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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23화 (23/204)

| 23화

23화. 있어선 안 되는

“그 말씀은 이제 제가 제법 믿을 만하다는 거죠?”

나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 질문을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군요.”

“하긴, 절 믿지 않았다면 그런 거금을 선뜻 투자하시지도 않으셨겠죠.”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해도 돌아오는 건 무표정한 얼굴이라, 딱히 재미는 없다.

나는 예의상 한 번 더 웃어주고는 먼저 걸음을 뗐다.

하지만 곧장 덧붙여진 말에 내 걸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멈췄다.

“굳이 감추려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움직였다가 멈춘 반동으로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우리 사이는 가까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웃음이 헤프다고만 생각했는데.”

별 고민 없이 걸어 나온 사내의 손이 뻗어졌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블러쉬를 응시했다.

“그보다는 습관인 것 같더군요. 어떤 순간이든.”

닿았다, 아니. 닿은 걸까?

찰나의 순간, 뺨에 닿았다가 떨어진 단단한 감촉에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나는 블러쉬의 손에 들린 은색 실 한 올을 보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내 머리카락이었다.

“장난도-”

“괜찮은 척하려고 애쓰는 게.”

블러쉬의 마지막 말이 뒤늦게 이어지고서야 깨달았다.

나를 바라보는 사내의 오랜 탐색이 어느샌가 끝냈다는걸.

* * *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렇게 넋을 놓고 계십니까?”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걱정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플렌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애꿎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나, 오늘 여기서 잘까?”

“네?”

“아니. 그냥. 일도 많고, 빨리 처리하는 게 좋으니까.”

“오래 일하려면 체력 관리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을 텐데요.”

표정을 굳히는 플렌은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게도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나는 조금 더 진지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목을 가다듬었다.

“물론 잠은 잘 거야. 다만, 여기서 잔다는 거지. 이동 시간도 줄이고, 일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

“방금 한 말, 너무 작위적이었지?”

“네. 그것도 무척이요.”

눈치 빠른 플렌을 알기에 최선을 다했더니, 오히려 그게 더 어색한 연기를 만들었다.

결국 나는 빠르게 포기를 선언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냥 오늘은 돌아가기 싫어서 그래.”

“그자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아니. 그런 건가…….”

나는 말을 제대로 끊지 못한 채 얼굴만 구겼다.

블러쉬가 뭔가를 했다고 하기에는 확실히 미묘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기엔 아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버렸다.

“제대로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괜찮습니다. 어차피 아가씨의 고민은 옛날부터 제가 들어드리지 않았습니까.”

플렌이 몸을 낮추고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괜찮은 척을 한대.”

“네?”

“어떤 순간이든 괜찮은 척 굴려고 한다고.”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군요.”

“플렌.”

눈에 힘을 줬지만 플렌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대신,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았다.

“아가씨는 어릴 적부터 그랬습니다. 지나치게 잘하려고만 했죠.”

“…….”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일지도 모르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안 된다는 걸. 원래 아이들은 예민하니까요.”

“나는…….”

입 안이 썼는데도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테니까.

나는 여전히 차갑게 식었던 아버지의 눈을 기억했다.

“여긴 티어드롭이 아닙니다.”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

나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나는 아직도 꿈을 꿔. 벗어나고 싶은데, 다신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도돌이표처럼 그곳에 서 있어.”

정작 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을 텐데.

꽉 다문 잇새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도로 떴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아.”

“…….”

“괜찮은 척하려고 하고 있어. 더 밝게, 아무렇지 않게 굴려고 해. 그래야만, 내가 그곳을 떠나도 잘 지내고 있는 게 되잖아.”

“아가씨.”

“나는 괜찮아, 아니. 그래야만 해.”

그래야 다시 만나는 날이 될 때, 아무렇지 않게 웃어줄 수 있으니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렇다 해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아가씨가 어떤 심정인지 뻔히 아니, 차마 뭐라 하진 못하겠지만, 솔직히 스스로를 혹사해서 좋은 일은 없지 않습니까.”

“내가 너무 심하다 싶으면 네가 잡아주겠지.”

“아니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다른 사람? 누구?”

“누구겠습니까.”

플렌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그 사람은 아니겠지?”

“모나차르트 대공 말고 다른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뭐 어떻습니까. 솔직히 이번 일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것 같은데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돼?”

“저야 어릴 때부터 아가씨를 봐와서 익숙하다지만, 모나차르트 대공은 아니지 않습니까. 특히 아가씨께서는 표정 관리를 잘하시는 편이시니 웬만큼 유의 깊게 지켜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죠.”

확실히 시선이 계속 집요하게 따라붙긴 했었지.

그저 그 안에선 플렌이 원하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을 뿐.

편견일진 모르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블러쉬의 모습은 영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나는 아까 전의 블러쉬를 떠올리며 애꿎은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도 맹수가 사냥감을 잡기 전 숨죽인 채 때를 노리다가 탐색이 끝나면 사냥을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도돌이표처럼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 탓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와는 잘 지내고 싶어. 소문과 달리,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 하지만 그뿐이야.”

“어째서요?”

“필요 이상으로 관계가 깊어지는 걸 원치 않으니까.”

“…….”

“내가 가치를 입증하기만 한다면, 지금의 관계는 결코 바뀌지 않을 거야. 그게 거래니까.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잖아.”

일정한 조건으로 정해진 계약서와 다르게 감정은 언제든 상황에 따라 변질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게 나아. 굳이 그런 방향이 아니더라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은 얼마든지 있잖아.”

“…….”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날 여자로 안 보는걸.”

“그런데도 왜 여기서 주무시겠다는 겁니까?”

“그냥 조금, 놀라서 그래. 나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들켜버려서. 그리고…….”

무서워서.

나는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로선 과연 짐승 같은 사내의 탐색이 끝났다는 게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했으니까.

지금으로선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했다.

* * *

“정말로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많이 불편하실 텐데요.”

“그래도 이편이 나아. 내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일에 파묻혀 계시는데요.”

“점차 시장이 마련되고 있으니, 슬슬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지.”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 바쁜 편이 그나마 잡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시비스에게 확인받을 서류를 정리한 후, 곧장 다음 업무를 찾았다.

“등을 설치한 지도가 여기 어디쯤에…….”

“여기 있습니다.”

먼저 지도를 찾아낸 플렌이 씨익 웃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자료가 있든 간에 원하는 걸 한 번에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아, 고마워. 그런데 안 갈 거야?”

“제가 어떻게 아가씨를 두고 혼자 갑니까.”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그 정도는 괜찮지.”

“제 눈에는 여전히 애 같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걸. 내 눈에 플렌은 항상 어르신 같아.”

“어르신이라. 듣긴 썩 좋진 않지만 틀린 말도 아니니 할 말은 없군요.”

플렌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린 후, 몇 가지 서류를 분리해 내게 건넸다.

“이게 뭐야?”

“이것들부터 처리하고 계시면, 제가 담요라도 가져오겠습니다.”

“효율적이네.”

“이런 거라도 안겨드려야 생각이 없어질 게 아닙니까.”

플렌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방을 나섰고, 나 역시 그가 남기고 간 숙제를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별생각 없이 서류에 시선을 둔 채 대충 대답했다.

“생각보다 늦게 왔어? 얼른 들어와.”

“…….”

“새삼스레 노크는 왜 해. 우리 사이에 그냥 들어오면 되지.”

“…….”

“아니면, 오래간만에 장난이라도 하고 싶…….”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헛숨만 들이켰다.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사내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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