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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43화 (43/204)

| 43화

43화. 핑계입니다

* * *

‘잠이 안 와.’

미샤와 함께 잔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도 잠자리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늘 그렇듯 오늘도 몇 번이고 뒤척거리다가 결국 자는 걸 포기하고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옆에는 미샤가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지만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는 그녀답게, 내가 일어나 나이트가운을 걸칠 때까지 깨지 않았다.

나는 헝클어진 그녀의 이불을 꼼꼼히 덮어준 후,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조용하네.’

모나차르트의 복도는 밤에는 최소한의 불만 사용하는 터라 등불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집무실에 차가 있으니 그걸 내려 마실 참이었다.

따뜻한 차도 숙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겸사겸사 일도 좀 하고.

또각. 또각. 또각.

별생각 없이 빛에 의존해 걷고 있는데, 저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줬다.

낮이었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어둠 탓인지 괜히 긴장이 되었다.

‘설마, 귀신 같은 게 있진 않겠지.’

반대편에서도 등불이 보이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괜히 이상한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얼마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내가 멈췄음에도 발소리는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

“놀란 표정이시군요.”

“당신이 이 시간에 여기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어설프게 웃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나오신 겁니까. 추위도 많이 타시는 분이.”

블러쉬는 혀를 차며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내게 건넸다.

“괜찮아요. 그거 벗어주시면 당신이 춥잖아요.”

“이 정도로 춥단 소리를 하면 이제껏 한 훈련의 의미가 없겠죠.”

말릴 새도 없이 블러쉬가 내 어깨에 외투를 걸쳐줬다.

외투에는 그의 온기가 남아 있어 따뜻했다.

“어디 가시는 길이셨습니까?”

“그게, 집무실에요.”

“급한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잠이 안 와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면 나을 것 같아서요. 당신은요?”

“저도 잠이 안 와서요. 차라리 일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나왔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검지를 들었다.

“그럼 일 보러 가세요. 저도 이만 가볼게요.”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아뇨.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도 외투를 돌려받아야 하니까요.”

“그럼 지금이라도 돌려드리면-”

“핑계입니다.”

“네?”

서둘러 외투를 벗으려던 손이 멈췄다.

온기가 있을 리 없는데도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요.”

“하, 하긴 그렇네요.”

나는 말을 더듬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떨어져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다르게 얼굴 볼 일이 줄어드니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몇 달 함께 지냈다고 같이 지내는 게 익숙해진 모양이겠죠. 원래 든 자리는 알아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그래서 얼른 돌아와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꽤 외롭거든요.

들릴락 말락 살짝 더해진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주변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새빨갛게 물든 내 얼굴을 들켜버리고야 말았을 테니까.

“심포니아는요?”

“네?”

“제가 그립지 않았습니까?”

“그게…….”

나는 입술을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의 직설적인 표현은 항상 내 말문을 턱 막히게 했다.

“다행이군요. 떨어져 있는 동안, 절 잊지 않으셔서요.”

잊긴 무슨. 오히려 생생하게 기억나서 문제인데.

차마 전할 수 없는 속내에 억울해하는데, 블러쉬가 내 손에 들린 등불을 가져갔다.

나는 그제야 그가 등불을 따로 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등불을 잊으신 건가요?”

“밤눈은 좋은 편이라서요. 이 정도 어둠은 익숙하죠.”

“그럼 등불은 제가 들어야죠. 당신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잖아요.”

“이게 있어야 절 따라오실 거 아닙니까. 이것도 핑계입니다.”

더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블러쉬가 몸을 돌렸다.

나는 먼저 앞장선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겨우 참았던 숨 토했다.

움직일 때마다 덮고 있던 외투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따로 향수를 뿌리는 것 같진 않던데.’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외투의 옷깃을 위로 당겼다.

킁킁 냄새를 맡아봤음에도 외투에서 나는 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녹슨 쇠 냄새라고 평했던 미샤의 말이 무색하게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이 좋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 * *

“다 왔군요. 들어가시죠.”

