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44화. 그제야 알았다
“괜찮으십니까?”
거친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나 아직까지 정신이 어질어질했지만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내가 사고를 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쌓여 있던 서류가 난장판이 될 일도, 찻잔이 깨질 일도, 무엇보다 블러쉬에게 허리가 잡힌 채 허공에 몸이 달랑 들려 있을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네, 네! 괘, 괜찮아요!”
무심코 블러쉬의 팔을 잡았다가 되레 놀라 황급히 손을 뗐다.
말끔하게 차려입는 평소와 달리 그가 지금 입고 있는 건 셔츠가 고작이었다.
얇은 천 너머로 뜨겁고 단단한 사내의 팔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조심하셔야죠.”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발이 땅에 닿았다.
나는 가슴을 누르며 빠르게 심호흡을 했다.
달리기라도 한 양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블러쉬의 물음이 들렸지만, 대답할 여력이 나지 않아 고개만 끄덕거렸다.
머리로는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으로서는 떨리는 심장을 잠재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때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대답할 새도 없이 몸이 들렸고, 또 앉혀졌다.
덕분에 나는 사람이 이렇게 쉽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잠시 쉬고 계시면 제가 대충 정리해두겠습니다.”
“네? 아뇨! 그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깨트린 잔이니 제가 처리하는 게 맞습니다.”
블러쉬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이곳에는 방금 전까지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제가 서류를 넘어트리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어요. 제가 치우는 게 맞죠.”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서류를 치우고 상자를 꺼냈어야 했는데,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간식을 꺼내려다가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내가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행동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어차피 이게 아니더라도 고생 좀 하셔야 할 겁니다. 제가 서류를 모으는 건 도와드릴 수 있으나, 순서에 맞게 정리하는 건 무리니까요.”
“…….”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돕게 해 주세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애당초 소파에 앉은 후부터 몸의 긴장이 풀렸는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졌으니까.
결국 나는 짧은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염치없지만 찻잔 치우는 것만 부탁드릴게요. 서류는 내일 치워도 상관없지만 깨진 찻잔이 바닥에 있으면 위험해서요.”
“알겠습니다.”
번거로운 일을 맡겼는데도 블러쉬는 망설임 없이 깨진 찻잔 조각을 치웠다.
큼지막한 손을 가지고 있어 섬세한 일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무척이나 꼼꼼한 손길이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이런 일까지 하게 되셔서요.”
“별것도 아닌데 너무 그렇게 움츠려있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긴 하나 그렇다고 미안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뭐라도 손을 보태고 싶어 고심하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젖은 바닥은 이걸로 닦으시면 될 것 같아요.”
“손수건 아닙니까.”
“이거 말고는 방에 닦을 만한 게 없어서요.”
내가 재차 손수건을 내밀자 블러쉬는 마지 못해 손수건을 받았다.
나는 그가 조각을 모두 치운 후 손수건으로 젖은 바닥을 닦는 것까지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모든 일이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다 됐으니 얼른 와서 앉으세요. 나머지는 제가 내일 하면 돼요.”
“이것도 어느 정도는 정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안 돼요. 이 이상 부탁드리면 제가 죄송해 죽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 그건 포기하시고 얼른 와서 앉으세요.”
나는 서둘러 여분의 찻잔에 남은 차를 부었다가 바로 후회했다.
어느덧 따뜻했던 차는 식어 있었다.
“새로 우려야겠네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차는 식으면 맛이 없잖아요.”
사고까지 쳐놓고 맛없는 차까지 대접하면 내 면이 서지 않는데.
나는 아쉬운 마음에 텅 빈 티포트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새로 물을 끓일까요?”
“네?”
“식은 차는 맛이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블러쉬의 시선이 내 찻잔을 향했다.
차를 제대로 마시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 잔에는 차가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제가 차를 우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할게요.”
“움직일 힘도 없으시다는 거 압니다.”
한 번 결심을 굳힌 사내는 망설임 없이 물을 올렸다.
그리고 기어코 차를 내려 내 앞에 밀어주는 걸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일부러 많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드세요. 따뜻한 게 들어가면 도움이 될 겁니다.”
“네, 감사해요.”
나는 민망함을 감추고자 웃으며 찻잔을 집었다.
