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2화. 등 뒤에서
* * *
‘누가 본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만약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생각에 나는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복도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책망하는 와중에도 아침의 일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드러웠지.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떠오르는 아까의 풍경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열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 입술 아프세요?”
“어?”
“자꾸 입술 만지시잖아요.”
“그냥, 입술이 조금 건조한 것 같아서.”
나는 미샤의 눈총을 피해 몸을 돌렸다.
입맞춤 소식을 들으면 미샤가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그러면, 제가 입술 보호제라도 만들어드릴까요?”
“입, 입술 보호제?!”
“왜 그렇게 놀라세요?”
“미샤가 그런 것도 만들 수 있나 신기해서 그렇지.”
나는 서둘러 변명거리를 만들어 붙였다.
다행히 미샤는 이런 쪽으로는 둔한 편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한테 그 정도는 쉽죠. 원래 아가씨 화장품도 만들어드리려고 했는데, 잘됐네요. 만드는 김에 겸사겸사 입술 보호제도 만들어야겠어요.”
“내 화장품?”
“여기 와서 아가씨 피부가 많이 거칠어졌잖아요. 그걸 보니 제 마음이 아파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말라깽이 녀석을 닦달해서 재료를 얻어왔죠.”
다행히 미샤는 별 의심 없이 약상자를 뒤졌다.
나는 작업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내 볼을 만지작거렸다.
“내 피부가 그렇게 많이 상했어?”
“아가씨는 피부가 거칠어져서도 예쁘시죠.”
“어쨌든 피부가 거칠어지긴 했단 소리네.”
나는 피부를 손끝으로 쓸었다.
이렇게 작정하고 만져 보니, 확실히 수도에 있을 때보다 피부가 거칠어졌다.
‘사실 당연한 결과이긴 한데…….’
모나차르트는 춥고 건조한데다가, 수도에 있을 때처럼 정성껏 피부 관리를 할 시간이 부족했다.
피부는 관리한 만큼 티가 나는 만큼 전보다 상태가 못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블러쉬를 떠올리니 지금껏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 크게 느껴졌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그에게 더 잘 보이고 싶었고, 더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괜찮아요. 제가 금방 부드럽게 만들어드릴 테니까요. 정령수를 듬뿍 넣어서 만들어드릴 테니, 수도에서 썼던 화장품보다 훨씬 효과가 좋을 거예요.”
“정령수는 화장품에 쓰기엔 너무 고가품 아니야?”
“아가씨가 쓰실 건데 비싼 게 어딨어요. 무엇보다 저희에게는 말라깽이가 있잖아요. 부족하면 녀석에게 뜯어오면 되죠.”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미샤는 당당하다 못해 뻔뻔했지만, 나는 차마 그녀를 타박할 수 없었다.
정령수가 들어간 화장품이 욕심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그거 보셨어요?”
“어떤 거?”
“새하얀 새 말이에요. 요즘 들어 종종 창공을 날아다니던걸요.”
미샤는 새를 흉내 내듯 손을 휘휘 저었다.
“주인 있는 새야. 얼마 전에 성으로 돌아왔다고 했어.”
“주인 얼굴 보셨어요?”
“보긴 했지. 딱 한 번뿐이지만.”
작정하고 숨으면 찾을 수 없을 거라는 멜시의 말처럼 프로스트를 본 건 그날 딱 한 번뿐이었다.
가끔씩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없다면 그가 성에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었다.
“그 주인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었어요?”
“웬일로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가지는 거야?”
미샤가 먼저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흥미 어린 얼굴을 한 미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해서요.”
“신기?”
“원래라면 한참 전에 죽어야 했을 새가 아직 살아있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한참 전에 죽어야 했다니?”
미샤는 쪼르르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갔다.
마침 밖에서는 새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저렇게 건강해 보이는 것치곤 생기가 너무 약해요. 저건 타고난 수명대로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 억지로 저 새를 살려둔 거예요.”
“누군가가 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보통 이런 경우, 범인은 뻔하잖아요.”
미샤는 엄지와 엄지를 입에 물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하늘을 날던 새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숲의 일족이라는 이명답게 엘프는 동물들과 친화력이 높은 편이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그게 맹점이에요. 지금은 건강해 보일 수 있어도 언제 죽을지 모르거든요.”
미샤가 검지로 부드럽게 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교부리듯 미샤의 손길에 맞춰 움직이는 새는 귀여웠다.
“억지로라도 살렸으니 괜찮은 거 아냐?”
