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6화. 좋아서요
* * *
“나랑 내기할래? 누가 비 전하 마음을 사로잡는지?”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이, 너도 눈치챘잖아. 우리의 사신님께서 평소 같지 않다는 거 말이야.”
말라즈는 동기의 질색하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이미 두 분은 결혼한 사이다.”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잖아. 솔직히 너도 알잖아. 두 분이 나눈 계약서에 어떤 살벌한 말들이 담겨 있었는지 말이야.”
말라즈는 과거 보았던 모나차르트 대공 부부의 결혼 계약서를 떠올리며 눈을 휘었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예상할 수 없으리만큼 당시의 계약서에서는 피비린내가 날 것 같았다.
“그것도 전부 예전 일이지.”
“아직까지 계약서가 살아있으면 예전일 순 없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인 거잖아.”
말라즈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질색하다 못해 혐오하는 페잔의 표정은 꽤나 웃겼지만, 지금은 그보다 즐거운 일이 도래한 터였다.
“나는 진짜 궁금한데. 전하의 말이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것 같은 녀석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말이야.”
“일시적인 감정일 거다.”
“그건 우리로선 알 수 없지. 걔 하는 짓 봤잖아.”
말라즈의 입술이 더욱 위를 향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한 것처럼 굴던 사내가 저보다 한참 작은 여자의 눈치 보느라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미리 말해두는 건데, 전하께 괜한 소리 하지 마라.”
“에이. 내가 미쳤다고 그런 소리를 하겠어.”
그렇게 되면, 진짜 재미있는 게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릴 텐데.
말라즈는 진짜 속내 슬쩍 감추며 프로스트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모나차르트의 대공비께서 도대체 어떻게 검은 사신을 홀린 건지는 모르나, 확실한 건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많은 싸움이 있지만, 치정 싸움만큼이나 재미있는 건 없으니까.
‘과연 누가 이기려나.’
추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지만, 세상일은 원래 알 수 없는 법 아닌가.
특히 그것이 여자의 마음이라면 더욱 그랬고.
말라즈는 흘겨보는 동기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 *
“다 씻으셨습니까?”
“언제 오셨어요?”
“아까 전에요.”
“그러면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
“네. 기다리고 있었죠.”
블러쉬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물소리 하나에도 별생각을 다 했던 나와 달리, 그의 얼굴은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알고 보면 몹쓸 생각은 내 쪽에서 더 많이 하는 것일지도.’
나는 눈을 찡그렸다가 마주친 시선에 급히 미소를 지었다.
찡그린 얼굴보다 웃는 쪽이 예쁘게 보일 테니까.
“시찰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브라운 부인도 만났고, 흥미 있는 것도 찾았어요.”
“흥미 있는 거요?”
“그게 뭐냐면…….”
말을 하려는데, 블러쉬가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앉으라는 신호였다.
나는 입가가 실룩거리는 걸 참아내며 사뿐사뿐 걸어갔다.
여전히 블러쉬의 얼굴을 보는 건 힘겨웠지만, 부끄러운 걸 이겨낼 만큼 옆에 있는 게 좋았다.
“다시 이야기하시죠.”
“그게, 마물 출현 횟수가 잦아지면 눈폭풍이 오는 일이 잦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쓰시려고요?”
“눈폭풍이 오면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라면서요. 그러면, 누군가의 발을 묶는 용도라던지 그런 거로 쓸 수도 있잖아요.”
쓸 수 있는 건 뭐든 써먹는 게 좋지.
시기가 잘만 맞으면 역병이 올 때 쓸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식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었다.
모나차르트에게는 익숙한 재해일지라도 외부인들에게는 아닐 테니까.
우리만 아는 정보만큼 귀한 건 없었다.
“누구의 발을 묶으실지도 생각해보셨습니까?”
“거기까지는 아직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건 차차 생각해보려고요.”
