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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48화 (48/204)

| 48화

48화. 고귀한 혈통

“말도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맞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여자에게 관심 없으신 척하시더니, 결국 이런 미인을 데리고 오시는 게 말이 됩니까? 저는 절대 인정 못 합니다! 절대!”

“네까짓 것들이 인정하지 못하면 어쩔 건데.”

“저도 결혼시켜 주십쇼!”

“저도요! 저도 그렇게 아름다운 아내를 맞고 싶단 말입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입 좀 다물어. 시끄럽잖나.”

이제 인내심이 다 닳은 모양인지 블러쉬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군중의 외침은 시끄러워질 뿐이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딨습니까! 누군 뼈 빠지게 일하며 늙어가고 있는데, 누구는 어여쁜 아내를 데리고 살고!”

“저는 이 결혼 절대 인정 못 합니다! 저도 장가-”

“더 들을 것도 없으니 그만 돌아가시죠. 어차피 머리가 텅 빈 작자들이라서 뭘 이야기해도 제대로 주워듣지 못할 겁니다.”

“아뇨.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이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요?”

나는 싱긋 웃은 다음 앞으로 나섰다.

내 사소한 행동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들의 시선에 어쩐지 부끄러워졌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미안해, 다들.”

“아이고야, 왜 저희들에게 사과를 하십니까.”

“미인은 원래 잘못한 게 없는 겁니다.”

“암요. 비 전하 같은 미인은 존재 자체가 세상에 크나큰 보탬이신걸요.”

짧은 사과 말에 붙기에는 쏟아지는 목소리들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나는 심호흡을 빠르게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과하는 게 맞아. 이번 사고는 내가 좀 더 신경 썼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이번 사고를 비 전하께서 일으키신 겁니까?”

“그렇지는 않지만, 원인 제공은 어느 정도는-”

“에이, 그러면 됐습니다. 비 전하께서 일부러 사고를 벌이신 것도 아닌데 탓해봤자 뭐합니까. 그렇게 따지면 전하께서도 잘못하신 거죠.”

“어?”

“남몰래 이런 미인을 아내로 들이고 입을 싹 닫고 있었다니. 저희 복장이 터지면 다 전하 탓일 겁니다.”

그건 이번 사고와는 결이 좀 다르지 않나.

콧잔등을 찌푸려봐도 사람들의 얼굴에선 날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원래 저런 녀석들이거든요. 생각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죠.”

“쥐꼬리만큼이라뇨. 적어도 저는 그 이상은 있습니다. 쥐꼬리만큼인 건 여기 있는 시몬 녀석이죠.”

“왜 가만히 있는 날 물고 늘어져? 이거 아주 몹쓸 녀석이구만? 너, 네가 작년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아악! 미안! 미안하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해!”

덩치는 산만 한 사내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양새가 꼭 아이 같다.

나는 그들을 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모나차르트,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좋았다.

* * *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펠리오는 적막을 깨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그의 시선 끝에는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기댄 채, 와인 잔을 홀짝이고 있는 그의 주인이 있었다.

오베른 블랑 티어드롭. 요정의 피를 이어받았다 여겨지는 고귀한 혈통.

사람들은 황실과 4대 가문이 가장 빼어나다 말하지만, 펠리오는 가장 빼어나다는 칭호는 응당 티어드롭 가문에 어울리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왔나.”

“네, 각하.”

펠리오는 서둘러 예를 갖추며 몸을 낮췄다.

끝내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주인이 야속할 법도 하지만 원망스럽진 않았다.

동화 속 나오는 요정왕의 거처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저택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는 주인에게 평생 충성을 맹세했다.

주인이 하는 모든 일은 당연한 일이었고 마땅히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멋대로 감정을 붙이는 건 죄악일 뿐이었다.

“그 아이는?”

오베른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눈부신 은발을 이마 위로 단정히 넘긴 중년의 사내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괜히 요정의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가 있는 게 아니었다.