“그런 게 가능했다면 세상에는 죽은 자가 없겠죠. 솔직히 이런 건 시간 끌기에 불과해요.”
“시간 끌기?”
“이런다고 해서 몸의 수명이 느는 건 아니니까요. 몸의 수명이 끝나면 끝은 뻔하죠.”
미샤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새를 안은 채 걸어갔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
“사실 이렇게 살려두는 것도 자연의 법칙에는 위배되니까요. 딱히 뭔가를 해줄 순 없어요. 솔직히 장로님이 보셨다면 당장 땅으로 돌려보내라 하셨을걸요.”
“…….”
“그래도 약 정도는 지어줄 수 있으니까요.”
미샤는 사탕처럼 동글동글한 약을 꺼내 새에게 먹였다.
인간을 향한 태도를 제외하고는 그녀는 동식물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다.
“새의 주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걸요. 저야 자연의 법칙에 예민한 종족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보통 인간은 그러지 않을 테니까요. 아, 물론 마법사면 조금 다를지도요.”
“마법사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하긴, 저도 이곳에서 마법사의 기운은 느껴본 적 없으니까요.”
미샤는 약 하나를 새에게 추가로 먹이고는 도로 창가로 갔다.
나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문득 든 생각에 손을 들었다.
“잠깐만.”
“왜 그러세요?”
“쪽지를 묶어두면 되지 않을까?”
“쪽지요?”
“정해진 죽음이라도 갑자기 맞이하면 힘들잖아. 모르면 몰랐을까, 마음 정리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어서.”
“나쁘지 않네요. 실은 이 녀석도 주인을 엄청 따르는 눈치였거든요.”
내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샤는 서둘러 달려와 펜과 종이를 찾아 내게 내밀었다.
그녀는 인간이 쓰는 언어를 읽거나 말할 줄은 알지만 쓰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글을 쓸 일이 있으면 자연스레 나나, 플렌을 찾곤 했다.
나는 서둘러 짧은 쪽지를 작성한 후, 미샤에게 건네줬다.
새 다리에 묶기 위해선 그렇게 많은 내용은 쓸 수 없어 간단히 용건만 적었다.
* * *
“오지 않으려는 걸까.”
“그러게요.”
턱을 괸 채 문만 바라보고 있는 나와 미샤를 보며 플렌이 미간을 찡그렸다.
“누구 기다리십니까?”
“응. 기다리고 있는데 오질 않네. 아무래도 안 오려나 봐.”
나는 아쉬움을 느끼면서 문에서 시선을 뗐다.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슬슬 정리하고 들어가 봐.”
“그 사람한테는 이야기 안 하실 거예요?”
“오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올 순 없으니까. 안 되면 그이에게 부탁해볼게.”
멜시의 말에 따르면, 블러쉬는 프로스트와 이야기를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를 통하면 이야기 정도는 전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내일은 시찰 가야 하니, 일찍 들어가 쉬는 편이 좋긴 하겠죠.”
“내일 시찰 가세요?”
미샤가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반짝거렸다.
기대 어린 눈은 원하는 바가 분명했다.
“미샤도 같이 갈래?”
“그래도 돼요?”
“계속 연구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바람도 쐴 겸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갈래요! 무조건 갈 거예요!”
“그럼 얼른 들어가서 쉬어. 내일 일찍 가야 하거든.”
“네! 네!”
신이 난 미샤가 폴짝폴짝 뛰며 집무실을 뛰어다녔다.
저럴 때 보면 정말 애 같다니까.
나는 웃으며 플렌에게 시선을 옮겼다.
“플렌도 얼른 들어가. 늦잠 자면 두고 갈 테니 말이야.”
“그건 미샤에게나 통용되는 일이죠.”
“야. 말라깽이,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그럼 아가씨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섭게 올라가는 미샤의 눈초리에 플렌은 성급히 인사를 하고 방을 벗어났다.
“야! 너, 거기 안 서?! 아가씨, 죄송해요! 저도 먼저 가볼게요!”
“그래. 잘 가.”
두 사람이 사라지자, 집무실은 금세 고요해졌다.
나는 잠잠해진 집무실에 어색함을 느끼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여러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보니 꼼꼼하게 정리해주지 않으면 일정이 꼬이기 일쑤였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다 끝났다 해도, 내일 할 일을 미리 정돈해두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한참 서류를 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 안에 있으니까 들어와.”
나는 별생각 없이 대꾸하며 서류를 넘기다가 불어온 바람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노크 소리가 들린 건 문이 아닌 내 등 뒤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