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5화. 은밀한 책
“이러면 브라운 부인 손에도 흙이 묻잖아.”
“예쁜 손이 더럽혀지는 것보다는 낫지요.”
“나는 브라운 부인의 손이 훨씬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리가요.”
“브라운 부인의 손에는 세월이 있잖아. 부러울 정도로 멋진 손이야.”
도로시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비 전하께서는 듣기 좋은 말만 해주시는군요.”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러지.”
“이미 충분히 그러고 계세요.”
“정말?”
“비 전하가 아니었으면, 누가 이 얼어붙은 땅에 작물을 심을 생각을 하겠어요.”
도로시가 다정한 눈으로 감자 잎을 어루만졌다.
쉽게 깨지는 유리라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에서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그럼! 내가 첫눈에 알아봤지! 우리 비 전하께서는 큰일을 하실 분이라는 걸 말이야.”
마튼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도로시의 어깨를 주물렀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는 부러울 정도로 항상 사이가 좋았다.
“그나저나 모나차르트의 사정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데, 비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나?”
“전하와의 관계 말입니다.”
“할아버지.”
멜시가 급히 마튼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 정도로는 조부를 말릴 순 없었다.
마튼은 블러쉬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였다.
“전하께서 비 전하께 하는 걸 보면 두 분 사이에 뭐가 있어도 단단히 있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여보, 남의 일에 괜히 끼어들면 못 써.”
“남이라니. 뭐 그런 섭섭한 소리를. 이게 다 걱정되어서 그렇지.”
“걱정보다는 흥미 채우는 게 우선 아니고?”
도로시가 미간을 찡그리며 질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튼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그 이유도 없진 않지만, 뭐 어때. 늘그막에 재미있는 일이라곤 없는데. 젊은이들 연애사라도 들어야 살맛이 날 거 아냐.”
“비전하, 죄송해요. 이이가 원래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그런 걸 좋아해서 그래요. 괜히 다 들어주실 필요 없으세요.”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다니. 너무해, 당신.”
마튼이 우는소리를 했지만 도로시는 단호했고, 멜시 역시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보탰다.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비 전하, 할아버지 말씀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멜시, 너 마저…….”
“요즘 그런 소리 잘못했다간 노망났단 소리 들으니까, 그만하고 차나 가져와. 비 전하께 맛보여 드린다고 가져왔잖아.”
“차? 그렇지!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비 전하, 조금만 기다려 보십쇼! 제가 아주 맛있는 걸 하나 대접해드리겠습니다!”
도로시의 속삭임에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금세 기운을 차린 마튼이 일어났다.
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가져온 짐보따리를 뒤지더니 안에 든 병 하나를 꺼내 곧장 방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저이는 늘 그래요. 한 곳에 꽂히면 다른 건 금세 잊어버리고 열정을 불태우죠.”
“맞아요. 저희 할아버지는 항상 저러시죠.”
마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나를 달래줄 요량으로 도로시와 멜시가 연이어 말했다.
두 사람은 모두 지금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따라 웃었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브라운 가문은 항상 유쾌하게 지낼 것 같아.”
“마튼 덕분이죠. 늘 심심치 않게 해주거든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어린애같이 밝고 순수하죠. 그이가 있어서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몰라요.”
도로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생각하지만, 두 사람은 신기해.”
“신기해요? 어떤 점이요?”
“어떻게 지금껏 오랫동안 변치 않고 서로의 곁에 있을 수 있었는지 말이야.”
나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웃었다.
최근 들어 관계에 대한 생각이 많아져서일까.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노부부를 보고 있자면, 내심 부럽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단 생각이 유난히도 많이 들곤 했었다.
“저희도 변치 않은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간 좋은 일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았거든요. 다투기도 했고, 몇 번 헤어질 뻔도 했었답니다.”
“…….”
“그럼에도 저희가 지금까지 함께 해올 수 있었던 건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거예요. 결국 관계란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신뢰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서 오니까요.”
