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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21화 (21/204)

| 21화

21화. 100분의 1

“치마만 둘러도 환장하는 놈들인데, 비 전하 같은 미인이 방문하니 눈이 돌아간 거겠죠. 게다가……”

멜시는 말끝을 흐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게다가, 그 후의 말은 뭐야?”

“그, 그게 비 전하께선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시지 않습니까. 또래로 생각한 것이겠죠.”

“내가 어려 보여? 그런 말은 처음 듣는걸.”

“아무래도 체격이 왜소하시다 보니…….”

마치 자신이 불경한 말이라도 한 양, 멜시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모나차르트 사람들이 유난히 큰 거야.”

나는 단호히 멜시의 말을 끊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작다는 말이 억울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티어드롭 저택에 있을 때만 해도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이를 찾기 어려울 만큼 나는 장신에 속했다.

난데없이 소인 취급을 받게 된 상황이 어이없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비 전하, 아니십니까?'”

더 높은 굽의 구두를 신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저편에 있던 금발의 사내가 손을 휘휘 두르며 걸어왔다.

“잘 지냈어?”

“저야 항상 잘 지내죠. 그나저나 비 전하께서는 못 본 새 더 아름다워지셨는걸요.”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알아도 듣긴 좋네.”

“입에 발린 소리라뇨. 저는 미인에게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정말?”

“물론이죠. 그러니 뭐든 말씀해주십시오. 냄새 나는 훈련장까지는 어인 일이신지요.”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해 보이며 유쾌하게 웃는 말라즈는 내게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굳이 목적을 감출 이유도 없어서 나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이를 보러 왔어.”

“그이……, 아. 전하 말씀이시군요?”

말라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쩐지 음흉한 표정이었다.

“이해합니다. 신혼이면 다 그럴 수 있죠.”

“그게 아니라, 따지러 온 거야.”

“따져요? 뭘 말입니까?”

“수석재무관이 번번이 예산 승인을 늦춰서-”

“씨씨가 결국 사고를 쳤나 보군요?”

멋대로 말을 끊은 말라즈를 타박하기엔 그는 지나치게 신나 보였다.

“씨씨? 그게 뭐야?”

“저희 성의 수석재무관 별명인데, 모르십니까?”

“처음 들어보는데.”

“괜찮습니다. 오늘부터 아시게 되실 테니까요.”

말라즈의 두 눈이 아이처럼 빛났다.

“무슨 뜻인데, 그러는 거야?”

“좀생이요.”

“좀생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년 예산이 정해지는 달은 다들 망할 씨씨를 외치는 시기죠. 그 자식, 다른 건 몰라도 돈에 관해선 엄청 악독하고 집요하거든요.”

“그래?”

“그 녀석은 성의 기름 한 방울도 허투루 쓰는 걸 못 보는 쪼잔한 성격인데다가 쓸데없이 돈 계산은 빨라서 잘못 걸렸다가는 반 토막이 된 봉급을 보게 되죠.”

“원한 때문에 봉급을 깎아버리는 건 너무 권력 남용 아니야?”

“그렇죠!”

“항의는 해봤어?”

“항의해도 씨알도 안 먹힙니다. 망할 씨씨는 아무런 이유 없이 감봉하지 않거든요. 어떻게서든 이유를 찾아내서 사람의 피를 말리며 괴롭히죠.”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말라즈는 숨 한 번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말라즈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깝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제 그런 서러움은 끝이니까요. 비 전하께서 그 녀석의 콧대를 한 번 콱 꺾어주시기만 하시면, 그놈도 결국엔……, 아니지. 아니야. 제가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전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아.”

“네?”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다시 생각해봐야겠어.”

잘만 떠들던 말라즈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내가 망할 씨씨에 흥미를 갖게 된 후였다.

* * *

“전하께서 결혼하셨다는 말 듣고, 설마 했는데 진짜인 줄이야.”

“그러게. 솔직히 나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다른 것보다 엄청 예쁘시던데.”

“맞습니다! 솔직히 저는 살면서 그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봤습니다!”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그런 미인을 만나는 걸까요.”

“꿈 깨라. 미인도 눈이 있는 법인…….”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훈련생들의 수다가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훈련을 마친 블러쉬가 느릿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누가 왔다고?”

