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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45화 (45/204)

| 45화

45화. 눈치 빠른

“모나차르트 대공이 티어드롭과 관련된 사람도 아니고, 저희 역시 그에게 손해 입힐 만한 짓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맞아. 그렇긴 하지.”

플렌의 말이 맞았다.

티어드롭과 관련된 문제는 내 개인사로 블러쉬와 굳이 공유할 필요가 없었다.

그걸 알기에 나 역시, 지금껏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내심 마음에 걸렸다.

“정 신경 쓰이시면 이제라도 말씀하시던지요. 모나차르트 대공의 도움을 받으면 티어드롭을 상대하는 일도 수월해질 테니 나쁠 것 없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그보다는 기대하는 겁니다.”

“기대?”

“여러 계기들이 있었겠지만, 결국 아가씨를 가장 많이 바꾼 건 모나차르트 대공이니까요. 그런 사람이라면 한 번 더 믿어봐도 좋겠죠.”

플렌의 손에서 또 한 뭉치의 서류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를 따라 정리한 서류를 내려놓고는 플렌과 눈을 마주쳤다.

“미샤의 말 생각 안 나?”

“어쩔 수 없죠. 엘프, 특히 미샤같이 순수 혈통은 살생을 싫어하니까요. 피 냄새에 예민할 수밖에 없겠죠.”

“너도 엘프잖아.”

“아무래도 저는 반쪽이니까요. 미샤처럼 살생의 냄새 같은 건 맡지 못하죠. 그래도 제게는 눈이 있죠.”

“눈?”

“저는 오래 살았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꼈으니까요. 사람 보는 눈은 나름 있죠.”

플렌이 가볍게 검지로 자신의 눈 밑을 톡톡 건드렸다.

그가 블러쉬를 좋게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해준 건 처음이라 조금 놀라웠다.

“네 대단한 눈으로 봤을 때도 그 사람이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었어?”

“괜찮은 사람은 아가씨죠.”

“…….”

“제가 모나차르트 대공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요. 저는 그를 믿는 게 아니라, 아가씨의 선택을 믿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선택을 해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전 한 번도 그게 바보 같다 여겨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저 최선을 다하셨다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휘어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연륜 깊은 눈동자가 나를 비췄다.

나는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엘프들이 날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매번 좋은 이야기만 들으니 멋쩍은 기분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너도 그렇고, 미샤도 그렇고 다들 날 너무 좋게만 봐줘서 탈이야.”

“그럴 만해서 그러는 겁니다.”

“뭐가 그럴 만한데?”

“잘 자라주셨으니까요.”

“왜 갑자기 딴소리야.”

핀잔을 줬지만 소용없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플렌은 종종 알 수 없는 대답을 던져놓고 웃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 * *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해?”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비합리적인 게 합리적인 것으로 바뀌진 않죠.”

“이게 어딜 봐서 비합리적인데?”

“진심으로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가만 보면 눈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군요.”

“다 죽은 생선같이 생겨 가지곤!”

“일과 상관없는 소리는 그만하시죠. 이곳은 일하는 곳이지, 당신의 감정을 풀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업무 시간에는 일을 해야죠.”

문밖에서도 들려오는 날 선 대화에 나는 잡았던 문고리를 손에서 놨다.

잘 맞는 건지, 아니면 안 맞는 건지 하루가 멀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둘이 익숙해진 만큼 저 싸움에는 끼고 싶지 않았다.

“저희, 조금 있다가 들어갈까요?”

멜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슬쩍 뒤로 물러섰다.

나는 치솟는 동지애를 느끼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플렌부터 먼저 보러 가야겠어. 마침 물어볼 게 있었거든.”

“그럼 바로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건지 멜시는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가며 부디 두 시간 내에는 모든 싸움이 끝나있길 간절히 바랐다.

“전하께서 오래간만에 연무장에 나서셨군요.”

“응? 연무장?”

“저기 보세요.”

멜시가 가리킨 방향에는 창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여기서 연무장이 보일 줄은 몰랐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창문 가로 다가섰다.

창 너머로 보이는 연무장에는 열댓 명 정도의 사람이 한 사람을 빙 둘러싼 채 검을 겨누고 있었다.

“내가 검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저건 너무 불리한 거 아니야?”

