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대용품이었다-60화 (60/204)

| 60화

60화. 버거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었다.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닿은 시선이 집요하게 느껴졌지만, 거리가 있기 때문일까.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쉽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블러쉬는 내 쪽을 빤히 지켜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딱히 감흥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그 사실이 거슬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나, 담백한 반응에 힘이 빠졌다.

* * *

“오늘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내가 한 건 구경한 것밖에 없는데.”

“구경한 것밖에 없다뇨. 비 전하께서 제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데요. 덕분에 그 말도 안 되는 일정의 훈련 시간이 팍 줄지 않았습니까.”

훈련 시간과 내가 구경하는 게 무슨 상관이라고.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세웠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외면하는 블러쉬를 보고 나서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터라 모든 게 고깝게만 느껴졌다.

“괜찮으시면 내일도 와주시면 안 될까요?”

“나 바쁜데.”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도와주십쇼. 저도 나중에 비 전하께서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말라즈가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하게 매달렸다.

나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냥 훈련받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구경하고, 안 하고에 따라 차이가 그렇게 커?”

“평소 같으면 하겠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은?”

“저, 열띤 연애 중이란 말입니다.”

말라즈가 보란 듯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들겼다.

진지한 표정은 그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나, 지금 대화와 맥락이 잘 어울리진 않았다.

“연애하는 것과 훈련이 무슨 관계인데?"

“멜시에게 못 들으셨습니까? 지금 기사들 사이에선 곡소리가 난다는 거요.”

“멜시는 별말 안 했는데.”

말라즈가 질색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나 주위를 굉장히 신경 쓰는 눈치였다.

“하긴, 그녀는 비 전하를 모신다는 이유로 여러 훈련에서 배제되었으니까, 아무런 불만도 없겠네요.”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은 불만이 있다는 걸로 들리는데?”

“물론 저는 불만 없습니다.”

말라즈가 재빨리 싱긋 웃었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내가 보기엔 말라즈가 제일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

“…….”

“다른 사람에게 말 안 할게.”

내가 한 제안에 말라즈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어지간히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불만은 제가 제일 많죠. 다른 놈들이야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아본 숙맥들이 수두룩하지만 저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요즘 전하랑 훈련하다 보면 멍이 그렇게 들거든요. 그것도 조금이 아니라, 온몸에 덕지덕지 말입니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멍드는 것과 연애가 어떻게 이어지는 거야.”

“이게 말입니다. 남녀가 서로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옷을…….”

“옷을?”

말라즈는 양손을 비비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아닙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제가 아무리 막살아도 목숨은 소중하거든요.”

그건 또 무슨 소리람.

아까부터 알 수 없는 소리만 들어놓는 말라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결론은 이런 과격한 훈련이 제 연애 사업에 썩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결론이 왜 그렇게 나는 거야?”

“솔직히 멍든 몸을 가진 사내를 좋아하는 여자가 어딨겠습니까.”

“있을 수도 있지. 세상은 넓잖아.”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적어도 모나차르트에는 없을 겁니다. 이곳 여자들이 얼마나 깐깐한데요. 약골은 받아주지도 않는단 말이죠.”

멍든 몸을 들킨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말라즈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저 이번에는 정말 잘 되고 있거든요. 잘만 풀리면 저도 어엿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될 수도 있고요.”

“가장 노릇 하는 말라즈는 뭔가 이상한데.”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도와주세요. 저 조만간 거사를 치를 예정이라서 더욱 몸을 아껴야 한단 말입니다.”

“거사?”

“남녀가 만나서 치를 만한 거사가 뭐 더 있겠습니까.”

말라즈는 음흉하게 웃으려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미간을 좁혔다.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방금 했던 말 취소하겠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겁니다.”

“이미 다 들었는데.”

“그래도 모른 척해주십쇼. 제가 이런 소리 했다는 거 전하가 아시면 기어코 절 늑대 밥으로 던져주시고 말 겁니다.”

“그래?”

“비 전하께서도 제가 늑대 밥이 되길 바라시는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말라즈를 고발할 생각은 없지만 절실한 모습을 보니 괜히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다른 것보다 궁금했던 점도 있었고.

“내 질문에 대답해주면, 못 들은 걸로 해줄게.”

“정말이십니까? 그게 뭡니까. 뭐든 물어 보십쇼.”

말라즈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날 내려다봤다.

금방이라도 꿀이 떨어질 것처럼 진한 금발과 창공을 닮은 새파란 눈동자.

전형적인 미인의 색과 굵직한 선으로 이루어진 사내는 반박할 여지 없이 대단한 미남이었다.

그럼에도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게 말라즈는 그냥 말라즈일 뿐이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든 의문을 쉽게 물어볼 수 있었다.

“부끄럽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그 거사라는 거 말이야.”

“예?”

말라즈가 못 들을 이야기를 들은 얼굴로 날 바라봤다.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신기해서 물어보는 거야.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부끄러워하지 않고 웃을 수 있는지.”

“…….”

도로시야 연륜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말라즈는 나나, 멜시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런 이야기만 꺼내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우리와 다르게 노련함이 엿보이는 사내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도 연습하면 되나?”

“연, 연습이긴 하죠?”

“그럼 혹시 마음 가는 이성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것도 연습으로 가능할까?”

“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마도요.”

말라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아예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 호기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의 내겐 간절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럼 연습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글, 글쎄요.”

“아예 방도가 없는 거야?”

“저는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라서요.”

“여러 사람?”

“아무래도 연애라는 것도 경험치가 쌓이는 법이니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보면?”

어? 방금 끼어든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말라즈의 것도 아니고.

말라즈와 나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그리고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삐걱 몸을 돌렸다.

어느새 우리 뒤에는 너무나 익숙한, 하지만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서 있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디 한번 말해보지 그래?”

붉은 눈이 빤히 우리를 향한다.

사내의 시선은 늘 그렇듯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으나, 자세히 보면 분노가 섞여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말라즈가 다급히 블러쉬를 향한 예를 차렸다.

하지만 블러쉬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블러쉬의 시선은 내게만 향해있었다.

말라즈 역시, 이 사실을 눈치챘는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발을 뒤로 뺐다.

“두 분, 이렇게 눈빛이 뜨거우신 걸 봐선 나누실 이야기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훈련장에 가 있어.”

도망치려는 말라즈를 귀신같이 알아챈 블러쉬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말라즈는 눈치껏 분위기를 살피다가 나름대로 상황을 환기해보고자 애써 웃어 보였다.

“에이, 전하. 오늘 훈련은 다 끝나지-”

“허튼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걸 보니 체력이 남는 것 같아서 말이야.”

“…….”

말라즈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차마 말은 꺼내지 못했지만 꼼지락거리는 손과 간절한 시선은 나를 향해 최선을 다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내가 가기 전까지 훈련장을 달리고 있도록.”

“그건 너무 잔인한-”

“페잔.”

“네, 전하.”

“네가 옆에서 저 녀석이 게으름 피우지 않게 지켜보고.”

“알겠습니다.”

충직한 페잔이 손이 망설임 없이 말라즈의 뒷덜미를 잡아 그를 끌고 갔다.

말라즈가 도움을 요청하듯 간절히 나를 바라봤지만 내게는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채 날 내려보는 시선만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블러쉬는 명령내리는 와중에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