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화. 역전해보면
* * *
“씻고 나와. 따뜻한 물에 들어가면 얼었던 몸도 녹을 테니까.”
“아가씨도 같이 씻으면 안 되나요?”
“좋은 생각이지만, 나는 플렌이랑 이야기할 게 있어서 말이야. 대신, 미샤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씻고 나와.”
“알았어요. 그럼 저 빨리 씻고 나올 테니까, 어디 가시지 말고 꼭 여기 계셔야 해요. 아셨죠?”
미샤는 몇 번이고 가지 말란 말을 강조한 후에야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연신 괜찮다고 했지만, 추위가 익숙하지 않은 몸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으니 따뜻한 물의 유혹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녀석의 떼를 너무 받아주진 마세요.”
미샤가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플렌은 한숨을 푹 쉬었다.
원래부터 플렌은 미샤를 상대하는 걸 가장 힘들어했었다.
“뭐 어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운걸.”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다른 이도 아닌 미샤가 직접 와줄 거라곤 몰랐다.
숲의 일족 중에서도 그녀는 특별한 존재였다.
하물며 미샤의 입장에선 여기까지 직접 온 것만으로도 큰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더욱 고맙고, 또 미안했다.
“속지 마세요. 순수한 의도가 아니니까요. 저것도 다 속셈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속셈? 무슨 속셈?”
“이번만큼은 아가씨를 숲으로 모셔가겠다고 장담했거든요.”
“그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저 녀석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녀석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미샤의 바람과 달리, 나는 숲으로 갈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선택에 대한 대가는 친구를 잃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실현 가능성은 없는 일이지만, 문제는 그걸 시도하는 게 미샤라는 점이니까요.”
“걱정돼?”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 거대한 힘까지 가지고 있으니까요. 아가씨를 숲으로 데려가겠다는 명목하에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죠. 그래서 솔직히 데려오고 싶지 않았는데…….”
플렌은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일그러진 표정만으로도 미샤가 모나차르트에 오기 전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원래 내가 도움을 요청했던 건 미샤가 아니었으니까.
다른 이 대신, 미샤가 온 데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미샤가 지금 모나차르트에 가장 필요한 인물인 건 사실이니 다른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걸리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벌써 결과가 나온 거야?”
“아직 티어드롭에 대한 조사는 끝나지 않았지만, 최근 소식 하나는 들었죠.”
“소식?”
“티티아나 상단이 벌인 관광 사업이 수도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떤 사업인데?”
이야기를 듣는 것뿐인데 괜히 긴장된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빠르게 심호흡을 했다.
“운하에 관광용 배를 띄웠다고 합니다.”
“관광용 배?”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참신한 시도이긴 하죠. 지금까지 관광용 배란 호수에나 띄우는 것이었는데, 그걸 운하에 띄워서 수도 곳곳을 구경하는 게 만들었으니까요.”
“…….”
“왜 그러십니까? 표정이 썩 좋지 않으신데.”
플렌의 얼굴 위로 걱정 어린 표정이 드리워졌지만 내겐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내가 느꼈던 꺼림직한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 배를 운항하는 뱃사공이 잘생긴 데다가 노래도 잘 부르지 않아?”
“네, 맞습니다.”
“배에는 푹신한 쿠션과 커튼, 그리고 다과가 준비되어 있어 마치 물 위에서 티파티를 하는 느낌으로 꾸며져 있고.”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플렌의 눈이 찡그려졌다.
나는 헛숨을 뱉으며 두 손을 꽉 모았다.
“내가 구상하고 있던 사업 중 하나였으니까.”
“네?”
“만약, 내가 아무 일 없이 티어드롭 공작 영애로 남았으면 그 사업을 했을 거야. 이게 과연 우연일까?”
나는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듯 안았다.
이것저것 떠오르는 생각들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일을 벌인 것도 하필 그 여자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한 건, 시기가 맞지 않다는 거야.”
“시기요?”
“나는 기록하는 습관이 내 아이디어를 훔치는 건 가능해. 하지만 문제는 나와 그녀가 함께 저택에서 지냈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거야.”
플렌에게 따로 알리지 않을 정도로 기초 단계의 아이디어였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었고, 내 수첩에 적어놓은 게 전부였던 걸 이제 막 저택에 들어와 적응하던 샤리에트가 아는 건 무리가 있었다.
