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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58화 (58/204)

| 58화

58화. 이상한 사람

* * *

“온다면 온다고 이야기하질 그랬어. 그랬으면 내가 진작에 마중 나갔을 텐데.”

“괜찮습니다. 폐를 끼쳐드릴 순 없습니다.”

“폐는 무슨. 네 덕분에 살았는데.”

말라즈는 한껏 흐뭇한 얼굴로 프로스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온 동료가 이토록 반갑게 느껴진 건 오래간만이었다.

“살아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전하께서 말이야.”

말라즈는 말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이미 한번 말을 잘못 놀려 된통 당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부부 싸움을 하신 것 같아.”

“부부 싸움이라뇨?”

“너는 떠나있냐고 소식 못 들었겠구나. 하긴, 일부러 결혼한 것도 외부에는 쉬쉬하고 계시기도 하셨으니까 모르긴 하겠다.”

“……전하께서 결혼하셨다는 겁니까?”

“의외지? 나도 그래.”

프로스트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말라즈는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블러쉬 다음 가는 전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순해 빠진 동료는 조그마한 일에도 잘 놀랐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잘살고 계시더라고. 최근 들어 기분이 계속 저조하신 것만 빼면 말이지.”

“…….”

“역시, 부부 싸움을 한 거겠지?”

말라즈가 눈을 빛내며 프로스트를 바라봤다.

동의를 구하기 위함이었지만, 프로스트는 딱히 가십에 흥미를 가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바깥 물 좀 먹었다고 조금이나마 재미를 아는 녀석이 되어올 줄 알았는데, 너는 조금도 바뀐 게 없구나?”

“죄송합니다.”

“그렇게 사과하는 점이 재미없는 거야. 차라리 망할 씨씨가 훨씬 재미있겠어.”

“망할 씨씨요?”

“그래. 심지어 다 아는 씨씨도 모르는데, 내가 너와 무슨 말을 더하겠냐.”

말라즈는 아쉬움에 입을 쩝쩝대며 빈방을 가리켰다.

물 탄 것처럼 맹한 녀석은 페잔보다 재미없었다.

프로스트에게 재미있는 외부 이야기를 기대할 바에는 차라리 얼른 머물 방에 데려다주고, 다른 인물을 찾는 편이 나았다.

“당분간 이 방을 쓰고 오늘은 푹 쉬어. 네가 아무리 전하 못지않은 괴물이라 해도 쉴 때는 쉬어야 할 거 아냐.”

“네. 감사합니다.”

“그래. 너는 그런 녀석이지.”

말라즈는 방문을 열어주고는 훌쩍 떠났다.

프로스트는 멀어지는 말라즈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 곧장 창문을 열었다.

“이스.”

손으로 소리 내며 이름을 부르자, 연 창문으로 새하얀 새가 날아 들어왔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새, 이스는 그에게 있어선 가족과도 같았다.

프로스트는 이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고는 배낭을 뒤졌다.

이스를 위한 먹이를 챙겨줄 참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아무것도 없었다.

잘 보니 배낭 안쪽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구멍에 프로스트는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심했다.

그리고 곧 활과 화살통을 집어 들었다.

* * *

“그러다가 감기 걸리세요.”

“멜시, 먼저 들어가 있어. 나는 찬 바람 좀 더 쐴게.”

지금 감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새하얗게 부서지는 입김을 후후 내뿜으면서 성을 빙글빙글 돌았다.

온몸이 얼 정도로 찬 바람을 맞고 있으니 그나마 뜨거웠던 머리가 그나마 식는 것 같았다.

“저희 조모께서 그러셨잖아요.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요.”

“그건 나도 잘 알지.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얼굴 보기가 힘든 걸 어떡해.”

지금이야 일찍 들어가서 자는 척하고, 또 그만큼 일찍 일어나는 식으로 최대한 얼굴을 안 보며 버티고 있긴 한데 언제까지 그게 통할 리 없었다.

애당초 블러쉬는 민감한 사내였다.

내가 하는 행동을 모른다고 하는 것보다는 알면서도 넘어가 주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건데요?”

