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9화. 방어기제
* * *
“아가씨, 이것 보세요! 꽃이 자랐어요!”
“진짜? 정말이네!”
“좀 더 키워봐야 알겠지만, 이대로라면 금방 개량이 끝날 거예요! 드디어 아가씨와 단둘이 즐겁게 놀 시간이 오는 거죠!”
미샤가 한껏 뿌듯한 얼굴로 화분에 심은 감자를 가리켰다.
정령의 도움을 받아 성장 속도를 촉진한 감자는 어느덧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감자꽃이 이렇게 생긴 줄은 처음 알았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쁘네.”
“저는 꽃보다 아가씨가 훨씬 더 예쁘다고 생각해요.”
“날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야?”
“저 빈말 안 하는 거 아시잖아요. 진짜 농담하는 게 아니고, 세상에 피어난 어떤 꽃보다 아가씨가 제일 예뻐요. 솔직히 꽃 따위가 아가씨에게 비비는 게 말이 안 되기도 하지만요.”
“두 분, 평소에 그러고 노시는 겁니까?”
고개를 돌리니, 시비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우리를 흘겨보고 있었다.
하지만 미샤는 싸늘한 시비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히 손가락 세 개를 내보일 뿐이었다.
“아가씨와 내 시간을 방해할 생각하지 말고 꺼져.”
“여긴 제 집무실입니다만.”
“네 집무실보다 아가씨가 더 중요해.”
“늘 그렇듯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시는군요.”
시비스가 질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런다고 기가 죽을 미샤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나 시비스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궤변이 아니라, 제일 중요한 걸 말하는 거지. 솔직히 우리 아가씨 없었으면 이 땅이 이렇게 잘될 수나 있었겠어? 이게 다 우리 아가씨 덕분이라니까?”
“공훈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그 아가씨라는 호칭을 쓸 겁니까?”
“아가씨를 아가씨라고 부르는데, 그게 뭐가 어때서?”
“결혼한 사람은 아가씨라고 안 부릅니다. 제대로 된 호칭이 아니죠.”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미샤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비 전하라든가.”
“나는 너희 쪽 사람이 아니거든? 너희들의 잣대를 내게 들이밀 생각은 하지 마.”
“부인이라든지.”
“우리 아가씨가 몇 살인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불러.”
“정 그러면, 이름이라도 부르던지요.”
“이름?”
마지막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샤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래도 되긴 하겠다. 어차피 나는 진짜 아가씨도 아니니까.”
“그럼 제가 아가씨를 심, 심……, 으아앗! 역시 못하겠어요!”
“왜?”
“제가 어떻게 고귀한 분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요.”
손으로 두 볼을 감싸 쥔 미샤가 수줍게 웃었다.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아가씨가 된다 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저도 예의를 알거든요.”
“당신이 예의를 알 줄은 몰랐군요.”
“멸치같이 생긴 게 뭐라는 거야?”
“제가 멸치면, 그쪽은 쥐콩이죠.”
저 둘은 하루에 최소한 다섯 번은 싸우는 것 같네.
나는 이제 포기한 심정으로 마저 감자꽃을 살폈다.
지금은 작은 모습이라 해도 언젠간 감자가 무럭무럭 자라서 모나차르트를 가득 채워주는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뭐랄까, 감개무량하네.’
옆에서 들리는 다툼에 귀는 따갑지만 여느 때보다 마음은 뿌듯했다.
흐뭇하게 웃으며 감자를 구경하고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군요.”
“오셨어요?”
“왜 거기 그러고 계시는 겁니까?”
쪼그려 앉아 있는 나보다 시끄럽게 싸우는 미샤와 시비스에게 먼저 시선이 갈 법도 한데, 블러쉬는 당연하다는 듯 날 향해 다가왔다.
“꽃이 피어서요. 구경하고 있었어요.”
“꽃이요?”
“감자꽃이에요. 혹시 실제로 본 적 있으세요?”
“아뇨. 실물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저랑 똑같네요. 저도 이번에 처음 보거든요.”
내가 서둘러 손을 팔랑거리자, 블러쉬도 슬쩍 몸을 낮췄다.
“신기하지 않아요? 이렇게 싹이 자란다는 게.”
“그렇군요.”
“운이 좋으면 올해에는 감자를 심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잘 됐군요.”
