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59화.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런 차림을 한 사람이라면 아마 엔제너스 경일 거예요.”
“엔제너스 경?”
“풀네임은 프로스트 엔제너스. 전하 다음가는 모나차르트의 실력자죠.”
“그런데 나는 한 번도 못 봤지?”
“이번에 돌아왔다고 했거든요. 저를 포함해서 아직까지 그분을 봤다는 사람은 드물지만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블러쉬가 용병들이 돌아올 거라 말하긴 했었다.
그것과 별개로 여전히 도망쳤던 프로스트의 심경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나는 까만 천을 뒤집어쓰고 있어 거대한 검은 덩어리처럼 보였던 사내를 떠올리며 턱 끝을 매만졌다.
“봤다는 사람이 드물다는 건 무슨 뜻이야?”
“그게 그분은 워낙 인기척을 잘 숨기고 다니셔서요. 마음먹고 숨으시면 웬만한 사람은 찾지도 못합니다. 괜히 그런 일을 하는 게……, 흠흠.”
멜시가 아차 싶었는지 눈을 굴렸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
결국 멜시는 포기하고 닫았던 입을 열었다.
“그게, 그분은 은밀한 일 전문이라서요.”
“은밀한 일?”
“정보 수집이나, 뭐 이런 은밀한 일이요.”
“정보 수집으로만 안 끝날 것 같은데.”
“…….”
“그이 다음가는 실력자가 정보 수집만 하는 건 이상하잖아. 솔직히 말해봐. 뭐 더 있지?”
나는 손등에 얼굴을 올린 채 멜시를 다시금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나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다소 있었다.
“뭐가 더 있긴요.”
“암살?”
“…….”
“맞구나.”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멜시는 표정에 생각하는 바가 다 드러났다.
“흐음, 암살이라. 뭔가 어울리면서도 안 어울리는데.”
“안 어울리긴요. 입고 다니는 것도, 하는 것도 딱 암살자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내가 보기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본 사내는 전형적인 암살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하는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암살자라기보다는 좀 더 아기자기한 느낌일까.
“아, 그래. 토끼.”
“예?”
“토끼를 닮았어.”
“토, 토끼요?”
“풀 뜯어 먹다가 천적을 발견하고 서둘러 도망치는 토끼 말이야. 그거 닮은 것 같아.”
“가끔 비 전하께서는…….”
멜시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뺨을 긁적거렸다.
나는 뒷말을 알 것 같았지만 모른 척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단순히 오해한 거라서 다행이야. 첩자인 줄 알고 걱정했거든.”
“설마요. 여기가 어떤 곳인데. 괜히 잘못 들어왔다간 개죽…….”
딱히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말해도 되는데.
나는 눈치를 살피는 멜시가 귀여워 픽 웃었다.
“오래간만에 고향에 온 거면 환영식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용병들에게 그런 게 뭐 있나요. 오면 온 거고 가면 가는 거죠. 특히 엔제너스 경이라면 더 그렇죠.”
“어째서?”
“사람이랑 어울리는 걸 안 좋아하시거든요. 그분이랑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사람은 성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일걸요.”
멜시는 손가락 하나씩 접다가 세 개째에서 멈추고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세어봐도 열 손가락은커녕, 겨우 다섯 손가락도 안 차네요.”
“누군데?”
“전하랑 시저, 케이즈 경. 이렇게 세 분이요.”
시저는 말라즈, 케이즈는 페잔의 성이었다.
나는 익숙한 이름들을 곱씹다가 문득 든 생각에 손을 들었다.
“혹시, 엔제너스 경도 함께였어?”
“네? 뭐가요?”
“저번에 말했잖아. 그이가 용병 생활을 했다고. 말라즈와 페잔도 그때 그이를 만났다고 했으니, 엔제너스 경도 그럴 것 같아서.”
“같이 활동하셨긴 했지만 만난 시기는 달라요. 엔제너스 경은 훨씬 전부터 전하를 알고 있었다고 했거든요.”
훨씬 전부터? 그러면 블러쉬와 알고 지낸 지 가장 오래되었다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자, 수상했던 인물이 더욱 궁금해졌다.
