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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70화 (70/204)

| 70화

70화. 사랑스러운 아가씨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데요?”

“그건 당신이 고민해봐야죠. 그때까진 저도 절대 입 안 열 거예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좋아하기로 한 건데.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당신도 그러길 바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라나는 욕심은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해버렸으니까.

일부만 갖는 건 싫었다.

가질 거라면 전부를 가지고 싶었다.

거대한 사내 안에 나를 꽉꽉 채우고 싶었다.

* * *

“어휴, 죽겠다! 죽겠어!”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부나방이 어떻게 불을 보고 안 달려들어. 네 놈은 모르겠지만 원래 재미란 그런 스릴에서 오는 거거든.”

말라즈가 신이 나 떠들수록 페잔의 이마 주름은 깊어졌다.

“아직도 노름을 하는 건가?”

“그건 재미 삼아 조금만 하는 거고.”

“…….”

“전하한테 이를 건 아니지? 아니어야 해! 나 지금 벌도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말라즈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페잔은 한심하다는 시선을 감추지 않으며 말라즈가 들고 있는 추에 무게를 더 했다.

말라즈는 거친 숨을 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같은 동기끼리 이러기 있어? 치사한 자식 같으니라고!”

“아직 입을 나불거리는 걸로 봐선 힘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가끔 보면 전하보다 네가 더 나쁘단 말이야!”

“네가 매번 그럴 만한 짓을 저지르니 그렇지.”

페잔은 단호히 말을 자르고는 추를 골랐다.

입을 다물만한 적당한 무게의 추를 골라줄 참이었다.

“오, 저기 우리의 영웅 온다!”

추를 고르기도 전에 말라즈의 입이 다시 열렸다.

페잔은 말라즈가 반기는 인물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피 냄새가 나는군.”

“냄새가 많이 나나요?”

프로스트가 더듬더듬 옷을 매만졌다.

검은 옷은 피가 튀겨도 티 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피가 튀겨도 모른다는 단점도 있었다.

“씻는 게 좋을 것 같군. 여긴 성안이니까.”

“아무래도 비 전하도 계시니까요.”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프로스트에 페잔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는데, 프로스트가 걸어온 길에는 발자국이 붉게 나 있었다.

“전하를 곤란케 할 만한 짓을 저지른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냥 간단히 범죄자를 처리했을 뿐입니다. 말끔히 정리도 했고요.”

“간단히는 무슨. 페잔. 저기 우리 사신님 신발 좀 봐. 흙 묻었어. 쟤 설마 사람 하나 죽여서 묻고 온 거 아냐?”

“하나는 아니고, 둘입니다.”

“미친놈. 장난이 아니라, 진짜 묻고 온 거야?”

“아무래도 흔적을 남기면 곤란하니까요.”

마치 바닥에 흘린 음식을 닦아낸 것처럼 가벼운 어투였다.

말라즈는 쯧쯧 혀를 차며 동요 없는 프로스트를 응시했다.

원래 진짜 미친놈일수록 얌전하고 티가 나지 않는 법이었다.

“요즘 얌전히 사는 것 같더니 웬일로 움직였냐? 명령이라고 떨어졌어?”

“그냥 개인적인 업무였습니다.”

“개인적인? 너한테도 그런 게 있어? 맨날 그 희멀건 새만 보고 사느라 그런 건 없는 줄 알았는데. 아, 최근에 새롭게 관심사가 생겨서 그런가?”

“…….”

“농담이니까 그렇게 보지 마. 아무리 나라도 네가 그렇게 보면 무섭단 말이야.”

말라즈는 넉살 좋게 웃어 보이고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벌을 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습긴 해도 일단 말해두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연장자로서 말해주는데 그냥 접어라.”

“…….”

“나야 재미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네 이야기를 쉬쉬했는데, 아무래도 우리의 주군께서는 진심이신 모양이야.”

“…….”

“그러니 어쩌겠어. 충직한 신하들은 얌전히 그 뜻에 따라야지.”

말라즈는 웃었지만, 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은 평소와 다르게 몹시 진지했다.

아무리 장난을 좋아하고 가볍게 굴어도 결국 그 역시, 모나차르트 대공의 사람이었다.