“맞아요. 무척 잘 됐죠.”
나는 두 손뼉을 마주치며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나와 마찬가지로 감자를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블러쉬는 날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웃으시는 게 보기 좋아서요.”
“…….”
“심포니아는 이런 걸 좋아하-”
“맙소사! 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 우리 아가씨 이름을 함부로 부른 거예요?”
싸우는 와중에도 언제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잽싸게 달려온 미샤가 내 등 뒤에 찰싹 붙었다.
“저희는 부부 사이니까요. 이름 정도야 얼마든지 부를 수 있죠.”
“그래도 부르지 말아요!”
“왜죠?”
“저도 못 부르는 걸 그쪽이 부르면, 저보다 그쪽이 아가씨랑 더 친한 것 같잖아요! 저는 그런 거 싫어요!”
미샤는 버럭 소리치면서도 날 잡은 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나와의 친분을 블러쉬에게 과시하기라도 하려는 몸짓이었다.
“실제로도 더 친할 수도 있죠.”
“장난하지 마세요. 미샤는 진짜라고 믿는단 말이에요.”
“괜찮습니다. 장난하는 게 아니거든요.”
“네?”
잘생긴 얼굴에 곁들여진 사내의 미소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지만, 미샤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질투를 자극하는 촉매제일 뿐이었다.
“아가씨, 들으셨죠? 거봐요! 제 예상이 맞았어요! 저 사람 속이 엄청 시커메요! 어울리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요!”
“미샤, 진정하고, 으앗!”
미샤의 거친 움직임에 잡힌 몸이 흔들리면서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나는 가까워지는 감자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겨우 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도로 눈을 떴을 때는 블러쉬가 날 지탱해주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너무 흥분해서 실수했어요!”
나보다 더 놀랐는지 미샤의 얼굴을 창백하게 질려 있다 못해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치만…….”
미샤는 훌쩍거리며 날 바라봤다.
나는 다른 말 대신,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아 주었다.
미샤가 쉽게 흥분하고 예민하게 구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일 뿐, 그녀는 누구보다 마음이 여렸다.
“화내셔도 됩니다. 다칠 뻔하지 않으셨습니까.”
“실제로 다치진 않았잖아요. 미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요.”
“……알겠습니다.”
블러쉬의 손이 멀어졌다.
나는 묘한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품 안의 미샤를 다독거리는 데 집중하려고 애썼다.
미샤는 잘 우는 편이 아니었지만 한 번 울면 울음을 그치는 데에 한참 시간이 걸렸다.
* * *
“크응, 흡, 흑.”
“이제 좀 괜찮아?”
“네. 죄송해요. 못난 모습을 보여서요.”
“그게 뭐 못난 모습이야. 괜찮아.”
눈은 퉁퉁 붓고 코끝은 발갛게 물들었으며 목소리는 쉬었다.
나는 누가 봐도 울고 난 후의 미샤를 보며 따뜻한 물을 건넸다.
미샤는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잔을 받았다.
“제가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 나는 이렇게 멀쩡하잖아.”
“하지만 다칠 뻔하셨잖아요! 제겐 그게 가장 중요하단 말이에요!”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힘든지 미샤는 말을 다 하고 켁켁거렸고 나는 서둘러 미샤의 등을 다독거려줬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어느샌가 그녀의 눈가에는 다시금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이가 다치는 거 정말 싫어요.”
“물론 알지.”
“그게 아가씨라면 더욱 싫고요.”
미샤는 물을 마시는 것 대신, 그저 멍하니 잔을 바라봤다.
물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울적해 보일 뿐이었다.
“만약 내가 다쳤어도 죽진 않았을 거야.”
“혹시 모르잖아요. 인간은 너무 약하니까, 최악의 경우가 올 수도 있고요.”
미샤의 동공이 불안하게 떨렸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오래된 기억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때와는 달라.”
“뭐가 다른데요?”
“봤잖아. 날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
“…….”
“나는 리치와는 달라. 알잖아.”
나는 탐스러운 갈색 머리를 가졌던 엘프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플렌이 암시장에서 개별적으로 상단을 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자, 미샤의 성장이 멈추게 된 이유.
지금이야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한때 제국에는 노예가 비밀리에 성행되는 일이 잦았고, 그중에서도 아름답고도 희귀한 종족인 엘프는 최상품으로 손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