“애꿎은 생각을 안 하게 될 때까지.”

“…….”

“난 괜찮으니까, 멜시 먼저 들어가 있어. 나는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갈게.”

내 고집에 애꿎은 멜시까지 고생시킬 수 없어 서둘러 손짓하며 얼른 들어가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멜시는 그런 날 보다가 결국 입고 있던 자신의 외투를 벗어줬다.

“입고 계세요. 저는 안에 가서 껴입을 것 좀 가져오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비 전하께서 감기에 걸리시는 것보단 낫죠. 비 전하께서 아프시면 다들 난리가 날걸요. 저는 괜한 소리 듣고 싶지 않습니다.”

멜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 부분은 절대 양보해주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할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멜시가 사라지자, 더는 말 상대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티 없이 깨끗한 풍경을 보고 있다면 음험했던 머릿속도 정화가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고요에 어색하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뗐다.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좋았고, 무엇보다 새하얗게 내린 눈에 첫 발자국을 남기거들랑 은근히 정복감이 자극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뭐라도 만들어볼까.’

나는 쪼그리고 앉아 눈을 뭉쳤다가 바로 후회했다.

겁 없이 장갑도 끼지 않고 쥔 눈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어쩐지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인데.”

나는 금세 빨갛게 언 손을 달래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혼자 있길 망정이지, 멜시가 있다면 한 소리를 들었을 것이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뭔가 후두둑 하고 떨어졌다.

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고 머리에 떨어진 뭔가를 만졌다.

눈이었다.

아무래도 성에서 창문을 열면서 쌓인 눈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열린 창문을 바라보다가 날아드는 새를 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새를 처음 본 건 아니나, 저토록 새하얀 새는 처음 봐서 조금 신기했다.

‘그런데, 성에 새를 키우는 사람이 있었던가? 멜시가 오면 한 번 물어봐야…….’

“어?”

내가 잘못 본 건가?

당황해 눈을 비볐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창문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내 그 누군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대로 뛰어내렸다.

저 사람 미친 건가? 저긴 4층이잖아!

나는 놀라 소리 지르는 것도 잊고 허둥지둥 방금 본 사람이 떨어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어디 갔지? 분명 여기로 떨어졌을 텐데.’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다른 것도 아니고 4층에서 떨어졌는데 무사할 리 없었다.

못해도 팔이나, 다리 하나는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었다.

“…….”

“…….”

저거 사람 맞는 거지?

머리카락 한 올 드러내면 큰일이라도 나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새카만 천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이를 보며 나는 숨을 삼켰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누가 봐도 수상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방금 고층에서 떨어졌음에도 그는 다친 구석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고, 무엇보다 그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혹시 몰래 숨어든 첩자인가?’

철통 보안을 자랑하는 모나차르트 성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하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딨겠어.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괜한 소리를 떠올리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도망갈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별 의미 없었다.

내가 고심하기도 전에 이미 수상한 사내가 먼저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으니까.

‘무슨 속셈인 거지? 활을 들고 있으니 여유롭다는 건가?’

의심스러운 행동에 인상을 살짝 찡그렸을 뿐인데, 사내가 더 멀리 뒤로 물러났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다급한 걸음걸이에서는 감출 수 없는 당황한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고, 그와 함께 사내는 튕기듯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번에는 뒤가 아니라 앞으로 한 걸음을 뗐다.

그러자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의 세 걸음은 내게서 멀어졌다.

‘뭐지? 초짜인가? 그런 것치곤 성까지 몰래 침입했는데?’

겉모습만 봐선 들고 있는 활로 날 쏴버려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본인이 무기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었는지 활을 쓸 생각도 하지 않고, 놀라기 바쁜 사내를 보고 있자니 긴장감이 사라졌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며 두 손을 들었다.

어쩌면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저기, 어?”

-도망갔다.

나는 그저 대화를 나눠보고자 입을 열었을 뿐인데, 아예 도망가버렸다.

나는 꽁지 빠진 닭처럼 저 멀리 도망치고 있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며 헛숨을 삼켰다.

뭐지, 저 이상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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