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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50화 (50/204)

| 50화

50화. 한잔할까요?

리치는 인간의 탐욕에 희생당한 피해자였다.

그녀는 미샤와 함께 인신매매단에 잡혔고, 친구인 미샤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니까.

그건 엘프의 긴 수명을 생각하면 덧없으리만큼 짧은 생인 동시에, 어떤 종족보다 고결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엘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악의 죽음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미샤는 괴로워했고 결국 그녀의 몸은 친구를 잃었던 시간대에 멈춰 더는 성장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죽지 않을 거야.”

“…….”

“내 수명은 미샤에 비해 한참 짧고 부족해서 이런 말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이거 한 가지만큼은 약속해줄 수 있어. 그날은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거 말이야. 그거면 된 게 아닐까?”

미샤는 날 빤히 보다가 이내 품에 푹 안겼다.

“당연히 아가씨는 그렇게 되시면 안 되죠. 아가씨는 누구보다 행복해지셔야 하는걸요.”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웃어줘야지. 나는 미샤가 웃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해지거든.”

“정말이시죠?”

“응.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고 웃어줘. 나는 그편이 좋거든.”

가슴에 남은 상처를 치료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말이 조금이나마 미샤에게 위안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상처 입고 숲으로 도망치듯 숨어 살았던 그녀가 날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결심을 반복했을지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결심이 상처를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의 시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 * *

굳게 문을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호흡을 반복해도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늦추는 건 어려웠다.

‘그냥 포기하고 미샤 방으로 가서 잘까.’

몇 번 시도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슬쩍 도망갈 구실이 떠올랐다.

이제 따로 자기로 한 건 미샤와 합의된 내용이지, 블러쉬와 나눈 이야기는 아니니까.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별거 기간을 늘릴 수 있었다.

‘어쩌지. 그냥 다음에 다시 올까? 아니면, 조금만 더 기다려?’

대답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지 않고서는 안에 있을 사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반, 그리고 도망치고 싶은 반인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의 방향을 잡기 어려워서였지만, 사실 질문을 던진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나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늦게까지 일을 한 건지 그는 아직 환복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시간까지 일하신 겁니까?”

“어차피 침실로 가도 혼자니까요.”

말에 뼈가 느껴지는 건 단지 내 기분 탓일까.

나는 어설프게 몇 번 헛기침을 하며 슬쩍 블러쉬를 바라봤다.

선택이 코앞에 왔음에도 나는 끝까지 말을 해야 하나, 마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실은 오늘부터 다시 해 보려고요.”

“뭘 말입니까?”

“이제부터 부부 침실을 쓸까 해서요.”

태연한 척 굴려고 애쓰긴 했지만 블러쉬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심이십니까?”

“이런 걸로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하지만…….”

“혹시 제가 돌아가는 게 불편하신 거라면-”

“그런 게 아닙니다.”

블러쉬답지 않게 성급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올려다봤다.

어쩐지 사내는 묘하게 당혹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돌아갈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저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쫓겨나 버려서요.”

“쫓겨나요?”

나는 대답 대신 멋쩍게 웃었다.

결코 날 놔주지 않을 것 같았던 미샤는 의외로 쉽게 날 놔줬다.

잡아주는 사람이 생겼다면 안전을 위해 그에게 잘 붙어 있으라는 게 그 이유였다.

그녀에겐 아직도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었으니까.

날 상처입힐 뻔한 상황을 겪자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안 재워주시면 저는 꼼짝없이 집무실 가서 자야 해요.”

“안 재워드릴 리 없지 않습니까. 애당초 이곳은 부부의 침실이니까요.”

블러쉬는 그 말을 하면서 선뜻 문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들어온 침실은 내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여긴 변한 게 없네요.”

“딱히 건드릴 만한 건 없으니까요.”

블러쉬가 내 뒤를 따라 들어오고서 문이 굳게 닫혔다.

쿵, 하고 울리는 문소리가 어쩐지 마지막을 알리는 선고처럼 느껴졌다.

“씻으셨습니까?”

“네, 네?!”

“환복하시고 계셔서 씻으셨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아, 네. 물론 저는 씻었죠.”

대단한 걸 물어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놀랐던 건지.

나는 괜히 달아오르는 뺨을 손을 꾹꾹 누르며 멋쩍게 웃었다.

담백한 척 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나는 긴장할 대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럼 저만 씻으면 되겠군요.”

“…….”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 씻는다는 말이었는데 왜 이리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술이라도 한잔할까요?”

“수, 술이요?”

“너무 긴장하고 계신 것 같으셔서요.”

“그게……, 아무래도 오래간만에 둘만 같이 있다 보니 조금 어색해서…….”

열기를 감추고자 손으로 뺨을 가리고 있는 건데 왜 자꾸 손끝이 말리는 건지.

나는 블러쉬와 시선을 마주치는 건 아예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나름 각오를 다지고 왔는데, 결의가 다소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군요.”

“네?”

“반응한다는 건 결국 절 사내로 의식한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반응하다 못해 너무 의식해서 탈이지.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토해내며 손에 힘을 줬다.

분명 지금 내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을 것이었다.

“씻고 나올 테니, 그 후에 같이 한잔하시죠. 술이 들어가면 긴장이 좀 풀릴 겁니다.”

예전에 과하게 술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계속 이렇게 어색하게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술을 마시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 술주정을 감당해주실 자신이 있으시면, 기꺼이요.”

* * *

씻는다는 건 몸을 청결하게 만드는 행위였다.

특히 청결은 사람의 건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이게 뭐 하는 거람.’

나는 더는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차라리 뭔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 않을 텐데, 고작 물소리 때문에 괜히 기분이 묘해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가 한심하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씻기 위해서는 당연히 옷을 입을 리 없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 정말 왜 자꾸 생각이 이렇게 흐르는 건지.’

잡념을 쫓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헤집었지만 소용없었다.

고작 그런 걸로는 한번 시작한 망상을 멈추기란 어려웠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이마를 짚은 채 끙끙거리던 눈에 문득 테이블에 놓인 술병이 들어왔다.

블러쉬와 함께 마시기 위해 하녀에게 따로 부탁해놓은 것이었다.

나는 슬쩍 눈치를 살핀 다음 조심스럽게 의자로 가서 앉았다.

못된 망상을 쫓아내기 위해서 한 잔 정도 먼저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딱 한 잔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잔만 마시는 거야.

결심을 굳히자마자 곧장 술병을 따서 잔을 채웠다.

모나차르트의 특산물인 벌꿀주였다.

‘처음 모나차르트에 왔을 때, 이걸 마시고 취했었는데.’

그때는 이곳에 적응하겠다고 오기로 마시던 술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턴 와인보다 벌꿀주를 마시는 게 더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다.

나는 황금빛이 감도는 술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잔을 입에 댔다.

잘 숙성된 벌꿀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첫맛은 씁쓰름했지만, 술을 삼키고 나면 입안에 은은한 벌꿀향이 맴도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한 잔을 비우고 나면 자연스레 또 한 잔이 생각났다.

‘한 잔만 더 마실까.’

딱 한 잔만 마시기로 했지만, 입 안에 남은 벌꿀향에 입안에 침이 고였고, 무엇보다 마시지 않으면 방음이 되지 않는 욕실의 물소리가 그대로 들려 겨우 잊었던 망상을 일깨웠다.

자꾸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마시고 있는 편이 낫지 않나. 어차피 그가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나는 빈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술병에 또 한 번 손을 댔다.

콸콸 잔을 채우는 황금색 술은 불빛 아래에서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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