“언제 만난 건지도 알아?”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저도 선배들에게 들은 거라서요. 다른 분들께 물어보시는 게 훨씬 빠르실 거예요.”
“다른 사람이라…….”
나는 호기심을 채워줄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블러쉬였지만, 차마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자신은 없었다.
그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말라즈였다.
“웬일이야. 여기까지 다 오고.”
“다름이 아니라, 비 전하의 도움이 급하게 필요해서 말입니다.”
“내 도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말라즈가 대뜸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당황해 다급히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나보다 한참 큰 사내를 일으켜 세우는 건 불가능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안 어울리게.”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셔야 일어날 겁니다.”
“뭐?”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날 바라보는 눈이 새삼 진지하다.
처음 보는 말라즈의 진지한 얼굴이었다.
능글맞던 그가 이럴 정도면 일이 있어도 분명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나는 고심하다가 결국 말라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말해봐. 뭘 알아야 도와줄지 말지 할 거 아냐.”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래.”
“정말이시죠?”
“그러니 얼른 일어나. 무슨 일인데 무릎부터 꿇고 그래.”
재촉하자, 말라즈는 그제야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나 비 전하께서 거절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비 전하께서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공치사는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말해. 그래서 내게 뭘 부탁하고 싶은 거야?”
“비 전하의 따뜻한 마음씨죠.”
“내 따뜻한 마음씨?”
“네. 비 전하의 따뜻한 마음씨요.”
말라즈는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해사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뭐지, 묘하게 속은 것 같은 이 기분은…….’
찜찜한 기분에 콧잔등을 찡그려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라즈를 올려다봤다.
* * *
말라즈가 부탁한 일은 대단한 건 아니었다.
다른 부탁은 일절 없이, 며칠만이라도 매일 아침 이곳에서 서서 시간을 보내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냥 무시하시지 그러셨어요.”
“거기서 무릎까지 꿇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무릎도 무릎 나름이죠. 솔직히 깃털도 시저 경의 무릎보다는 무거울걸요.”
멜시가 말라즈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내놓으며 나를 따라 바깥을 바라봤다.
이곳에서는 기사들의 훈련장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속은 기분이 들긴 해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 건, 보고 싶은 얼굴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블러쉬를 찾았다.
아쉽게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 내가 찾는 얼굴은 없었지만, 벌써부터 심장은 그를 볼 생각에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계속 피해 다녔던 내가 할 말은 아니나, 나는 항상 그가 보고 싶었다.
결국 내가 블러쉬를 피했던 건 싫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좋아서였으니까.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에 써볼걸.’
이 정도 거리라면 상대를 육안으로 파악할 순 있어도 자세히 볼 순 없었다.
내 얼굴이 빨개지든, 말을 더듬든 간에 블러쉬에겐 보일 걱정이 없었다.
다시 말해 오래간만에 마음껏 블러쉬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얼른 왔으면 좋겠는데.’
난간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고 있는데, 저 멀리 기다리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손에 힘을 줬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블러쉬의 얼굴을 본 건 정말로 오래간만이라서 답지 않게 들뜬 탓도 있었다.
‘멀리서 봐도 제일 잘생겼네.’
내 얼굴도 아닌데, 괜히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움직이고 있는 블러쉬에 집중했다.
하지만 블러쉬는 기사로 보이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내 쪽에서는 그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왕이면 이쪽으로 얼굴을 돌려주면 좋겠는데.
아쉬움에 콧잔등을 찡그리고 있는데, 저편에서 말라즈가 별안간 두 팔을 휘휘 저으며 나를 반겼다.
“비 전하! 여기입니다! 여기요!”
날 부르는 말라즈의 외침이 얼마나 컸던지, 다들 내게로 시선이 집중될 정도였다.
하지만 말라즈는 그 정도로 만족 못 했는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이런 건 사전에 이야기해줬어야지.’
말라즈에게 닿지 않을 불만을 토하며 물러서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무리에서도 한 사람만큼은 똑바로 보였다.
블러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