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6화. 의도치 않은 부작용
* * *
도로시로부터 약속한 선물이 온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나는 멜시가 건네준 선물 꾸러미를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포장을 뜯었다.
포장지 안에 든 건 새빨간 표지의 책이었다.
“별다른 건 적혀있지 않은 것 같은, 헉!”
별생각 없이 책장을 열었다가 반사적으로 그대로 덮어버렸다.
맙소사,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뭔가 대단한 걸 본 것 같은데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한 번 더 책을 펼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대로 책을 놓쳐버렸다.
활짝 펼쳐진 책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하, 할머니께서 이런 책을 가지고 계실 줄은…….”
당황한 건 멜시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서둘러 표지를 덮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눈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책에 다시 시선을 뒀다.
“내가 말했던 게 이런 뜻은 아니었는데…….”
아니. 맞긴 한가.
나는 내 예상을 웃돌던 삽화에 멍하니 있다가 겨우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방에 있는 게 멜시와 나, 단둘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마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마치 책이 야생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가 책을 주웠다.
“제게 주시면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아냐. 신경 써준 건데 받아야지.”
“손이 떨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멜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녀의 말대로 내 손은 아까 전의 충격을 잊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알아야 하는 거잖아.”
나는 애써 웃으려 노력하며 책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유난히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 * *
정말로 그런 게 실현 가능한 건가.
나는 멍하니 낮에 읽었던 책 내용을 되짚어보다가 혼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로시가 선물해준 책을 읽고 난 후부터는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그쪽으로 흘렀다.
책에 서술된 내용이 솔직히 낯설고 이상했지만,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식당에 들어서는 블러쉬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은 건 내 착각만은 아닐 것 같았다.
“먼저 와계셨군요.”
망설임 없이 다가온 블러쉬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아침에 봤던 모습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씻고 온 모양인지 비누 냄새가 났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 그게……, 머리카락이 젖어계셔서요.”
“머리카락요?”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아무리 당신이 강하다고 해도 감기에는 걸릴 거 아니에요.”
이번에는 제법 괜찮은 핑곗거리였던 것 같다.
나는 이 기세에 힘입어 재빨리 양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걱정해주셨다니 기분이 나쁘지 않군요.”
“당연히 걱정해야죠.”
나름 이야기를 잘 끌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마주친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껏 잘 유지하던 표정이 무너지려고 했다.
나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테이블에 셋팅된 냅킨을 풀었다.
계속 보고 있다간 책에서부터 시작된 이상한 생각이 다시금 떠오를 것 같았다.
“오래간만에 같이 식사하네요.”
“자주 식사를 함께하고 싶어도 바쁘시니까요.”
“최근 들어 일이 많아져서 그런 거니 할 수 없죠.”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눈을 마주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게끔 애쓰며 요리를 기다리는데, 얼굴이 따끔거렸다.
블러쉬가 턱을 괸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은요.”
“아까부터 저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셔서요.”
“…….”
이 사내는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 건지.
나는 흘끔 주방 쪽을 바라봤다.
혹시라도 음식이 나와 대화 흐름을 끊어주길 바랐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가 왜 당신 시선을 피하겠어요.”
“피하지 않으시면 봐주세요.”
“예?”
“대화는 상대의 눈을 보고 하는 거잖습니까.”
블러쉬가 느긋하게 검지로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그는 늘 그렇듯 별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내 눈에는 묘하게 그가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딱히 변명할 만한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됐죠?”
“보신 지 5초도 안 지났습니다.”
“그걸 세고 계셨어요?”
“혹시나 했거든요. 정말로 제 눈을 피하시는 건지, 아닌지.”
“…….”
가만 보면 사람 할 말 없게 잘 만든다.
나는 애꿎은 냅킨만 괴롭히다가 슬쩍 블러쉬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턱을 괸 채 날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라도 먼저 하길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아니에요. 그런 거.”
“제가 실수한 거라도 있는 겁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럼 심포니아 쪽일까요?”
“그, 그게 말이죠.”
설명을 하려 해도 말이 목구멍에 턱 걸려버렸다.
도로시에게 선물을 받은 책의 내용과 당신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 보인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털어놓는다면 책을 분명 그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었다.
그런 건 죽어도 싫었다.
“이것도 넘어가야 하는 건가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책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을 것 같단 판단하에서였다.
덕분에 블러쉬의 눈썹 끝이 올라가는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지만.
“워낙 비밀이 많으신 분이니 넘어가 드리죠. 단, 한 가지만 약속해주시면요.”
“……약속이요?”
“눈 피하지 마세요.”
“…….”
“심포니아가 눈을 피하면 제가 많이 섭섭하거든요.”
마주친 시선에 올라갔던 사내의 눈썹이 다시 원위치를 찾았다.
나는 짙은 눈썹 아래로 번들거리는 두 눈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안에서 뭉개지는 천의 감촉이 이상하리만큼 거칠게 느껴졌다.
유려한 눈매에 담겨있음에도 날 것 그대로 거친 사내의 눈처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곧 식사 차려드리겠습니다.”
때마침 시종이 들어온 건, 내겐 행운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음식들이 차려지자마자 재빨리 식기를 들었다.
“맛있겠네요. 많이 드세요.”
누가 봐도 뻔한 말 돌리기였지만 블러쉬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볼 뿐 따로 지적하진 않았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별다른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디저트 대신 준비된 차를 반쯤 마셨을 때쯤, 블러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주부터 대륙 전체에 흩어져있던 용병들이 조금씩 돌아올 겁니다.”
“용병이요?”
“다가올 역병을 생각하면 슬슬 나가 있던 사람들을 모아야죠.”
“괜찮은 생각이네요.”
제국에서 괄시받는 모나차르트지만, 용병으로서의 힘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갑자기 많은 용병들이 모나차르트로 모여들면 당연히 의심을 살 법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티 안 나게 조금씩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게 나았다.
특히 기본적으로 상인들은 용병단을 고용해 다니기도 하고, 지금은 모나차르트의 경제가 부흥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으니까.
일부 용병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해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었다.
“늘어날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바쁘게 움직여야겠네요.”
“…….”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지금은 절 잘만 보셔서요.”
“…….”
잊고 있었는데, 집요한 시선을 보니 다시금 책 내용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이럴 거면 나중에 볼걸.’
나는 혹여나 누가 볼까, 내 집무실 책상 깊숙이 숨겨놓은 붉은 책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용도 내용인데, 하필이면 책 표지도 붉은색이라는 게 문제였다.
책과 마찬가지로 붉은 블러쉬의 눈이 날 향할 때마다 엄한 생각이 드는 건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더 캐묻지 않기로 하신 거 아닌가요?”
“아직은 아닙니다. 저는 답을 못 들었거든요.”
“답이요?”
“어떤 순간에도 제 눈을 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시면 넘어가 드리겠습니다.”
선심 쓰듯 블러쉬가 살짝 고개를 까닥거렸다.
나는 한참 고심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꺼냈다.
“노력해볼게요.”
“노력까지 필요한 문제인가요?”
블러쉬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내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당신과 보낸 그날 밤 때문에 이런 것들이 궁금해졌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의도치 않은 부작용에 죄인처럼 침묵만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