단 하나의 전제, 조력자가 있지 않은 한.
나는 거칠게 이마 위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내 예상이 맞았다.
샤리에트에게는 조력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조력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티어드롭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녀의 다음 사업이 뭔지 유심히 살펴봐. 한 번의 우연은 있을지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더는 우연이 아니게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내 밑에 있었던 하녀들의 뒤도 한 번 알아봐 줘.”
“티어드롭 저택에 있던 하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수석 하녀인 벨벳을 포함해서 전부 쭉 캐줘.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 같거든.”
내겐 티어드롭을 위한 계획은 더는 필요하지 않았기에 저택을 나오기 전에 아이디어가 적힌 수첩을 처리하고 나왔다.
내 아이디어를 몰래 빼돌릴 수 있는 시간은 당연히 그 이전일 수밖에 없었고, 내가 저택에 머문 당시의 샤리에트는 별관을 이용했다.
완벽한 티어드롭 영애가 되지 못한 그녀가 하녀들이 있는 내 방에 몰래 들어온다는 건 사실상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력자가 있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반대로 역전해서 생각해보면, 내 방에 있는 하녀들이 눈감아 준다면 얼마든지 내 수첩에 손을 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해사하게 웃던 은발의 아가씨는 그 순간만큼 완벽하게 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 * *
“…….”
“고민이 있으신 겁니까?”
“네?”
“아무리 보아도 고민 어린 얼굴을 하고 계셔서.”
언제 온 건지, 눈앞에 선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네. 오늘은 일이 조금 일찍 끝난 터라.”
블러쉬가 걸음을 뗄 때마다 비누 향이 살랑살랑 코끝을 간지럽혔다.
“씻으셨어요?”
“땀을 흘린 채 돌아올 순 없으니까요. 훈련한 후에 씻고 온 겁니다.”
“밤에 훈련이 없다는 거 알아요. 그렇다고 낮에 씻었다고 하기엔 비누 향이 너무 진하고요. 낮에 씻었으면 벌써 향이 약해졌겠죠.”
“…….”
우리 침실에는 욕실이 딸려 있었지만 실제로 쓰는 건 나뿐이었다.
블러쉬가 방에 딸린 욕실을 쓴 건 단 한 번밖에 없었고 그는 항상 외부에서 씻고 오곤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금까지 매번 침실의 욕실을 쓰지 않는다는 건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절 배려해주시는 건 감사하나, 그렇게까지 번거롭게 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긴 부부 침실에 딸린 욕실을 쓸 권리는 부부 양측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거잖아요.”
“그게 배려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다른 게 있나요?”
“있을 수도 있죠.”
블러쉬가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빛을 등지고 있기 때문일까, 사내의 얼굴은 그늘져 보였다.
“그게 뭔데요?”
“…….”
블러쉬는 대답 대신, 날 빤히 내려볼 뿐이었다.
나는 눈에 힘을 준 채 인상을 썼다.
“아닌 척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닌 척?”
“당신이 절 많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으니까요.”
욕실을 따로 쓰는 이유가 배려 말고 뭐가 더 있을 수 있을까.
아닌 척해도 사내에게 의외로 다정한 구석이 있다는 것 정도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저는 당신이랑 욕실을 같이 써도 상관없어요. 이미 침실도 같이 쓰고 있는데, 욕실이 뭐 대술까요.”
“…….”
“어차피 제가 오기 전에는 원래 당신이 쓰던 공간이었잖아요.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까, 매일 번거롭게 다른 곳에서 씻지 말아요.”
“…….”
“어차피 당분간 전 따로 방을 쓰게 될 테-”
“방을 따로 쓴다고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블러쉬가 갑자기 내 말을 잘랐다.
자세히 보니 그의 미간은 살짝 좁아져 있었다.
“실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데, 아무래도 저희 당분간 방을 따로 써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제가 말씀드렸죠? 아는 약재사를 불렀다고.”
“네. 그래서 오늘 만나러 간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낯선 지역에서 혼자 자는 게 불안하다 해서요. 안심할 수 있게 함께 자주기로 했어요.”
“……자주기로 했다?”
꽉 다물린 사내의 입술 사이로 한숨에 가까운 숨이 흘러나왔다.
미세한 차이긴 하나, 블러쉬의 미간은 확실히 방금 전보다 더 깊어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