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7화. 망상의 끝
* * *
“어떠신가요? 제가 보내드린 선물은 도움 되셨나요?”
“그게 말이야…….”
도로시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지만, 내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모르는 것보다 아는 편이 좋으리라 판단해 시작했는데, 오히려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벌어졌던 탓에 사실대로 고하기가 민망하고 어려웠다.
“괜찮으니 말씀해 보세요.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제가 아는 선에서는 알려드릴 테니까요.”
“…….”
“말씀하기 어려우신가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날 기다려주는 도로시의 모습에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함께 지낸 시간은 잠깐이었지만 어머니가 다정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슬프게도 나는 진짜 샤리에트가 아니었고, 어머니도 내 친어머니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럴 때면 어머니의 흐릿한 얼굴이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성교육을 하는 건 부모의 역할이었으니까.
아들의 교육을 아버지가 하는 것처럼, 딸의 교육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내게도 어머니가 있었다면 뒤늦게 얼굴을 붉힐 일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일단 브라운 부인이 보내준 책은 잘 읽었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몇 번이나 읽기도 했고.”
“그러시군요.”
“그런데, 오히려 문제가 생겼어.”
“문제요?”
“삽화 속 남자 있잖아. 그게 자꾸 그이로 보여서…….”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차마 다음 말은 하지 못했지만 실은 꿈까지 꿔버렸다.
“책 내용이 비 전하께는 너무 강했나 봐요.”
“웃지 마. 나는 정말로 진지하단 말이야.”
“비웃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그래요.”
“이게 뭐가 귀여워.”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귀엽다는 소리를 운운하기에는 어젯밤 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덕분에 가뜩이나 보기 어려웠던 블러쉬의 얼굴을 더욱 보기 힘들어졌을 뿐이었다.
“분명 내가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하려는 건 아니거든! 오히려 나는 삽화를 보면서 징그럽다는 생각을 했단 말이야!”
“그런데요?”
“……그이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징그럽지만은 않을 것 같은 거야.”
그래. 거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징그러워 보여도 상대가 블러쉬라면 괜찮지 않을까.
책을 읽으며 무심코 했던 생각은 이상한 쪽으로 흘러버렸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분명 말끔하게 옷을 잘 입고 있는 사내인데, 괜히 그때 벗었던 몸이 떠오르고, 심지어는 그 이상의 것까지 상상하고야 말았다.
“많이 좋아하셔서 그렇죠.”
“좋아해도 이건 아니지 않아? 그이는 아무렇지 않은데, 나 혼자 막 이상한 상상이나 하고 있고, 꿈도……!”
“꿈이요? 설마 꿈도 꾸셨어요?”
“…….”
침묵은 긍정인 법.
나는 동시에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 나온 도로시의 웃음을 들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그녀의 유쾌한 웃음소리는 마튼을 닮아 있었다.
“그것참 곤란하셨겠어요.”
“곤란한 정도가 아니야. 죽을 것 같아. 이런 생각할 때마다 미안하고, 죄책감이 드는데, 도무지 생각이 가시질 않는단 말이야.”
나는 억울함을 토로하듯 발을 동동 굴렀다.
“제 생각에는 미안해하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어째서?”
“전하께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 것 같거든요.”
“…….”
“벌써 얼굴 빨개지셨네요.”
도로시가 키득거렸지만 나는 정신 차리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내가 블러쉬를 그런 쪽으로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반대로 그가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도 모르게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손에 땀이 차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한 사람이 나오던 망상은 이제 두 사람으로 늘었다.
더 이상 심해질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망상의 끝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어쩌지. 나 이제 블러쉬 얼굴 더 못 보겠는데.
* * *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거구의 훈련생이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블러쉬는 몸을 살짝 비틀어 달려드는 장신의 훈련생을 피한 후, 우물쭈물하느라 아무 것도 못하는 어린 훈련생의 목덜미를 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눈 깜박할 새 없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말라즈는 높아져 가는 훈련생들의 비명 속에서 페잔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너, 뭐 아는 거 없어?”
