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34화. 사내의 입가
“강력한 군대가 있으면 좋죠.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얕보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
“하지만 철로 만들 수 있는 건 무기뿐만이 아니잖아요.”
무력으로 억지로 밟고 올라가면 예전 블러쉬가 갔던 길을 갈 뿐이었다.
그런 게 목적이라면 굳이 번거로운 일을 벌일 이유는 없었다.
“브라운 경에게 문의해보니 채굴 장비를 부수고 해체하는 것만으로도 따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더 나아가 모나차르트의 방한 기술을 입히면 이곳만의 특수한 채굴 장비를 만들 수 있다고요.”
계산해보니 실질적으로 내줄 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설픈 수익을 얻을 바에는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타올랐던 금에 대한 열풍이 꺼지면 자연스럽게 모나차르트를 향했던 관심도 줄어들기 마련이죠. 그 무관심이 저희에겐 기회가 될 거예요.”
“일부러 몰락한 척을 하겠다는 겁니까?”
“화려하게 비상만 하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건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이죠.”
“…….”
“현 제국은 꽤나 시끄럽잖아요?”
페르시펜 제국은 현재 중앙의 황실과 남부의 오르젠타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충돌하고 있고, 그에 맞게 동부의 말리그테는 황실, 서부의 펠라시온은 오르젠타의 편을 들면서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누구도 모나차르트에 선택을 하라 강요하는 이가 없었다.
모나차르트가 어느 편을 들든 간에 딱히 메리트가 없기도 했고, 같은 협상 테이블에 앉기보다는 짐승에게 먹이를 주듯 필요에 따라 이용해 먹는 게 더 나았으니까.
“솔직히 모나차르트의 발전을 좋아하는 이들이 누가 있겠어요. 그들의 기준으로 모나차르트가 봐줄 수 없는 만큼 성장하게 되면 견제하고 짓밟으려고 하는 자들이 수두룩할 거예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저희 쪽에서 조절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 틈에 다음을 위해 정비할 시간도 갖고요.”
현재로선 모나차르트는 황실은커녕, 오르젠타 하나 이길 수 없었다.
괜히 미운털이 박혀 견제라도 당하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상황에 따라 몸을 낮추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했다.
“어차피 많은 이들이 모나차르트를 깔보고 있고, 잠깐 떠오르는 것 같다가 다시 추락한다고 해서 모나차르트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테니 그들을 방심하기에는 딱 좋은 패잖아요.”
“…….”
“하지만 모두가 방심할 때, 저희는 움직일 거예요. 그리고 더욱 높이 비상하겠죠.”
오래 엎드린 새는 높게 나는 법이니까.
내가 웃자, 블러쉬의 눈가는 미세하게 떨렸다.
“……견제당할 것까지 미리 고려하셨던 겁니까?”
“애들 장난이 아니잖아요. 고려할 수 있는 건 다 고려하고, 쓸 수 있는 건 전부 써야죠. 그래야 보다 계획에 안전하게 도달할 거 아니에요.”
“안전이라. 그건 부인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어째서요?”
살짝 주름 잡힌 블러쉬의 미간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인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있으면, 퍼즐을 맞추고 있단 생각이 드니까요.”
“퍼즐이요?”
“완벽한 계획을 세워놓고 그에 맞게 하나씩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지만요.”
“아니라고요?”
내가 미래를 알고 있는 건 사실이나, 그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의 미래였다.
일을 벌이면 벌일수록 내가 본 미래와 실제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엿봤던 미래를 바탕으로 짠 계획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었다.
미래에서 본 블러쉬의 군대를 보며, 모나차르트에 상당수의 질 좋은 철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금을 발견할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한 것처럼 여러 변수들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우연을 기대할 이유도 없었다.
“저는 한 번도 제 계획이 완벽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뿐이죠.”
나는 눈을 빛냈다.
완벽한 계획은 있을 수 없다 해도 비슷하게 만들 순 있었다.
상황이 달라진다면, 계획도 그에 맞게 바꾸면 그만이니까.
“당신은…….”
블러쉬는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이마를 짚었다.
“혹시, 제가 가진 게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서 실망하셨나요?”
“……제가 실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 하기엔 표정이 썩 좋지 않으셔서요.”
“그보단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인정? 뭘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블러쉬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다시 물어볼 참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덧, 날 바라보는 사내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펜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그대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언제나 그렇듯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오늘은 평소와는 달랐다.
머릿속을 뱅뱅 맴도는 얼굴 하나에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나는 책상에 이마를 콩콩 박다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얼굴에 결국 힘없이 축 늘어졌다.
‘이건 좀 곤란한데.’
거품처럼 금세 꺼져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감정이었는데 자꾸만 며칠 전 본 미소가 떠올랐다.
블러쉬가 웃는 걸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눈매를 휘면서 웃었던 건 저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솔직히 웃는 건 반칙이지. 그 얼굴에서 더 잘생겨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 그 전에 내가 이렇게 외모에 흔들리는 사람이었…….’
나는 더는 생각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실은 알고 있었다, 단지 외모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니라는걸.
결국 외모는 하나의 이유일 뿐이었다.
“안 돼. 이건 정말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어?”
나는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귀에 익은 음성만큼이나 익숙한 얼굴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아까 왔습니다.”
“아까? 노크는?”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못 들으셨을 뿐이죠.”
“아……”
플렌의 말에 시계를 확인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힘없이 상체를 들어 올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제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플렌이 빤히 날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지만, 그의 두 눈은 오래된 고목을 닮아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게 있어서 가장 믿을 만한 상대였다.
‘그래도 이걸 말하기에는…….’
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고민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반, 감추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하지만 막상 말할 생각을 하니 끝끝내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말씀하시기 곤란한 내용입니까?”
끄덕.
나는 대답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으로선 아직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혹시라도 이야기하실 마음이 드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저는 항상 아가씨의 곁에 있을 테니까요.”
“고마워. 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 줄 몰라.”
“저는 그러려고 남아 있는 거니까요.”
“……혹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긴 하나, 플렌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가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나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돌아가겠지만 지금은 딱히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머물 곳은 아가씨가 계신 곳이니까요.”
플렌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살아온 세월이 다르기 때문일까, 그는 가끔씩 낯선 눈으로 날 바라볼 때가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별거 아니야.”
“싱거우시긴.”
플렌이 웃었다.
나는 그를 따라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무슨 일이야? 오늘은 시찰 간다고 하지 않았나?”
내 기억이 맞는다면, 오늘 플렌은 외부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었다.
“전에 말했던 걸 찾아서 말입니다. 나가기 전에 알려드리고 가려고 왔습니다.”
“전에 말했던 거?”
“티어드롭 공작 영애에 대한 뒷조사 말입니다.”
“……어떻게 되었어?”
나도 모르게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플렌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살짝 낮췄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티어드롭 공작 쪽에서 손을 쓴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티어드롭 공작 영애와 아가씨의 인생을 깔끔하게 붙이기 위해선 정리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그럼 그게 다야?”
되물으면서도 딱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방식대로라면, 꼬투리가 잡힐 만한 요소는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냥 넘기기에는 플렌의 대답에는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