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52화. 기억 안 나십니까?
* * *
“…….”
비명을 내지를 뻔한 걸 손으로 눌러 겨우 참았다.
몇 번이고 눈을 의심했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누군가의 벗은 등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도 내 남편으로 추정되는 사내의 등이었다.
‘왜 벗고 자는 거지? 전에는 안 그러지 않았나?’
나는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고자 애쓰다가 문득 떠오른 어젯밤 기억에 숨을 삼켰다.
‘……기억이 안 나.’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다음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내 기억을 멋대로 가위로 조각낸 것 같았다.
나는 넋 놓고 멍하니 사내의 등을 바라봤다.
차라리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쿵쿵,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박동과 함께 스며든 단편적인 기억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거 알아요? 본인이 엄청 잘생겼다는 거.”
“알죠? 알아서 그러는 거죠? 하긴, 모르면 그럴 수가 없지.”
“좋아서요.”
“천천히 좋아하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 각오를 다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는 더는 치미는 기억을 이기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배짱으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벌려 틈을 만들었다.
온갖 추태 속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하나였다.
“뭐해요. 얼른 벗지 않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전부 기억나지 않았지만 블러쉬의 셔츠를 헤집고 있던 내 모습만큼은 너무도 선명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블러쉬의 표정도.
‘……아무 일도 없었겠지? 정말로 없었던 건가?’
초조하게 입술만 만지작거렸다.
당장이라도 머리카락이라도 쥐어뜯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블러쉬가 깨면 낭패였다.
나는 모든 진상을 알고 있을 사내가 어서 일어나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러지 않길 바랐다.
드문드문 남아있는 기억들을 마저 떠올리자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일단 조금이라도 마음의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었다.
그 와중에 내 손은 눈에 띌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나온 탄성에 급히 다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다행히도 블러쉬는 바지는 입고 있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나는 어젯밤과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내가 입고 있는 가운 틈을 열었다.
혹시나 겉옷으로 입었나 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블러쉬를 바라봤다.
이것도 다행이라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사내는 별 미동이 없었다.
나는 혼자 눈에 힘을 줬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이내 몸을 축 늘어트렸다.
사내의 벗은 등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진 탓이었다.
오랜 단련으로 만들어졌을 단단한 근육질 몸은 신기하리만큼 균형이 잡혀있었지만, 대공이라는 신분에 걸맞지 않게 흉터로 가득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용병을 했다고 했지.’
만약 블러쉬가 다른 지역의 대공이었다면, 아니 적어도 평범한 귀족 영식이었다면 그때도 그의 등은 저렇게 흉터투성이였을까.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실제로 그와 닿은 건 아니었지만 닿을락말락 아슬한 거리는 괜히 사람의 마음을 심란케 하는 뭔가가 있었다.
‘많이 아팠겠지?’
크고 작은 흉터들 세고 있자니 속이 쓰렸지만, 동시에 블러쉬를 조금이라도 안 것 같은 기분 또한 들었다.
나는 마치 덧그리듯 흉터를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다 말고 손을 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뚜렷하게 흔적이 남은 흉터와 달리 절묘하게 손금과 겹쳐진 내 손의 흉터는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었다.
블러쉬의 흉터와 비교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기분이 더 이상했다.
나는 블러쉬가 내 손을 볼 때면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닌 듯해도 결국 다정한 사람이니까.’
나는 그렇게 한참 블러쉬를 바라보다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검지로 살짝, 그것도 아주 살짝 블러쉬를 건드렸다.
이번에도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심은 확신이 될 수 있었다.
“자는 척하지 않으셔도 돼요.”
“…….”
“전에 그러셨잖아요. 기척에 예민하시다고.”
“제가 깨어있으면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목소리에선 잠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입을 뗐다.
“진짜 잠들어 계셨던 거라면 모를까, 그런 척하는 게 더 곤란한걸요.”
내가 등 뒤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던 거 다 알면서 모른 척했던 거잖아.
만약, 내가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면 지금보다 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걸렸을 수도 있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결말에 나도 모르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언제부터 아셨던 겁니까? 처음부터?”
“그것보다 한참 후예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블러쉬를 의심한 건 몰래 등 뒤에서 흉터의 개수를 세고 있었을 때였다.
아무리 깊게 잠들었다고 해도 블러쉬는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다면 그대로 그가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속을 뻔했었다.
“원하신다면 계속 잠든 척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어차피 저희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아직 완벽한 확신이 들지 않았음에도 모른 척하고 슬쩍 떠봤다.
세상에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글쎄요.”
상대가 얼마나 호락호락한지에 따라 성공 여부가 달라지긴 하지만.
고양잇과 맹수처럼 느긋하게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블러쉬에 반사적으로 이불을 꽉 쥐었다.
옆으로 누워 머리를 괸 사내는 표정 관리에 능숙했다.
태연해 보이는 그에게서 진실을 캐내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뒤가 맨몸이라는 건 결국 앞도 마찬가지라는 뜻이었으니까.
당연하게 시야를 점령하는 굴곡진 몸에 나는 성급히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이럴 때는 차라리 침대를 보는 편이 나았다.
“장난하지 마세요.”
“왜 장난이라 생각하시죠?”
“저희 둘 다 옷을 입고 있잖아요.”
비록 입고 있던 내 옷이 바뀌고 블러쉬는 반만 입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둘 다 옷을 입고 있었다.
내 상식선에선 이런 상황에서 우려하던 일이 벌어질 확률은 낮았다.
“꼭 벗고 해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네?”
“성인이시니 충분히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까?”
“물론 저도 알 건 다 알죠.”
거짓말이었다.
제국은 비교적 성에 관대한 편이나 그건 평민들이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귀족 자제들에게 이루어지는 성교육 지식은 전무한 편이었고, 종종 알음알음 관계를 맺는 경우도 사교 활동이 활발한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알고 있는 건 교양으로 배운 생물학의 이론일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네. 당연하죠. 제 나이가 몇인데요.”
“확실히 나이가 느껴지긴 했죠.”
나름 허세를 부려봤는데 전혀 통하지 않는 건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마주한 헐벗은 몸에 급히 다시 시선을 아래에 뒀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 안 속아요.”
“제겐 속일 생각이 없으니, 속으실 이유도 없겠죠.”
“…….”
저 정도로 계속 말하는 거면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닌가?
태연하게 이어지는 블러쉬의 말에 나름 견고했던 믿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눈을 굴렸다.
“정말로 기억 안 나십니까? 제게 계속 옷을 벗으라 하셨는데.”
“저는…….”
“제가 안 벗으려고 하니, 직접 벗겨주겠다고 나서기도 하셨죠.”
“그, 그런 일이…….”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의심스러운 기억들이 있었다.
나는 입술만 달싹거리며 최대한 지난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 애썼지만 술에 잠식된 기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
“다만, 술은 조금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지만요.”
블러쉬는 그 말을 끝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나름대로는 배려였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 배려 덕분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그럴수록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처럼 느껴졌으니까.
나는 점점 더 멀어지는 블러쉬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