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28화. 작은 선물
“굳이 비위를 맞춰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저렇게 좋아하시잖아요. 연장자께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스러우나, 귀여우시기도 하고요.”
“귀엽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블러쉬가 이례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이리저리 대장간을 누비는 마튼의 뒷모습을 보는 블러쉬의 시선에는 불쾌감이 역력하게 담겨있었다.
“아, 그렇지! 잠시만요! 제가 비 전하를 위해 준비한 물건이 있었는데,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습니다.”
“내게?”
“대단한 건 아니고, 이 늙은이가 만든 겁니다. 멜시 앞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마침 오셨으니 지금 드려야지요.”
마튼은 두툼한 손으로 성급히 테이블에 있던 가죽 뭉치를 집어 들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가 손에 느껴지는 묵직함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튼이 건넨 건 평범한 가죽 뭉치가 아니라, 어떤 물건을 가죽으로 감싸둔 것이었다.
“지금 열어봐도 돼?”
“물론입니다.”
마튼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덥수룩하게 난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죽을 벗겨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게 뭐야?”
“검입니다.”
“검치곤 너무 작은데.”
나는 손끝으로 마튼의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검은 무기라기보다는 악세사리의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몸에 숨겨 다니는 호신용이라서 그렇습니다.”
“호신용?”
“모나차르트 사람들은 다들 품에 호신용 무기 하나쯤은 들고 다니거든요. 비 전하께서도 이제 모나차르트 사람이시니 하나쯤은 가지고 계셔야지요.”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말문이 턱 막혔다.
“크기는 작아도 날은 잘 갈아놨으니, 꽤 쓸 만할 겁니다.”
“…….”
“혹여나 마음에 안 드시면-”
“아냐! 그럴 리 없잖아. 마음에 들어. 그것도 무척.”
나는 다급히 말하며 단검을 두 손으로 꼭 쥐었고,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튼은 더 큰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선물 고마워. 잘 간직할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뭘. 앞으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 전하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드릴 테니 말입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
“저야, 늘 든든한 사람이지요. 이 근육 좀 보십쇼. 이게 대충 노력한다고 나오는 근육이 아니라, 제 노하우와 실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또, 자랑이군.”
마튼의 말이 길어지자, 블러쉬가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거기에 굴할 마튼이 아니었다.
“자랑도 그걸 받쳐주는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대단한 사람 중 스스로가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두 사내의 시선이 빠르게 오고 간다.
블러쉬는 마튼을 노려보다가 이내 이마를 짚으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번거롭게 더 들어줄 것도 없습니다. 슬슬 다른 곳으로 가죠.”
“벌써요?”
“가기 싫으십니까?”
“이왕 온 김에 조금 더 구경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언제 또 마을에 오게 될지 모르잖아.
웬만하면 고집을 피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대로 떠나기에는 아직 구경하고 싶은 게 많았다.
“혹시 바쁜 일이 있으신 거라면, 저 혼자 구경할게요.”
“혼자요?”
“네. 시간을 맞춰서 나중에 만나도 되고, 아니면-”
“성까지는 제가 모셔다드리죠. 이래 봬도 제가 왕년에 썰매 좀 끌어봤거든요.”
불쑥 대화에 끼어든 마튼이 눈을 빛냈다.
그는 아직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남은 눈치였다.
“그렇게 되면 번거로울 텐데, 괜찮을까?”
“식사 후에 운동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지요. 아, 그렇지. 말 나온 김에 아예 저희 집에서 식사까지 하고 가시죠.”
“식사?”
“비 전하께서 너무 마르셔서 뭐든 든든하게 먹여야 제 마음이 편해질 것 같거든요. 이왕 오신 김에 이 김에 식사까지 하고 가십쇼.”
먹이를 놓치지 않는 피라냐처럼 마튼이 잽싸게 말을 던졌다.
나는 그의 수를 뻔히 알면서도 머뭇거렸다.
모나차르트의 문화를 맛보고 싶은 터라, 마튼의 제안이 유혹적으로 들린 탓이었다.
“그러면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은데…….”
“뭐, 어떻습니까. 저희 사이에. 열심히 구경하다가 같이 식사하면서 못 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죠. 이건 자랑인데, 저희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멧돼지 요리가 그렇게 맛있거든요. 분명 비 전하의 마음에도 쏙 들 겁니다.”
