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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25화 (25/204)

| 25화

25화. 곤란하실 텐데요

“……일부러 도발하신 거군요.”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에 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왜요? 왜, 그러신 거예요?”

“아무래도 착각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착각이요?”

블러쉬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힌 채, 말을 고르다가 이내 입을 뗐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티어드롭 공작이 부인을 찾는다는.”

“……절 찾는다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지만, 블러쉬는 예의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하더군요.”

“……왜 찾는지도 아시나요?”

“막상 버리고 나니 아쉬워진 거겠죠.”

블러쉬는 고개를 삐딱하게 세웠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수도를 뜨겁게 달궜던 티어드롭 영애께서 정작 데뷔탕트를 치르고 난 후에는 그럴싸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부인을 찾는 이유는 뻔하겠죠.”

“그래서 뭘 말씀하고 싶으신 거예요?”

“부인께서 가진 가치죠.”

“제가 가진 가치요?”

당연히 대용품 같은 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느릿하게 두 눈만 깜박거렸다.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만 봐선 그가 무슨 생각인지 여전히 알기 어려웠다.

“정말로 부인께서 일방적으로 티어드롭의 덕을 본 것뿐이라면, 이제 와서 티어드롭 공작이 다시 찾진 않았을 겁니다.”

“…….”

“티어드롭이 부인께 얼마나 잘해줬는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원망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죄책감을 느낄 리가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지만, 블러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엔 부인께는 어떤 상황이든 결국 티어드롭 공작을 옹호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맺으려고 하는 버릇이 있죠.”

“꼭 그런 것만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버려진 개들 중 주인을 원망하는 개는 없거든요. 그저 자신이 왜 버려졌는지 스스로에게 이유를 찾을 뿐이죠. 개가 감히 주인을 원망할 수 없으니까요.”

“…….”

“하지만, 아십니까?”

개의 탈을 써도 사람은 결국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거.

블러쉬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아무리 대단한 감정도 쓰다 보면 소모되기 마련이죠. 참는 것보다는 쏟아내는 편이 정리하는 데에는 나을 겁니다.”

“…….”

“원망하세요. 그래도 됩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이곳은 티어드롭도 아니고, 당신 역시 말 잘 듣는 개가 아닌데.”

동정한다거나, 걱정하는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정작 날 보는 사내의 표정은 너무도 덤덤했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약한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릿속으로는 수백, 아니 수천 번 생각했다.

뭐가 옳은지도 알고, 잘못된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악몽을 꿨다.

잊으려 할수록 오히려 기억은 선명해졌으니까.

많은 게 바뀌어 가는데도 정작 나는 혼자 그날의 기억에 갇혀 있었다.

“원래 처음은 다 그렇죠.”

“…….”

“하지만 곧 익숙해질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단언하시는 거예요?”

“부인께서는 이제 성안에서 외투를 입지 않으시니까요.”

블러쉬의 시선이 내 어깨에 닿았다.

꽁꽁 싸매기 바빴던 지난날과 달리, 나는 이제 어느 모나차르트인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치미는 울음에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와중에도 무심한 사내는 내게 손수건 하나 건네주지 않았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결국 내가 버티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릴 때까지.

* * *

‘눈이 아파.’

유난히도 무거운 눈꺼풀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막 깨어난 터라 정신이 몽롱했음에도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퉁퉁 부은 눈은 뻐근하다 못해 시야를 방해했고 푹푹 처지는 몸은 물먹은 솜이라도 된 양 무겁게만 느껴졌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었다.

‘안 되는데……, 오늘도 할 일이 많은데…….’

머릿속으로는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손 하나 까닥하기 싫었다.

나는 결국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직 주변이 밝아지지 않은 걸로 봐선 조금 더 게으름을 피워도 될 것 같았다.

바스락-

귓가를 스치는 시트 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다면.

나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조심스럽게 떴다.

아직 아침이 밝아오지 않아 제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침대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실루엣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제 침실에서 잤던가? 나는 분명…….’

어제 있었던 일이 하나둘 떠오르자, 흐릿하던 정신이 단숨에 깼다.

블러쉬를 앞에 두고 엉엉 울었던 것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이었다.

내겐 스스로 걸어서 침실로 온 기억이 없었다.

‘설마…….’

문득 떠오른 가정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가 움직이는 인영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시간, 나와 같은 침실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정말, 그가 옮겨준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블러쉬가 범인일 것 같은데,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엉엉 운 것도 모자라 기절해 업혀 왔을 것까지 생각하니,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었다.

하지만 내 소리 없는 절규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맙소사.’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사라져버렸다.

나는 셔츠를 벗는 블러쉬의 행동에 당황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뻐끔거리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달칵. 탁. 탁. 탁.

시야가 차단되자, 되레 예민해진 청각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숨소리가 거슬렸고, 혹시라도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릴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마저 들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눈을 뜨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찾아온 고요에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언제 다가온 거지?

어느덧 날 내려다보는 붉은 눈에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사내의 맨가슴이 보이고 있었다.

“……제가 깬 거,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기척에는 예민한 편이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애꿎은 침대 시트만 만지작거렸다.

그와의 대화가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꿀꺽-

생각보다 크게 들리는 침 소리에 되레 놀라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덤덤한 척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잘 구경하셨습니까?”

“구경한 거 아니에요!”

“네. 압니다. 잠든 척하고 계셨던 거.”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블러쉬가 장난을 쳤다는 걸 깨닫고 헛숨을 뱉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평소에는 잘만 무안을 주시더니.”

“제가 언제 무안을 드렸다고.”

“제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건, 그렇지만…….”

나는 무심코 시선을 내리려다가 다시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간 뻔뻔하게 굴었지만 실은 남자의 맨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간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내 주위에 있는 남자라곤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보고 싶으면 보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제가 상관있어요.”

“제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벗을 수 있을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정작 제 몸을 보는 건 부끄러우십니까?”

“그야 말로는 얼마든지, 으으……. 죄송하지만, 마저 옷을 입어주실 순 없으실까요?”

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시선이 가니 차라리 아예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블러쉬는 팔짱을 낀 채 영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입으실 건가요?”

“날이 더워서요.”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을 해야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까닥거리는 블러쉬에 헛웃음이 절로 났지만, 사내는 지나치리만큼 뻔뻔했다.

“……절 놀리시는 게 재미있으신 거죠?”

“네.”

변명조차 안 하는구나.

지나치게 당당한 블러쉬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에게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는 어제의 추태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당분간 최대한 열심히 블러쉬를 피하고자 애썼을 것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더위가 가실 때까지 눈 감고 있을게요.”

눈앞에서 살색이 왔다 갔다 하는 것보단 차라리 안 보는 게 낫지.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가슴에 손을 올렸다.

당황한 마음을 잠시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고 있으시면 곤란하실 텐데요.”

“제 판단으로는 차라리 눈을 감는 편이 덜 곤란할 것 같아서요.”

“제 판단으로는 곧 후회하시게 될 것 같은데요.”

“겁주셔도 소용없어요.”

“그렇습니까?”

“…….”

뜨거운 숨이 뺨을 스쳤다.

멍청하게도 나는 방금 전 눈을 감으면 그만큼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사실에서 조금도 학습한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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