“괜찮습니다. 전하시잖아요.”

“그건 무슨 의미야?”

“전하께서 모나차르트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라는 뜻입니다.”

“가장 뛰어난?”

“보세요. 저 많은 인원이 한 번에 나가떨어지지 않습니까.”

멜시의 말대로였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우세한 건 여럿 있는 훈련생이 아닌, 혼자 있는 블러쉬 쪽이었다.

“사실 저건 대련이라기보단 조언에 가깝죠.”

“조언?”

“아무래도 대단한 실력자의 검은 보기만 해도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요. 가끔씩 저렇게 검을 보여주시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죠. 저는 이미 훈련생 때, 경험했던 겁니다.”

“흐음, 그래?”

멜시는 한결 뿌듯한 얼굴로 재잘거렸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내 신경은 온통 바글거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사내에게 닿아 있었다.

혼자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내는 내 상상보다 사람들과 잘 섞여 어울리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이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

“그야, 저희는 전하께서 어떤 분인지 알고 계시니까요. 사실 고위 귀족임에도 선뜻 용병 일을 하셨던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이가 용병 일을 했다고?”

“지금은 아니고 예전 일이긴 합니다.”

멜시가 뺨을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예전이라도 하긴 했다는 거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유리에 맺힌 물방울을 닦았다.

물기가 사라지자 밖에 있는 이들이 훨씬 더 잘 보였지만, 창문 유리에 닿은 손끝은 시렸다.

“네. 작위를 계승받기 전까지는 하셨죠.”

멜시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래서 더 기분이 묘해졌다.

블러쉬가 용병 일을 했다는 건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솔직히 놀라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

모나차르트에서 보낸 시간이 꽤나 흐르긴 했음에도 따져보면 내가 블러쉬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새삼스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였다.

사내가 이쪽을 바라봤다.

꼴깍.

나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실제로 눈이 마주친 건 아니었다.

훈련장과는 거리를 고려하면, 블러쉬가 나를 본 것보다는 우연히 고개를 든 것뿐이라 생각하는 게 맞았으니까.

우연한 상황에서 일어난 착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쪽을 향해 고개 든 사내를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그래서일까,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은 여느 때보다 분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 * *

“말씀해주신 대로 티티아나 상단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조건은?”

“다른 상단보다 좋은 조건입니다.”

플렌이 내게 계약서를 넘겼다.

깔끔하게 내용이 정돈된 계약서는 꼼꼼히 살펴봐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좋아. 수고했어.”

“이 정도는 쉽죠.”

“그나저나 티티아나 상단 측에선 누가 나왔어? 대리인을 쓰고 있어서 보지 못했으려나?”

나나, 플렌이나 정체를 드러내기 곤란한 처지라서 웬만한 일에는 대리인을 쓰고 있었다.

플렌이 대부분의 티어드롭 사람 얼굴을 알고 있다 한들, 실제로 그 능력을 쓰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었다.

“저도 궁금해서 대리인을 세워놓고 일부러 멀리서 지켜봤죠. 혹시라도 모르는 얼굴이면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는 얼굴이더군요.”

플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나왔는데?”

“한스입니다.”

“한스라면, 분명…….”

“네. 원래는 제 밑에 있었던 녀석입니다. 절 죽이긴 했어도 제 자리는 비워놓을 수 없으니, 가장 마땅한 적임자를 구해둔 거겠죠.”

“우리 편일까?”

플렌의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면 이미 그의 손길이 닿아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살짝 기대 섞인 눈으로 플렌을 바라봤다.

“아쉽게도 그 녀석은 물욕이 쉽게 흔들리는 편이라서요. 저희 측 사람으로 만든다 해도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녀석이죠.”

“그 이야기는 좀 매력적으로 들리는걸.”

“확실히 그런 성격들이 상황에 따라 써먹기 좋긴 하죠. 물론 저희가 필요해질 때까지 녀석이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후임에게 평이 너무 야박한 거 아냐?”

“후임의 능력보다는 다른 쪽을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죠. 결과가 나쁘면 항상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런 걸 티어드롭 공작 영애에게 시키진 않을 테니까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되면, 조만간 사람들을 단체로 바꿀 테니까.”

나는 웃었고, 눈치 빠른 플렌은 금세 내 뜻을 알아차리고 따라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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