어설프게 끝을 맺었는데도 바라보는 시선은 다정했다.
나는 흘러나오는 미소를 꿀꺽꿀꺽 삼켜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음에 더 생각나면 이야기해드릴게요.”
“그러시죠.”
“음, 그리고…….”
다음 대화 주제로는 정령의 알이 떠올랐지만, 그건 엘프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들 측에서 쉬쉬하는 이야기를 먼저 섣불리 꺼낼 순 없었다.
“굳이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네?”
“심포니아가 하는 이야기면 뭐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서.”
“제 이야기라고 해봤자…….”
나는 손끝으로 침대 시트를 만지작거렸다.
머리를 굴려도 그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이야기는 대부분 티어드롭을 빼놓고는 할 수 없는 것뿐이었으니까.
“……저 말고, 당신이 이야기해주는 건 어때요?”
“저요?”
“그래도 당신은 저에 대해서 알지만, 저는 아니잖아요.”
“제 이야기를 들어봤자, 썩 재미있진 않을 텐데요.”
“그래도 궁금한걸요.”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지, 항상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그게 왜 궁금하신 겁니까?”
“당연히 궁금하죠. 왜냐하면.”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다음 말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마음 준비가 필요했다.
“당신이 좋아서요.”
“…….”
아, 드디어 말했다.
나는 계속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는 사실에 멋쩍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좋으면 더 알고 싶고 그런 거잖아요.”
“…….”
“아닌가요?”
“…….”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그런데……, 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싸늘한 반응에 나는 슬쩍 발을 뺐다.
아무래도 달콤한 분위기를 주도하기에는 내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였나요?”
“안 되는 건 아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좋은 선택이 아니죠.”
“왜요?”
“키스하고 싶어지거든요.”
“아.”
곤란하다는 듯 쓰게 웃는 사내의 표정에 가슴께가 뻐근한 건 왜일까.
나는 날 내려다보느라 그늘진 블러쉬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릿한 숨을 뱉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뛰는 심장은 어디 하나가 고장 난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졌습니다.”
“네?”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정말인가요?”
“그런 눈을 바라보시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긍정적인 대답에 일순간 환호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헤실헤실 웃어버렸다.
“대신, 조건 있습니다.”
“조건이요?”
“제게 질문하신 만큼 저도 질문할 겁니다.”
“제 이야기는 들려드릴 만한 게 없는걸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러쉬가 빤히 나를 바라봤다.
원하는 걸 주지 않으면 자신도 주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뭘 물어볼지 걱정되었지만, 그보다는 그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대신, 제가 먼저 물어봐도 되나요?”
“그러시죠. 그래서, 뭘 물어보고 싶으신 겁니까?”
“음, 그게 말이죠…….”
선수를 치긴 했지만, 막상 물어보려고 하니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블러쉬는 내가 질문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줬다.
“괜찮습니다. 기다릴 테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시면 물어보시죠.”
“……전에 용병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네. 그랬죠.”
천하다 여겨지는 용병 일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도 블러쉬는 덤덤했다.
“힘들지 않으셨어요? 저번에 보니까, 흉터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아서…….”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굳이 감출 것도 없는 이야기거든요.”
“혹시 모르잖아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안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질문을 하면서도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잘못 말했다가 내 의도와 다르게, 블러쉬에게 상처를 남길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미리 말해두는 건데, 혹시 이야기하기 싫으신 부분 있으면 안 해주셔도 돼요.”
“걱정해주신 건 감사하나, 그런 건 없습니다. 저 역시, 뻔한 모나차르트 사람일 뿐이니까요.”
“뻔한 모나차르트 사람이요?”
“죽는 것이 두려웠던 적은 없었거든요. 반대로 사는 게 두려웠던 적은 있었지만요.”
아무렇지 않다는 게 정말인 건지, 블러쉬는 이야기를 꺼내는 내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내 쪽이 더 그를 걱정하고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