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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63화 (63/204)

| 63화

63화. 방금 전 닿은 열기

설마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새까만 사내가 창문에 앉아있었다.

나는 잘 있는 문을 내버려 두고 왜 창문을 쓰는지 의문을 품다가 이내 생각을 지웠다.

생각해보면 정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조차 그는 창문에서 등장했었다.

“엔제너스 경?”

“…….”

“맞죠?”

프로스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눈치껏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그를 탐색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눈이라도 보이면 좋겠는데,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맨 사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추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우리 두 번째로 보네요.”

끄덕.

“며칠 전에 만났던 거 기억하나요?”

끄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고개에 나는 턱을 괬다.

프로스트는 말 한마디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반응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제가 보낸 쪽지 읽고 온 거죠?”

끄덕.

“혹시 말 못 하는 거 아니죠?”

도리도리.

나는 말로, 프로스트는 고갯짓으로.

이상하긴 하지만, 대화는 어찌어찌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다른 질문을 몇 개 더 할 때까지 꿋꿋이 입을 닫고 있는 프로스트를 보며 슬쩍 운을 뗐다.

“나랑 이야기하기 싫은 건가요?”

이번에는 좌우로 오가는 고갯짓이 거칠었다.

표정을 확인할 수 없어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프로스트가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싫지 않으면 목소리 들려주면 안 되나요?”

“…….”

“계속 이렇게 나 혼자 떠드는 건 이상하잖아요.”

“…….”

“안 될까요?”

두 손을 가슴에 올린 채, 간절히 바라보자 시커먼 사내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같아서요.”

“음?”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나는 슬쩍 프로스트 쪽으로 다가갔다.

“제, 제 목소리가 불쾌하게 들리실 것 같아서요.”

“불쾌요?”

끄덕.

드디어 목소리를 끄집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도로 사내의 입이 굳게 닫혔다.

나는 프로스트를 빤히 올려다봤다.

전에도 생각했던 바지만, 바들바들 떠는 사내는 묘하게 덫에 걸린 초식동물을 연상시켰다.

“왜 불쾌해요. 경의 목소리 무척 좋은데.”

“…….”

“그러니, 그게 말하지 않는 이유라면 그냥 편하게 말해주면 안 될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자연스럽게 끄덕여지려던 고개가 일순간 멈췄다.

그리고 대신, 작디작은 목소리가 수줍게 그 뒤에 덧붙여졌다.

“……네.”

이 사람은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큰데, 왜 이렇게 작게만 보이는 걸까.

나는 어차피 눈이 보이지도 않는데, 시선을 어디에다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프로스트를 보며 옅게 웃었다.

멜시는 그가 블러쉬 다음 가는 실력자라고 말했지만, 지금으로선 도무지 다른 모습이 예상되지 않았다.

“실은 제가 쪽지를 보낸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경의 새 때문이에요.”

“이스 말인가요?”

프로스트가 되묻듯 이름을 언급하자 기다렸다는 듯, 창틀에 앉아있던 새가 날개를 펄럭거렸다.

얼핏 봐도 윤기 흐르는 깃털을 가진 새에서는 주인의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이름이 이스예요?”

“네.”

“예쁜 이름이네요.”

시선이 또 방황한다.

불안한 아이처럼 왔다 갔다 흔들리는 고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보여줬다.

그는 지금껏 봐온 사람들 중에서 감정 동요가 가장 잘 보였다.

그래서 내심 걱정이 됐다.

앞으로 내가 전하게 될 소식은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실은 제 친구가 이스를 보고 걱정을 해서요.”

“걱정이요?”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나쁜 뜻은 없다는 건 알아주세요. 오히려 돕고 싶어서 이런 말 하는 거니까요.”

나는 빠르게 심호흡을 한 후에 곧장 말을 이었다.

“제 친구의 말로는 이스가 정해진 수명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말하더라고요. 아마도 억지로 살려둔 것 같다고. 그래서-”

“잠시만요!”

프로스트가 급히 내 말을 멈추고는 이스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뭐라 속삭인 후,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죄, 죄송합니다. 이런 건 이스는 들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

이런 사람이 암살자라고?

나는 사과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프로스트를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뇨. 오히려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사과 안 하셔도 됩니다.”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손이 퍽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경도 사과하지 마세요.”

“…….”

“안 하실 거죠?”

“……네.”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말 잘 듣는 아이 같다.

나는 그가 진짜 아이였으면 머리를 쓰다듬어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면, 아무리 억지로 생명을 살려놔도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생명체의 몸은 정해진 수명에 맞게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이스는…….”

나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냥 웃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요.”

“…….”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나쁜 소리를 들을까 걱정해줄 정도였다.

그런 이를 잃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괜찮을 리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경만 괜찮으면 이스에게 도움 되는 약들을 챙겨주고 싶어서요.”

“약이요?”

“제 친구가 한 제안이에요. 그 친구가 대단한 약재사거든요. 도움이 될 거예요.”

눈은 보이지 않는데, 시선은 느껴졌다.

나는 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오지랖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 아니. 죄송합니다.”

“왜 사과하는 거예요?”

“제가 비 전하의 말을 멋대로 끊었으니까요.”

푹 숙인 고개에서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보면 볼수록 순진무구한 사람이었다.

“내가 대공비라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시저 경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대공비의 집무실로 찾아오라 하셨으니까요.”

프로스트가 조심스럽게 품에서 쪽지를 꺼냈다.

내가 미샤와 함께 보냈던 쪽지였다.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늦었지만 정식으로 인사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오히려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울지도 모른다.

나는 점차 가라앉는 사내의 목소리에 급히 손을 들었다.

“그럼 마주칠 때마다 서로 인사하는 걸로 할까요?”

“……네?”

“실은 나는 경과 잘 지내고 싶거든요.”

“저, 저와요……?”

프로스트가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프로스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대 만난 이후로 계속 다시 보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도저히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죄, 죄송합니다.”

“그걸 왜 죄송해하는 거예요.”

“죄송-”

“또, 사과하려고 하네요.”

내가 지그시 올려다보자, 프로스트의 양어깨가 축 처졌다.

분명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빤히 보였다.

“지금 할 말 없어서 곤란하죠?”

“……네.”

“그러면, 그냥 잘 지내보자고 말하면 돼요. 경도 대공비랑 친해져서 나쁘지 않잖아요.”

“…….”

“저랑 친해지는 거 싫어요?”

고개를 까닥거리자, 프로스트의 몸이 자잘하게 떨렸다.

“싫은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왜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들이랑은 많이 친해졌는데, 경은 이제 만나서 친해질 틈이 없었잖아요.”

“…….”

“같은 모나차르트 사람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죠.”

같은 모나차르트 사람이라는 말에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프로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론 겁먹은 초식동물에게 그러하듯, 아주 조심스럽게.

* * *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아침의 일에 꿀꺽 침을 삼켰다.

“늦으셨군요.”

“죄송해요. 잠깐 이야기할 게 있어서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보이기 위해 애쓰며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기에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나 따가웠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서운한데요.”

“서운이요?”

“실은 기대한 게 있었거든요.”

뒤를 돌지 않았지만 발소리는 들렸다.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좁혀진 거리에 사내의 체온이 느껴지고 있었다.

“기대요? 뭘-”

촉.

“이런 거 말이죠.”

“…….”

아니, 이 남자가.

나는 당황해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렸다.

드러난 목덜미에선 방금 전 닿은 열기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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