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41화. 땅의 사과
“아가씨가 알려주신 대로 시제품을 미리 만들어왔는데,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치곤 병이 많은걸. 내용물도 다 달라 보이고.”
“역시, 아가씨께서는 예리하시네요. 맞아요. 여기 담긴 약들은 다 조금씩 달라요. 아가씨가 알려준 기존 배합부터 그걸 바탕으로 좀 더 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이것저것 다른 조합을 시도 해봤거든요.”
“듣기만 해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다른 이는 몰라도 제게 이 정도는 식은 수프를 떠먹는 것보단 쉽죠.”
미샤는 자랑스레 턱을 추켜올리며 상자 안에 가득 차 있는 병의 뚜껑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일단 이게 아가씨가 알려주신 기존 배합으로 만든 건데, 일부러 신선한 약재를 썼고요. 여기 있는 병에 담긴 건 말린 약재로 만든 것, 또 이 병은 농축액을 써서 만든 거예요.”
“큰 차이가 있었을까?”
“효과는 신선한 약재 쪽이 좋을 수밖에 없긴 해요. 치료제에 들어가는 재료들이 대부분 신선한 상태에서 쓰는 게 좋거든요.”
“잘됐네. 마침 이곳은 약재를 신선하게 보관하기 좋거든.”
미샤가 오기 전부터 치료제를 확보해놓기 위해 미리 창고를 마련해둔 상태였다.
신선한 약재를 써서 치료제를 만드는 건 큰 문제가 없었다.
“음, 그렇다 해도 개인적으론 농축액으로 만든 걸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어째서?”
“신선한 약재를 쓰는 건 좋은데 그러면 너무 번거로워지거든요.”
“번거롭다고?”
“마타만 하더라도 씻지 않고 흙이 묻어 있는 상태에서 써야 하는데, 그러면 약을 만들 때마다 씻는 둥의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 하거든요. 그럴 바에는 미리 손질해서 농축액으로 만든 후, 추후에 배합하는 게 나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약효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미샤의 제안이 끌리긴 했지만 바로 결정하긴 어려웠다.
농축액이면 기존 약재보다 개량하기도 쉬운데다가 배합 비율만 누구나 만들 수 있어 대량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지만 문제는 효과였다.
아무리 편리해진다 해도 치료제의 효능이 떨어진다면 쓸 수 없었다.
“약재 자체가 열을 가열해도 문제없는 녀석들이라서 상관없을 거예요. 실제로 아가씨께서 말씀해주신 병의 증상에 적용했을 때도 신선한 약재를 사용했을 때와 미미한 차이를 보이기도 했고요.”
“효능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면, 농축액으로 만들어두는 편이 낫긴 하겠지. 그렇게 되면 부피도 줄어들고, 개량도 훨씬 편해질 테니까.”
“농축액을 만들려면, 설비가 필요하지 않아?”
“그 부분은 아까 죽은 생선 눈을 한 인간에게 물어봤는데, 가능할 것 같대요.”
죽은 생선 눈을 한 인간이 누구더라?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떠오른 얼굴에 헛웃음을 뱉었다.
“혹시 시비스를 말하는 거야?”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대충 시퍼런 머리카락에 퀭한 눈을 한 멸치 같던 인간 말이긴 했죠.”
“멸치라니. 시비스 정도면, 나름 잘생긴 편 아냐?”
늘 피곤에 절어있어 상대적으로 외모가 죽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꽤나 잘생긴 편인데.
물론 다들 망할 씨씨를 외치느라고 그 부분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그게 뭐가 잘생겼……, 헙! 설마 아가씨 그 멸치 좋아하세요?”
“멸치가 아니라, 시비스라니까.”
“시비스인지, 시비인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미샤가 가방에 든 약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과연 그 안에 어떤 내용물이 들어있을지는 모르나, 나는 저 안에 든 게 위험한 약일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아가씨에게 남자라니! 안 돼요! 절대 안 돼! 저는 그렇게 덜떨어지고 못생긴! 심지어 성격까지 나쁜 멸치에게 우리 아가씨는 절대 못 줘요!”
“아니야.”
“……아니에요?”
“설마 내가 시비스랑 그러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렇죠? 하기야, 눈이 제대로 달렸다면 누가 멸치와 연애하겠어요. 아무리 남자가 궁해도 멸치는 아니죠.”