펠리오는 여전히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아직도 찾지 못한 건가?”

“최선을 다해 찾고는 있으나, 아직까지는 그렇다 할 만한 성과는 없습니다.”

“그런가.”

사내가 느릿한 한숨을 뱉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드리운 수심에 펠리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그렇게 찾았는데도 아직까지 찾지 못한 거라면, 그 아이가 작정하고 숨은 것일 테니 말이야.”

그 아이.

펠리오는 익숙한 얼굴을 떠올렸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급히 지워냈다.

한때 티어드롭 공작 영애라 불렸던 여자는 이제 저택 내에서 쉬쉬하는 존재가 되었다.

“영특한 아이지. 그만큼 항상 내 기대 이상을 해왔던 아이고,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어.”

“…….”

“그래서 자꾸 생각나는 거겠지.”

기울인 잔 안에서 붉은 와인이 찰랑거렸다.

오베른은 와인을 홀짝거리며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달빛이 녹아내린 것만 같은 은발과 녹음을 품은 듯한 녹색 눈동자는 티어드롭의 상징이었다.

색 자체가 귀한 건 아니나, 이토록 순도 높은 은색 머리카락과 짙은 녹색 눈동자를 가진 이는 드물었으니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서 자신과 같은 색을 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샤리에트.’

오베른은 더는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는 더는 샤리에트라고 불릴 수 없었다.

사라진 딸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들였던 아이는 이름의 주인이 나타나면서 이곳을 떠나버렸고, 자신은 그런 그녀를 잡지 않았으니까.

그것으로 모든 인연은 끝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일순간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샤리에트에게 자리를 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비참한 몰골로 나타난 딸을 위해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런 것이었으니까.

망설이기에는 작은 소리 하나에도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떠는 딸의 모습이 안타까웠고, 또 가여웠다.

한시라도 빨리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샤리에트는 어떻지?”

“아가씨께서는 잘하고 계십니다.”

“잘하고 있다고?”

오베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아직 익숙하지 않으신 거겠죠. 저택에 들어오신 지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펠리오는 애써 좋은 말을 끌어오며 샤리에트를 옹호했다.

지금이야 헤매고 있다 해도 그녀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다.

언젠간 제대로 된 두각을 드러낼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오베른은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비교하지 않으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비슷한 얼굴과 나이, 그리고 한때 같은 이름을 가졌던 두 딸은 비교하기에 좋은 대상이었다.

샤리에트가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 아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말라타는 이미 팔렸다고 했지?”

“네. 그분이 저택을 떠나신 후, 얼마 되지 않고서 다른 이의 명의로 넘어간 걸 확인했습니다.”

“말라타를 산 이의 행방은 찾아봤나?”

“확인해봤는데, 아가씨의 모습은 기억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파악하긴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말라타는 가치 있는 땅이 아니니까요. 말라타를 산 이도 제대로 된 업자가 아니었더군요.”

“돈이 급했던 걸까.”

오베른의 목소리가 부쩍 낮아졌다.

펠리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확률이 큽니다. 그분께서 떠나실 때 챙겨 가신 건, 말라타 토지 소유권과 여벌의 옷 몇 가지 정도가 전부였으니까요.”

“이럴 거면 싫다 해도 더 챙겨줄 것을.”

오베른은 쓴웃음을 지으며 남은 와인을 삼켰다.

항상 최고의 것만 입히고 먹이며 키워냈던 아이가 돈이 부족해 이곳저곳에 허리를 굽히고 다녔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아이에게 최고급 실크 드레스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 알고 있었다.

“포기하지 말고 일단 계속해서 찾아보도록 해.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고, 사람 역시 마찬가지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샤리에트는…….”

오베른은 잠시 한숨을 뱉은 후, 잔을 내려놨다.

제 기준에는 차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해도 어쨌거나 샤리에트야말로 진짜 티어드롭이었다.

차기 가주는 누가 뭐래도 샤리에트의 몫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고귀한 혈통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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