블러쉬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그에 따를 뿐이었다.

자신을 낳은 건 부모일지언정 살린 것은 제 주군이기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기꺼이 목숨을 걸 자신이 있었다.

* * *

“슬슬 수익이 줄기 시작하네.”

“낯선 환경에서 광산 채굴 작업에 어려움을 겪으며 회의감을 갖는 이들이 늘고 있는 실정이니까요.”

여관이나, 대여 사업은 일단 사람이 있어야 수익이 되었다.

한때 황금에 대한 열풍으로 바글바글 사람이 몰렸을 때는 제법 쏠쏠한 사업이 되었지만, 점점 사람이 줄어들며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상단 쪽에서도 슬슬 불만이 나오고 있지 않아?”

“면담을 요청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죠.”

“그래도 전부는 아니잖아.”

“아무래도 고민되긴 할 테니까요.”

“날씨며, 장비며 다른 걸 다 떠나서 눈앞에 금이 있으니까 쉽게 놓긴 어렵겠지. 딱 선택의 기로야.”

눈치나, 혹은 포기가 빠른 이들은 벌써부터 계약을 무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반대의 길을 선택한 이들도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포기를 어렵게 만드는 법이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면담을 신청한 이들 중 익숙한 이름이 있다는 거지.”

나는 티어드롭의 문장을 매만졌다.

요정의 후예라는 말에 걸맞게 티어드롭의 문장은 요정의 날개를 형상화해 만든 것이었다.

“아가씨의 정체를 드러내면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될 겁니다.”

“상관없어. 언제까지 숨죽이고 있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얻을 게 더 크기도 하고.”

나는 샤리에트의 실적을 보며 쓰게 웃었다.

단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내 계획을 따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한때였다.

적어놓은 계획은 무한하지 않았고 언젠간 끝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지금쯤 애매한 입장이겠지.”

차라리 완벽하게 뛰어나면 문제없이 일을 맡길 테고, 반대로 모나면 대신할 만한 사람을 찾으면 됐다.

하지만 샤리에트는 이도 저도 되지 못했다.

어설프게 잘하고, 또 어설프게 못하고.

결국 어중간한 실력은 모나차르트의 금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괜한 기대를 심어 포기조차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궁금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상황 속 돌아온 대용품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말이야.”

* * *

“금광 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 일단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떵떵거리던 이들도 불리한 입장이 되니 태도가 달라진다.

나는 그런 모순을 비웃으며 느긋하게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날 바라보는 이들의 당황한 표정을 보는 건 퍽 재미있는 일이었다.

설령 내가 누군지 모르더라도 다른 얼굴은 알 테니까.

친자매로 착각하리만큼 나와 샤리에트는 무척이나 닮았다.

티어드롭 공작 영애와 닮은 것은 물론 은발에 녹안, 티어드롭의 상징을 가진 나를 보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모나차르트 측 대리인입니다.”

대공비라는 사실은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나는 모나차르트 측 대리인이라는 가면을 쓴 채 태연히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그 순간조차 날 향한 시선은 열렬하기만 했다.

“금광 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죠? 어떤 점 때문에 그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 그게 말입니다…….”

눈치를 살피는 시선을 보아하니 확실히 샤리에트의 얼굴은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느긋하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내 기억 속 샤리에트가 곧잘 잘하던 습관이었다.

나는 최대한 날 보는 사람들의 눈에 내가 샤리에트처럼 보이길 원했다.

“이야기가 있으셔서 오신 게 아닌가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말입니다.”

“놀라요?”

“제가 아시는 분과 무척이나 닮으셔서 말입니다.”

티티아나 상단 측 대리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한참 나를 멍하니 바라본 게 스스로 생각해도 멋쩍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물론 이것도 샤리에트의 버릇 중 하나였다.

“제가 그분과 그렇게 많이 닮았나요?”

“닮았다마다요.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던 정돕니다.”

“그렇게 닮았다니 저도 한번 보고 싶네요.”

말투는 사근사근하게, 눈웃음을 최대한 부드럽게, 그리고 웃음소리는 낭랑하게.

내 기억 속 샤리에트를 따라 하며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해사하게 웃었다.

내가 죽던 날, 나를 향해 웃어주던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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