혹시나 내가 거절할까, 서둘러 말을 덧붙이는 마튼에 나는 흘끔 블러쉬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블러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베푼 호의니, 감사히 받지.”
“전하께서는 먼저 돌아가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다행히 오늘은 일정을 정리하고 와서 말이지. 브라운 가문의 멧돼지 요리가 오래간만에 먹고 싶어지기도 했고.”
“전하께서 제 요리를 찾다니, 분명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겁니다.”
“헛소리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생겼던지요.”
마튼이 은근히 내 쪽을 바라봤고 나는 멋쩍게 웃었다.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알 것 같았다.
* * *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아주 멋진 요리를 선보일 테니 말입니다.”
마튼은 그 말을 남기고 부엌으로 홀연히 사라졌고, 거실에는 나와 블러쉬, 그리고 마튼의 부인인 도로시만이 남았다.
나는 눈치껏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이다가 조심스럽게 도로시의 맞은편에 앉았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옷을 만들고 있지요.”
“옷이라고?”
“비 전하께서는 처음 보시나요?”
도로시가 만들고 있던 옷을 슬쩍 들어 보였다.
“이렇게 만드는 걸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야.”
“하긴, 귀족들은 직접 집에서 옷을 해 입진 않으니까요. 처음 보실 법도 하네요.”
“괜찮으면 구경해봐도 될까?”
“별 재미는 없으실 텐데요.”
“그러기에는 나는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걸.”
나는 눈을 빛내며 도로시의 옷에 집중했다.
짐승의 모피를 바느질로 꼼꼼히 엮어서 만드는 옷은 투박하기는 하나 그만큼 따뜻해 보였다.
“옷을 직접 만들다니, 손재주가 좋네.”
“대단한 일도 아닌걸요. 이 정도는 길거리 아이도 해낼 거예요.”
“이런 걸 아이가 한다고?”
“저기 걸려있는 조끼, 보세요? 저건 멜시가 열세 살일 때 만든 거예요.”
“멜시가?”
벽에 걸린 조끼는 도로시가 만든 옷에 비하면 훨씬 더 거칠고 낡은 모양새였지만, 열세 살 아이가 만들었다고 보기엔 훌륭한 솜씨였다.
“모나차르트 사람들은 대부분 손재주가 좋거든요. 그래서 다들 집에서 직접 옷을 만들어 입죠.”
“옷 만드는 게 어렵진 않아?”
“기껏해야 가족들이 입을 옷을 만드는 것뿐이니까요. 남는 시간에 천천히 하면 금방 한답니다. 특히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해 시간이 더 많은 편이기도 하고요.”
도로시의 시선이 짧게나마 아래를 스쳤다.
그녀는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후, 더는 스스로 설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런 데에는 영 손재주가 없어서 말이야. 이런 걸 보면 너무 신기하더라고.”
“막상 해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텐데, 한번 해 보실래요?”
“그래도 될까?”
“그럼요.”
도로시가 옆에 있던 바구니에서 천과 바늘을 꺼내 건넸다.
가죽이나, 모피를 주로 사용해 옷을 만들어서인지, 도로시가 쓰는 바늘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두툼했다.
“일단 여기와 여기를 실로 이으면 되는데, 혹시 바느질해보신 적 있나요?”
“자수는 해봤는데.”
“그럼 더 쉽겠네요. 제가 한 번 시범을 보일 테니까 한 번 천천히 따라 해보세요.”
주름진 손이 능숙하게 천을 잇대어 나간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를 따라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만약에 말이야, 옷을 만들어 수익을 낼 수 있다면 참여할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옷을 만들어서 돈이요? 그런 게 가능한 건, 귀족 옷을 맞추는 몇몇 재봉사들이나 가능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거지.”
“돈을 벌 수 있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솔직히 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웬만해선 다들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
“게다가 옷은 그 사람 체형에 맞춰야 하잖아요? 차라리 모피나, 가죽을 거래하는 게 이득이죠.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마저도 직접 짐승을 잡아 구하지만요.”
도로시는 웃으며 내 엉킨 매듭을 가리켰다.
그녀가 시범을 보여줄 때는 쉬운 줄만 알았던 게, 막상 따라 하니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럼 모피나, 가죽을 팔아도 썩 돈이 되진 않겠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사냥꾼이 되는 걸 선호하기보다는 용병이나, 병사가 되곤 하죠. 사냥꾼들의 수가 계속해서 줄어드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도로시는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안타까움이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