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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69화 (69/204)

| 69화

69화. 듣고 싶은 말

* * *

“엔제너스 경이 금화를 줬다고요?”

“그래서 걱정 중이야. 사람은 참 순한데 혹시나 이상한 곳에 걸려서 된통 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

멜시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쩐지 그녀는 못 들을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보였다.

“혹시 프로스트가 사기당한 전적, 아는 거 없지? 내가 보기엔 프로스트는 사기를 당해도 그게 사기인지 모를 것 같던데.”

일단 걱정되어 원래 목적도 잊고 단단히 일러두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아니면, 그이에게 언질이라도 해둘까. 그래도 내 말보다는 직속상관의 말을 더 잘 들을 거 아냐.”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왜?”

“엔제너스 경에게 사기 칠 만한 인사는 없을뿐더러, 무엇보다 사기를 친다 해도 그 후가 문제니까요.”

“문제?”

멜시는 고심하다가 손날을 세워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결국 끝은 이런 것일 테니까요.”

“…….”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비 전하께서 엔제너스 경을 어떻게 보시는지 알 것 같은데. 생각하시는 것처럼 만만한 분은 아닐 겁니다.”

“만만하지 않다고?”

“괜히 전하 다음가는 실력자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그걸 알면서도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프로스트와 내가 아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그렇게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저 들어가도 되나요?”

“물론이지. 들어와.”

“감자가 수확할 때가 되어서요. 아가씨한테 가장 먼저 알려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진짜?”

“상태는 전부 꼼꼼히 체크했고 남은 건 맛을 확인하는 것뿐이에요.”

“만찬 준비를 해야겠네.”

나는 들려온 기쁜 소식에 일어났다가 미샤 손에 들린 익숙한 주머니에 미간을 찌푸렸다.

저 주머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미샤, 그거 뭐야? 어디서 났어?”

“여기 집무실 앞에 떨어져 있길래 아가씨 것인 줄 알고 주워왔는데. 아닌가요?”

“내 건 아니지만, 주인은 알 것 같아서 말이야. 나 줄래?”

미샤는 선뜻 내게 주머니를 건넸다.

혹시나 해서 열어봤더니 주머니 안에는 금화 대신, 보석이 들어있었다.

돈이 싫다는 게 보석을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가짜네요.”

“응?”

“진짜랑 가짜랑 섞여 있어요.”

“진짜?”

사기당할까 걱정했는데, 진짜 당했구나.

보석을 받고 어이없었는데, 이제는 연민이 든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보석을 선물한 채 헤실헤실 웃고 있을 프로스트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 * *

막상 수확한 감자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요리할 것도 없어 간단히 쪄서 나눠 먹으며 만찬을 대체했다.

나는 삶은 감자를 쥔 채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이 시간대면 정원에 나와 있을 것이었다.

나는 하늘에 이스가 날고 있는 걸 확인한 후, 정원도 마저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가 만나러 온 상대가 있을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화 안 났으니까 나와.”

“…….”

“안 나오면 화낼 거야.”

솔직히 이런 협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프로스트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풀 속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뭐해. 이리 와.”

쭈뼛쭈뼛 선 프로스트를 향해 손짓했다.

내 말을 어기고 보석을 놓고 간 게 걸리긴 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이건…….”

“감자야. 이번에 처음 수확했거든. 대단한 맛은 아니지만 맛보여주고 싶어서.”

“…….”

“안 받을 거면 말고.”

“아닙니다.”

프로스트가 다급히 내 손의 감자를 가져갔다.

나는 피식 웃고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내보였다.

“이것도 가져가고.”

“이건…….”

“내가 돈을 거절한 건, 보석 달라는 뜻이 아니었어.”

“……보석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프로스트가 강아지였다면 귀며, 꼬리며 전부 처져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비 맞은 개처럼 처량하게 서 있는 프로스트를 보며 웃었다.

“나는 보석보다는 다른 게 더 좋거든.”

“다른 거요?”

“네 얼굴.”

“…….”

“정 주고 싶으면 그냥 얼굴이나 보여줘. 예쁜 얼굴인데, 맨날 가리고 다니면 아깝잖아.”

