프로스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자루를 뒤집어쓴 것 같은 로브를 입은 그는 오늘 하루만 내 호위 역할을 해줄 예정이었다.

“들어가기 전에 다들 기억해둬. 나는 숲에서 머물고 있는 거고, 두 사람 모두 엘프인 거야. 날 비 전하라고 부르면 절대 안 되고. 알았지?”

“네! 기억했어요!”

“저도 기억했습니다.”

“좋아. 그럼 슬슬 들어가 보자.”

긴장되긴 나도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얼굴을 보고 가야 했다.

* * *

“무슨 사람을 저렇게 많이 데려왔대요.”

“아무래도 공작 각하의 이동이니, 보안에 신경 쓰는 거겠지.”

“그래도 저렇게 인간들이 바글거리면 불쾌하단 말이죠.”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거야.”

미샤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아버지의 부관, 펠리오를 따라 움직였다.

여관을 아예 통째로 빌린 모양인지 안에는 티어드롭의 병사들만 있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시선을 옮기다가 잠시 숨을 멈췄다.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늘 온 병사들 중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이게 단지 기우이면 좋을 텐데.’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티 낼 순 없었다.

대신, 나는 눈을 굴려 주변을 탐색했다.

여관은 통로가 작고 좁은 편이고, 문을 대체할 수 있는 창문도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다.

“각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펠리오가 문을 열어주며 허리를 굽혔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는 변함없이 아버지의 완벽한 부관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만나고도 처음 본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굴 리 없었으니까.

샤리에트가 아닌 나는 그에게 있어선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일 뿐이었다.

나는 펠리오가 그랬듯, 딱히 감흥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방 안에는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나는 바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서서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완벽한 부관처럼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봐도 아버지는 그려놓은 듯, 완벽한 티어드롭 공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이구나.”

먼저 침묵을 깬 건 아버지 쪽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랬듯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을 수 있게끔 맞은편 의자를 빼주었다.

신사에게 어울리는 에스코트였다.

“네, 그러네요.”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아버지가 빼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쓰고 있던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그늘이 사라지자, 스며든 조명 빛에 눈이 시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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