끝없이 길게 이어진 것처럼 보이던 복도에도 결국 끝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린 블러쉬에 서둘러 외투를 벗어 그에게 내밀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그리고, 외투는 조금 있다 주시면 됩니다.”

“조금 있다요?”

“집무실에서 주무실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눈을 한 번 깜박이고서야 블러쉬가 한 말의 의도가 이해됐다.

그는 날 또 한 번 데려다줄 셈이었다.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어요.”

“압니다. 혼자서도 잘하시는 거.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왜 하고 싶으신 건데요?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내가 뭘 묻든 블러쉬가 성실히 대답해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정말로 적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외투가 너무 따뜻했다.

덮기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익숙했던 온기가 사라지고 나니 한기가 느껴졌다.

나는 손가락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에도 블러쉬는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럼 같이 차라도 마실래요?”

“차요?”

“그, 그게 다른 의도는 아니고 어차피 당신도 바쁜 게 아니라, 잠이 안 오는 거라면서요. 그러면 같이 차를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냥 차를 마시자고 하고 말을 끊었어야 했는데.

어설프게 붙인 이유가 오히려 대화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말하는 걸 포기하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차 말입니까?”

“혹시라도 별로시라면-”

“아닙니다. 좋습니다.”

돌아온 대답이 빠르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기분 탓인지, 사내의 눈매가 부드러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 * *

“자, 드세요.”

나는 갓 내린 차를 맞은편 블러쉬에게 건넸다.

블러쉬는 가볍게 고개를 움직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하고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는 그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다.

‘그저 찻잔이 조금 문제일 뿐.’

일단 블러쉬를 안으로 데려와 차를 대접한 것까진 좋았는데, 집무실에 준비된 다기는 내 취향에 맞춘 것뿐이었다.

몸집 큰 사내와 아기자기한 찻잔의 조합이 어색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웃음을 참아야 했다.

“어떠신가요?”

“맛있습니다. 차를 잘 내리시는군요.”

“차는 숙녀의 교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니까요. 늘 신경 쓰고 있죠.”

나는 싱긋 웃고는 내 몫의 찻잔을 끌어당겼다.

차를 즐겨 마시는 건 모나차르트에 온 후에도 변치 않는 습관이었다.

“그나저나 뭘 그렇게 보세요? 제 집무실에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요?”

나는 차를 홀짝이면서도 블러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그는 내가 차를 내리는 내내 집무실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길 들어오는 건 처음인 것 같아서요.”

“당신이 준비해준 방이잖아요.”

“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을 뿐 내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요.”

“하긴, 이곳은 제가 꾸몄죠. 지금은 조금 어지럽혀져 있지만요.”

높게 쌓인 서류가 주는 난잡한 느낌을 무마해보고자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깔끔하게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긴 하지만 참고할 자료가 늘면서 쌓여가는 서류 더미까지 신경 쓰는 건 어려웠다.

‘그래도 슬슬 치우긴 해야겠네. 여기서 더 서류를 쌓으면 조만간 내 집무실도 시비스의 방처럼 되겠어.’

나는 쌓인 서류에 발 디딜 틈이 없는 수석재무관의 방을 떠올리며 반성했다.

아무리 일이 좋다 해도 서류 더미에 짓눌려 죽으면 그만인 법이었다.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손님이 오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말이지.’

나는 차를 마시면서도 여전히 집무실을 구경 중인 블러쉬를 보며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뭐든 좋으니 그의 관심을 돌릴 만한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차만 마시니 입이 심심하진 않으세요? 지금 생각해 보니 멜시가 가져다준 간식이 있어서요. 조금 가져다드릴게요.”

“번거롭게 준비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먹고 싶어서 그래요. 브라운 경이 만들어 보내준 건데 굉장히 맛있었거든요. 차랑 잘 어울릴, 으앗!”

“심포니아!”

쨍그랑!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뜨며 숨을 토해냈다.

가장 먼저 흩날린 서류가 팔랑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모습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자 바닥에 흐트러진 서류들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 허리에서 낯설고도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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