저번에 내가 아무렇지 않았던 거 알지?

나는 대답을 종용하며 프로스트를 올려다봤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이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제야 나는 챙겨온 보석 주머니를 프로스트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진품과 가품을 구분하느라 하나였던 주머니는 두 개로 늘어버렸다.

“살펴보니까 가짜 보석이 조금 섞여 있더라고. 그래서 구분해놨어. 검은색이 진짜고, 하얀색이 가짜야.”

“…….”

“걱정하지 마. 널 의심 안 하니까. 속인 사람이 나쁘지, 속은 사람이 나쁜 건 아니잖아.”

그 많은 금화도 잘도 내주던 프로스트가 굳이 가짜 보석을 선물로 줄 리 없었다.

그의 손에 들어오기 전부터 가짜일 확률이 컸다.

“사람이 착한 것도 좋지만, 너무 믿진 마. 생각보다 세상은 험하단 말이야. 알았지?”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으로 프로스트의 팔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아쉽게도 오늘의 그는 천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확인하는 게 어려웠다.

* * *

프로스트에게 감자를 나눠주고 돌아왔을 때도 조촐한 감자 파티는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피다가 벽 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곧장 달려갔다.

“언제 오셨어요?”

“아까 왔는데 안 계시더군요.”

“잠깐 만날 사람이 있었거든요. 전해줄 물건도 있었고.”

“볼 사람이요?”

“프로스트요.”

“방금 프로스트라고 하셨습니까? 프로스트 엔제너스?”

블러쉬의 매끄러운 이마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나는 그걸 펴주고 싶단 생각을 하며 그의 옆에 붙었다.

“네. 맞아요.”

“의외로군요. 프로스트는 사람을 상대하는 걸 어려워하는 편인데.”

“그래서 따로 감자를 전해주고 왔죠.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여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요.”

“…….”

내가 대답을 잘못했나?

별다른 말 없이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모르는 사이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것 같아서요.”

“그동안 여러 일이 있었거든요.”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대강 요약해 설명했다.

“제가 모르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블러쉬의 시선이 문득 한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웃고 떠들고 있는 말라즈가 있었다.

방금 살기가 느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었겠지.

블러쉬의 눈치를 살피는데, 손이 잡혔다.

“어딜 보십니까.”

“먼저 다른 곳을 본 건 당신이잖아요.”

먼저 시작해놓고 탓하는 건 아니지.

나는 엄한 표정으로 눈에 힘을 줬다.

물론 그런다고 블러쉬가 날 겁내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나는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빠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럼에도 날 보는 시선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 억울해지는군요.”

“억울이요?”

슬쩍 고개를 드니, 블러쉬의 입매가 삐딱해져 있었다.

“누군 쉽게 이름이 불리는데, 저는 아니라서요.”

“…….”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사내에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별다른 언급이 없어서 들키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제 이름만 안 불러주실 겁니까?”

“당신은-”

“당신이 제 이름은 아니죠.”

“이렇게 나오실 거예요?”

내가 왜 이름을 못 부르는지 뻔히 안다는 얼굴이면서.

억울한 기분에 인상을 써도 블러쉬는 변함없는 태도로 일관할 뿐이었다.

어떻게서든 내게서 자신의 이름을 끌어내게 할 셈이었다.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부끄럽단 말이에요.”

“다른 이들의 이름은 잘만 부르시면서요?”

“그건 다른 사람이니까요. 당신이랑 다르죠.”

“뭐가 다르죠?”

“뭐가 다르냐니, 그건…….”

꼭 내 입으로 이런 말까지 하게 만들어야 하나.

나는 억울한 마음을 담아 힘주어 발음했다.

그 와중에 약간이나마 원위치로 돌아온 사내의 입매에 가슴께가 뻐근해지는 내가 싫었다.

“……말 안 할 거예요.”

“왜죠?”

“생각해보니 저는 아직 못 들었거든요. 듣고 싶은 말.”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넘어갈 뻔했는데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나는 쿵쿵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며 눈에 힘을 줬다.

사내의 뜻에 맞춰주기에는 걸리는 점이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참고 다 말했는데, 블러쉬는 아니었으니까.

그는 아직까지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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