“이해라…….”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오래되고 낡은 것에는 지혜가 머무는 법이니까요.”
연륜 어린 눈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나는 다 안다는 듯 웃어 보이는 도로시에 멋쩍은 웃음만 흘렸다.
사실 어디 물어보고 싶었음에도 딱히 조언을 구할 곳이 없어 골머리만 앓고 있던 참이라 그녀의 제안은 달콤하게 느껴졌다.
“실은 요즘 고민하는 게 있긴 해.”
“걱정 마세요. 마튼이 차를 데워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
“아니면, 자리를 옮길까요?”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남편과 조금 일이 있어서 말이야.”
나는 말하기 전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주변도 살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부끄러웠던 탓이었다.
그렇게 나는 몇 번 더 헛기침을 하고는 도로시에게 며칠 전 블러쉬와 있었던 일을 대강 설명했다.
“그럼 두 분 아직도 첫날 밤을 안 보내셨다는-”
“쉿! 쉿! 목소리가 너무 커!”
당황한 나머지 내가 다급히 허공에 손을 휘휘 젓자, 도로시는 웃었다.
“비 전하의 목소리가 더 큰걸요.”
“그, 그래?”
“괜찮아요. 그러실 수도 있죠. 젊은 사람들은 그편이 풋풋하니 좋잖아요.”
내가 말하는 내내, 눈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던 멜시와 다르게 도로시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어른의 면모였다.
“그래서 비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고 싶으신데요?”
“응?”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신 데에는 듣고 싶으신 대답이 있으실 거 아니에요.”
예리하게 내 속내를 알아챈 도로시에 나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녀가 언급한 대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다.
“어, 음. 그게 말이지…….”
나는 방금 전처럼 애꿎은 헛기침만 하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낮췄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도로시의 귓가에 속삭였다.
도로시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이내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고민이셨던 건가요?”
“내가 그 방면은 잘 몰라서 말이야.”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까.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다.
“착각일 수 있지만, 내 예상으로는 분명 그이는 나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거든?”
“그건 제가 봐도 그래 보인 걸요. 전하께서 그렇게 대하던 여자는 비 전하가 처음이셨거든요.”
“……정말?”
“마튼이 괜히 난리 치는 게 아니죠.”
“흠, 흠. 다른 사람 눈에도 그런 게 보일진 몰랐네.”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건지.
올라가려는 양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애써 막으려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손끝을 꼼지락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도로시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말이야. 실은 나도 그런 것 같아서…….”
그런 거면 그런 거지, 그런 것 같아서는 뭔지.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손에 힘을 꾹꾹 줬다.
한 번 오른 열감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어쨌든 남녀 사이라는 게 좋게 진전되면 여러 일들이 있는 거잖아.”
나는 지난날의 블러쉬를 떠올리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블러쉬는 그날 밤의 일을 모른 척해주고 평소처럼 날 대해줬지만, 그런다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취할수록 오히려 기분이 이상했고, 그만큼 더 신경이 쓰였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 줄 모르는 거잖아. 그래서 아예 모르고 있는 것보다 미리 알고 대비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물론 내가 나쁜 생각을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더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그게 뭐 나쁜 건가요.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래?”
“물론이죠. 게다가 무엇보다 이런 건 감추기보다는 제대로 아는 편이 낫거든요.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에요.”
도로시가 다정히 웃었다.
나는 그 미소에 조금 더 용기를 얻어 손을 살짝 내렸다.
“실은 내가 이런 쪽으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고, 따로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괜찮아요. 누구나 처음은 있는걸요. 아, 그렇지. 제가 조만간 책 한 권 보내드릴게요.”
“책?”
“많은 도움이 되실 거예요.”
도로시는 선뜻 내 손을 잡아주었다.
전직 기사였던 그녀의 손은 거칠고 단단했지만, 손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는 손길만큼은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