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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32화 (32/204)

| 32화

32화. 익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쁘겠지만, 시간이 흘러 일정 수량을 채워두면 문제는 없을 거야. 계속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일정 수량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니, 결국엔 추후 낡은 옷을 교체하거나 수선해주는 정도로 그칠 테니 말이야.”

“…….”

“왜 그런 눈이야? 더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궁금해서요.”

“어떤 점이?”

“왜 하필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늘상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던 노부인처럼 보여도 주름진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은 변함없이 날카로운 전사의 것이었다.

그 점이 좋았다.

“부인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했거든.”

“제가요?”

“부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거 아니까.”

나는 대답 대신, 담요로 가려진 도로시의 다리를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는 보는 것조차 금기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는데, 이제는 다리를 빤히 바라봐도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애당초 내가 그녀의 상처를 보며 멋대로 감정을 품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실은 이번 일은 원래 내 계획에는 없었어. 그럼에도 짬을 내서 구상하고 몇 번이고 확인했지.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기분이 이상해서였어.”

“기분이요?”

“자료를 찾다가 뜻하지 않은 숫자를 발견했거든.”

처음에는 괜찮은 사업 하나 늘려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자료 조사 중 기록을 발견하면서 입장은 달라졌다.

“전쟁에 참여했던 모나차르트 사람들의 사상자 수였어.”

“…….”

“그리고 그걸 보고 있자니, 새삼스레 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지. 전에 부인이 그랬잖아. 이곳이 바뀌길 바란다고. 아이들은 부인 세대처럼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게 있다고.”

“…….”

“나도 마찬가지야.”

이젠 나도 모나차르트 사람이니까.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은 채 심호흡을 크게 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여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모나차르트 사람들은 스스로가 쉽게 쓰이고 버려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전쟁에 참여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비극을 맞이하지. 그래서 생각하게 된 거야. 선택지를 늘려야겠다고.”

“선택지를 늘린다고요?”

“모나차르트의 비극은 결국 뻔한 선택지 때문에 벌어지는 거잖아. 그럼 반대로 용병이나, 병사 대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면 문제도 해결되겠지.”

앞으로는 재봉사가 되고 싶었음에도 기사가 되어야 했던 아이가 나오지 않게끔 말이야.

도로시를 보고 말했는데 정작 소리는 내 등 뒤에서 들렸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멜시가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 * *

“브라운 부인에게 일을 맡기신 건 잘하신 겁니다. 브라운 부인처럼 명망 있는 전사라면, 다들 군말하지 않고 따를 테고 비 전하께 대한 반감도 적을 테니까요.”

“브라운 부인이 그렇게 유명한가?”

“유명하신 분이시죠.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대단한 전사를 언급할 때, 꼭 빠지지 않던 분이시기도 하고요.”

의외로 이런 쪽에 흥미가 있었나.

창백한 얼굴에 띈 옅은 홍조가 의외다 싶어 빤히 바라봤더니, 부쩍 시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는 그의 표정이 더 구겨지기 전에 눈치껏 입을 열었다.

“그럼 날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때? 많으려나?”

장난스럽게 물어보긴 했지만 실은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비교적 문제없이 지냈다고 해서 모두가 날 좋게 보고 있을 리 없었으니까.

내가 헛돈을 쓰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수도에서 온 수상쩍은 존재가 좋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눈치는 아니나, 어쨌든 전하께서 고른 분이시니까요. 사고만 치지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그 말은 사고를 치면 끝이라고 들리는데.”

“이제 와서 겁나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시비스 역시 딱히 대답을 기대했던 눈치가 아니었는지 쉽게 고개를 돌렸다.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는 수석 재무관은 항상 이야기가 끝났다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얼른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곤 했다.

“할 말 없으시면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그만 가시죠.”

“너무 쌀쌀맞게 말하지만 말고 이왕 온 김에 이것도 봐줘. 실은 오늘 보러 온 목적은 이게 더 크거든.”

말은 쌀쌀맞게 해도 해달라는 건 다 해준단 말이지.

나는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내가 내민 계획서를 검토하는 시비스를 보며 슬쩍 웃었다.