언제 날뛰었다는 듯, 미샤가 배시시 웃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녀는 안심하지 못하겠는지 틈틈이 멸치 부정론을 꺼내는 걸 잊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인간들 기준으로는 아가씨도 짝을 찾을 때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
“그러면 혹시 마음에 둔 사내라도 있으신가요?”
“약간 비슷하게?”
“에이, 마음에 둔 거면 둔 거지 비슷한 게 뭐예요.”
미샤는 잽싸게 내 옆을 차지하고 앉아 연애사를 궁금해 하는 여느 소녀처럼 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였지만, 내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그녀가 들고 있던 약병을 상자에 도로 넣는 게 아니라, 여전히 손에 꽉 쥐고 있었다는걸.
내가 말하는 사내가 웬만큼 성에 차지 않겠다 싶으면 독살이라도 할 기세였다.
그걸 알기에 나는 더욱 다음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내겐 아직까지 미샤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실은 나 이미 짝이 있거든.”
“짝이 생기셨다고요? 인간들 말로 연애? 그거라도 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게 아니면요?”
순진무구한 표정을 한 미샤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아직까지는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나는 미샤의 눈치를 살피며 살짝 입을 열었다.
“일단 내 짝에게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줘. 그럼 말할게.”
“맹세할게요.”
“숲을 걸고 해야지.”
어디 은근히 넘어가려고.
거짓 맹세를 하려는 미샤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미샤는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 숲을 걸고 맹세할게요.”
“고마워.”
“에이, 설마 제가 아가씨의 짝을 죽이기라도 하겠어요. 절 어떻게 보시고. 아가씨가 저 몰래 결혼하지 않은 이상……, 왜 표정이 그러세요?”
“음, 그게 말이지…….”
“설마 결혼이에요?”
“일반적인 결혼은 아니고,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건데…….”
말을 이을수록 구겨지는 미샤의 표정에 나는 더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지독한 정적이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 * *
“기분 탓인지 몰라도 절 상당히 싫어하는 느낌이군요.”
“그건 아니고, 미샤가 낯을 좀 가려서 그래요.”
“그렇습니까?”
블러쉬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지만 그를 쫓는 미샤의 눈은 활화산보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라,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함을 느낀 건 플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말고 내 옆으로 왔다.
“왜 저러는 겁니까?”
“말했거든. 나 결혼했다고.”
“아.”
플렌이 다 알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도대체 쟤는 언제쯤 철이 들련지.”
“일단 버릇없이 굴지 말아 달라고 주의를 주긴 했거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최대한 잘 잡고 있어 보겠습니다.”
“이런 부탁은 하고 싶지 않지만, 부탁할게.”
나는 플렌과 서둘러 의견을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블러쉬에게 미샤를 소개할 겸,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가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일단 먼저 소개해 드릴게요. 이쪽은 미샤. 약재사예요. 앞으로 일어날 역병 치료제뿐만 아니라, 모나차르트에서 키울 수 있는 작물을 연구해줄 거예요.”
“미리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말입니다. 몇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물어보세요.”
“심포니아 말고, 약재사에게 묻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내 맞은편에 앉은 블러쉬가 미샤에게 시선을 두었다.
미샤는 그런 블러쉬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벌써 다정히 이름을 부르는 사이인 거예요?”
“미샤,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야.”
“치이. 네. 알았어요. 묻는 말에 잘 대답할 테니 물어보세요. 제가 한시라도 빨리 일을 끝내야 우리 아가씨도 자유로워지실 테니까요.”
더 반항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미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블러쉬는 나와 시선을 빠르게 교환하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작물을 모나차르트의 기후에 맞게 개량해주실 거라 들었는데, 어떤 작물을 고려하고 있는지 우선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
이유는 모르겠는데, 잠깐 미샤의 매서운 기색이 가라앉았다.
나는 블러쉬와 미샤 둘 사이에서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의식하며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애썼다.
“어려운 질문입니까?”
“아뇨. 어렵지 않아요. 애당초 개량이라는 게 무작정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가능성이 큰 작물 위주로 진행할 수밖에 없죠.”
“예를 들면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가장 우선적으로 보고 있는 건 사과예요.”
“사과요?”
“정확히는 땅속에서 자라는 사과죠.”
미샤가 거만하게 턱을 추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