“뭘 말이지?”
“뭐냐니. 네 눈에는 저게 안 보여? 평소보다 훨씬 과격하시잖아.”
말라즈는 눈치껏 눈을 굴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무표정한 상관의 얼굴을 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나, 오늘은 뭔가 좀 달랐다.
평소 같았으면 적당히 봐주면서 자세를 잡아줬을 텐데, 지금은 조언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한바탕 당하고 쓰러진 훈련생들의 신음과 남은 훈련생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상관의 목소리뿐이었다.
“혹시 비 전하랑 무슨 일 있으셨던-”
“말라즈.”
“예?”
별생각 없이 꺼냈던 말에 사나운 시선이 되돌아왔다.
말라즈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느릿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잘은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자신이 방금 뭔가 건드리지 말았어야 하는 걸 건드린 기분이었다.
“몸 좀 풀 겸, 오래간만에 대련 한 번 하지.”
“대, 대련이요? 오늘은 훈련생들 봐주시는 날이…….”
말라즈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왁자지껄 해맑았던 훈련생들은 어느덧 잡초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신세가 되어있었다.
저 상태로는 그들 중 누구도 블러쉬의 상대가 되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저들 사이에 자신도 곧 합류하게 될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말이 기사 훈련생이지, 블러쉬에게 훈련받는 이들은 곧 기사 서임을 앞둔 자들이었다.
실력 면에서는 정식 기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이를 전부 쓰러트렸음에도 조금도 기세가 죽지 않은 상관은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였다.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다는 거지?”
“뭔진 모르지만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말라즈는 뻔뻔하게 사과하며 허리까지 굽혔다.
지금 중요한 건 자존심 따위가 아니라, 내일의 데이트였다.
“시끄럽고 나와. 아직 훈련 시간이지 않나.”
“그럼 살살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건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러지 마시고, 저 내일 진짜 중요한 약속 있단 말입니다. 전하께야 어여쁜 아내가 있으시…….”
말라즈는 잽싸게 입을 닫았다.
심포니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미묘하게 변하는 블러쉬의 입술 끝을 보아하니 이번 일의 시작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차라리 페잔과 싸우게 해주세요. 제가 전하께서 마음껏 즐기실 수 있게 진검도 들겠습니다. 어떤가요?”
“헛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
블러쉬가 짜증스럽게 손을 까닥거렸다.
말라즈는 애써 웃으려 노력하며 두 손바닥을 내보였다.
별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무해하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안 오나?”
“정 안 되면, 목검이라도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말라즈는 서둘러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었다.
맨손인 상대에 무기를 들라고 말하는 게 이상해도 말라즈에게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
멋모르는 훈련생들이야 자신들만 목검을 드는 것에 미안해했지만, 오랫동안 블러쉬와 함께해온 기사는 그게 절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블러쉬가 무기를 들지 않고 대련하겠다는 건, 작정하고 패주겠다는 소리였다.
“페잔. 너도 함께 덤벼.”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라니! 이 멍청한 놈아! 까딱 잘못하다간 대련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말라즈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페잔은 바닥에 있는 목검 두 개를 쥐었다.
그리고 한 개는 자신이, 남은 하나는 말라즈에게 억지로 쥐여주고는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충직한 기사는 어떤 명이든 주인의 뜻을 따를 뿐이었다.
“나 내일 데이트 있단 말이야! 멍든 채로 쩔뚝거리면서 가긴 싫다고!”
“네 놈은 저잣거리 건달이 아니라 기사잖나. 데이트가 아니라 명령을 우선시해야지.”
“그건 너나 그렇지! 페잔, 넌 평생 가도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죽을 거다!”
말라즈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목덜미를 잡힌 채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힘으로는 페잔을 이길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이었다.
끼르르르-!
그때였다.
모나차르트의 설원만큼이나 새하얀 새가 울며 상공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말라즈는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새를 향해 두 팔을 휘휘 저었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