짧은 조언만 해주겠다고만 말했던 것과 달리, 그는 막상 일을 맡기면 거부하는 법이 없었다.

“계획도시군요.”

“이런. 눈치가 빠르네.”

“가져온 제안들의 결이 다 비슷하게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시비스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언제나 그렇듯 눈 밑이 시퍼렇게 물든 사내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구 도시는 무역의 중심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번성하기 마련이잖아.”

“여긴 바닷가가 아닙니다.”

“뭐 어때. 바다나 배만 없을 뿐이지, 물건을 사고파는 건 비슷하잖아.”

넉살 좋게 웃었는데 오히려 시비스의 표정은 구겨졌다.

하지만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다.

자주 얼굴을 봐버릇해서 그런지 솜털 하나조차 곤두서있을 것 같은 신경질적인 사내를 상대하는 일도 어느샌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람이 모이게 하면 돈이 되잖아. 옷이나, 썰매를 대여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항구 도시처럼 번화가를 한번 만들어 보면 좋잖아.”

“…….”

“솔직히 여관이나, 음식점 같은 걸 마련해두면 좋잖아. 아니면, 사람들에게 상가를 임대해주는 것도 괜찮고. 혹시 모르잖아, 전설의 상인이 모나차르트에서도 나올지도.”

아무렇지 않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시비스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사소한 반응이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한대로라면 내 제안이 그에게 괜찮게 들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목표는 나쁘진 않지만 아직은 꿈같은 이야기죠. 현재 모나차르트의 수입은 고만고만한 데다가 그마저도 재투자에 쓰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슬슬 상인들이 모나차르트 안으로 들어오게끔 할까 해.”

“그게 되겠습니까? 제가 상인들이라면 지금의 거래 형태를 더 원할 것 같은데요. 솔직히 그편이 편하지 않습니까.”

“미끼를 뿌리면 가능하겠지. 그것도 아주 맛있는 미끼.”

한정된 거래는 통제하기 쉬우나, 그렇게 돈이 되진 않았다.

언제까지 거래를 조절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게 모나차르트에 있습니까?”

“그럼.”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게 뭡니까?”

“비밀.”

“…….”

잔뜩 얼굴을 구기는 시비스를 보면서도 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가만 보면 반응이 재깍재깍 나타나서 은근히 약 올리는 맛이 있었다.

“농담이고, 그이가 오면 말해줄게.”

“그이요?”

“뭘 그렇게 놀라. 내가 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잖아.”

“…….”

왜 표정이 평소보다 더 뚱해진 것 같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지.”

검은 머리의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남편, 블러쉬였다.

“왔어요?”

“일찍 오셨군요.”

날 발견한 블러쉬가 짧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오늘도 그렇듯, 그의 얼굴에는 딱히 표정이라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조금 조언을 구할 게 있어서요. 일부러 일찍 왔죠.”

블러쉬의 시선이 흘끔 테이블 위 시계를 향했다.

아직 약속 시간보다 10분이 남아 있었다.

“그럼 언제 오신 겁니까?”

“으음, 대략 두 시간 전이네요.”

나는 손가락 두 개를 접은 채 감탄했다.

나나, 시비스나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둘 다 따지고 재는 성격이라 그런지, 다른 걸 떠나서 확실히 시비스와 의견을 나누면 시간이 빨리 갔다.

“단둘이서만 말입니까? 멜시는요?”

“잠시 심부름 갔어요. 요즘 저와 브라운 부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무척 바쁘거든요.”

아무리 열심히 계획을 꼼꼼하게 적어놓아도 완벽하게 뜻대로 이루어지는 계획은 없었다.

한낱 종이였던 계획서를 실물로 옮기기 위해서는 의도치 않게 수정할 곳이 생겼고, 도로시와 연락할 일도 부쩍 많이 생겨 덩달아 멜시가 일이 많아졌다.

“그자는요?”

“플렌은 따로 볼일이 있어서 나갔죠. 그 역시 무척 바쁜 사람이거든요.”

모나차르트의 변화를 외부에 알리는 데는 플렌의 공훈이 컸다.

그는 티티아나 상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는 암시장에서 활동하는 상단을 개별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원래 상단을 운영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은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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