잔에는 한 모금 정도의 차밖에 담겨 있지 않아, 한 손으로도 비교적 마시기 수월했고, 마신 후에는 곧 잔이 채워져 부족함도 없었다.
“왜 제 잔만 채워주세요?”
“저는 차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요.”
“그런데 왜 제가 한 제안을 수락하신 거예요?”
“이렇게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진 않으니까요.”
또 웃는다.
나는 치미는 열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사실 블러쉬를 안으로 들일 때부터 내가 할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결심을 다잡았다 해도 내가 겁쟁이인 건 달라지지 않아 막상 입을 떼기란 어려웠지만.
“……자꾸 그런 말씀 하시면 오해할지도 몰라요.”
결국 내가 꺼내든 건 비겁한 수였다.
아직도 나는 깊은 관계가 두렵고 조심스러웠으며, 블러쉬처럼 솔직해지기는 어려웠기에 이 정도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해하시라고 그랬던 겁니다.”
“…….”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법도 없으니까요.”
“…….”
“전에 제가 문제를 드렸죠. 기억하십니까? 당신이 도망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제가 이러는 이유가 뭔지 맞춰보라던 문제 말입니다.”
사내의 눈매가 미약하게나마 휘어졌다.
예전이라면 몰랐을 미묘한 변화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사내의 얼굴에서도 어느 정도는 표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떠신가요? 문제는 푸셨습니까?”
“사실은 조금 짐작되는 게 있긴 해요. 다만…….”
“괜찮습니다. 급할 건 없으니까요.”
“…….”
“천천히 가죠. 어차피 저희에게 시간은 많고, 저는 기다리는 데에 익숙하니까요.”
블러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제야 알았다, 사내는 이미 내 망설임을 알고 있었다는걸.
* * *
“습격이라도 받은 양 엉망이군요.”
“미안해.”
“뭐 어쩔 수 없죠. 이제 와서 쏟은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휴식을 갖는다고 생각하고 슬슬 정리해 보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영 치울 엄두가 나지 않는지 플렌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주저앉아 서류를 줍는 일에 동참했다.
단순히 치우기만 하면 좋을 텐데, 내용에 맞게 정리해둔 서류들이 전부 섞여버린 터라 일일이 확인하고 정리해야만 해서 꽤 시간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필요 없는 서류도 정리할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그래도 미샤가 없어서 다행이군요.”
“나는 없어서 더 걱정인데. 내 생각에는 분명 시비스랑 다투고 있을 것 같거든.”
혹시 몰라 멜시에게 따로 부탁을 해놓긴 했지만 상대가 썩 좋지 않았다.
시비스나 미샤 모두 보통 성격이 아니라, 멜시가 감당하기에는 무리일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 생각해야죠.”
“그렇게 말하기엔 둘 다 성인이잖아. 미샤야 사정이 있어서 아이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시비스는 아예 성인인걸.”
“겉모습이 아니라, 속을 말하는 겁니다. 솔직히 둘 다 애보다 못하잖아요. 한쪽은 지나치게 꽉 막혔고, 또 다른 한쪽은 자기 말만 옳다고 우겨대니까요.”
플렌은 단호히 말하면서도 서류 정리에 여념이 없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일을 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정리를 마쳐야 했다.
“어?”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으면서도 발견한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기에는 뭔가 걸린다는 표정이신걸요.”
“들켰어?”
“제가 아가씨를 한두 해 본 것도 아닌데요.”
플렌이 씨익 웃었다.
나는 빠르게 백기를 선언하며 그를 향해 서류를 보여줬다.
“티어드롭 공작 영애에 대한 서류군요. 이게 왜요? 무슨 문제 되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실은 어젯밤에 그가 여기 왔었거든.”
“그요?”
“내 남편.”
나는 그 말을 끝내고 다시 서류 정리를 시작했다.
복잡한 머릿속과 기계적으로 일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들키셨습니까?”
“아니. 아직은 몰라.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펼쳐져 있는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모나차르트 대공의 시력이 나쁘길 기원해야겠군요.”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드리는 겁니다.”
벌써 한 뭉치를 다 정리한 플렌이 서류를 바닥에 놓고 탁탁 쳐 모양을 만들었다.
내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아주 담백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