“그게 말입니다. 분명 비 전하께서 씨씨가 예산 승인을 늦춰서 따지러 오셨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물음을 던지는 사내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말라즈의 보고와 달리, 심포니아를 찾을 수 없었다.

“휴게실에 머물고 있나?”

“아뇨.”

“그럼?”

“갑자기 생각이 바뀌셨다면서 가버리셨습니다.”

말라즈는 실망을 감추지 않으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드디어 원수 같던 시비스가 한 번 크게 당하나 했는데, 아니라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했다.

“생각이 바뀌어?”

“네. 그러시답니다.”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심포니아가 무슨 생각인지 유추해보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항상 예상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 * *

“어쩐 일이십니까?”

“내 시녀가 받아오지 못한 예산 승인을 받으려고.”

내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구는 시비스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눈빛만 봐도 알았다.

억지로나마 예의를 지킬 뿐, 모나차르트 성의 수석재무관은 나를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해당 건은 현재 검토 중입니다.”

“대공이 이미 허락한 사안에도 검토가 필요해?”

“그렇기에 더 검토가 필요한 겁니다.”

시비스가 성의 없는 투로 대꾸했다.

그는 내가 방 안으로 들어온 순간을 제외하고는 서류에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무슨 검토가 필요한 건데?”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모르겠는데?”

“모른다고요? 지금 스스로가 모나차르트의 몇 년 치 예산을 쓰고 계시는지 아십니까?”

시비스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퀭한 눈을 한 사내의 눈 밑은 얼마나 잠을 못 잔 건지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원래 사업에는 투자가 필요한 법이지.”

“깨진 잔에 물을 붓는 건 투자가 아니라, 낭비죠.”

“깨진 잔인지, 아닌지는 섣불리 판단할 문제가 아닐 텐데.”

시비스는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이내 펜을 들고 뭔가를 썼다, 아니. 썼다기보다는 뭔가를 계산하는 모양새였다.

“지금까지 쓰신 돈을 합산한 후, 그걸 모나차르트의 평균 1년 예산으로 나눈 겁니다. 지금까지 쓴 금액만 하더라도 무려 10년 어치의 예산이죠.”

“그래서?”

얄궂게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걸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비 전하께서 벌이신 일 덕분에 모나차르트의 수명이 10년이나 줄었다는 걸 깨달으셔야지요.”

“나는 수명이 준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났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시비스의 손이 또다시 움직였다.

사각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괜히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비 전하께서 쓴 금액을 전부 메꾸기 위해선 매해 이 정도 수익을 올려야 겨우 20년에 다 갚게 될 겁니다.”

“예상 수익을 너무 낮게 책정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낮지 않습니다. 애당초 얼음을 사겠다고 하는 상인은 그리 많지 않거든요. 고가품일수록 상인의 수는 적어지는 법이죠.”

“결국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제대로 수익을 내지 못할 거라는 거라네? 네 말대로라면 팔릴 얼음도, 모나차르트를 방문할 상인도 몇 되지 않을 테니 말이야.”

“썰매 수수료도 거래가 있어야 수익이 되고, 현재 유통되고 있는 얼음의 양이나, 얼음의 금액을 고려해 계산해보면 당연히-”

“나는 얼음만 판다고 한 적은 없는데.”

“…….”

“얼음은 연습용일 뿐이야. 중요한 건 다음이지.”

가라앉은 눈이 가만히 날 응시한다.

내 의견에 동의한다기보다는 어디 더 변명할 게 있으면 해보라는 눈이었다.

“얼음의 장점은 자본금도 들지 않는다는 거지. 그래서 중간에 물품을 잃어버리거나, 망가져도 손실이 적은데다가 심지어 상황에 따라 무게와 크기를 조절 가능하잖아.”

“…….”

“아무리 모나차르트 사람들이 썰매를 잘 탄다 해도 정식으로 일한 건 처음이잖아. 거점을 관리하게 될 관리자도 그렇고. 얼음은 어느 정도 수익을 보장하면서도 좋은 연습이 되어 줄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얼음은 고가품이고-”

“100분의 1.”

나는 시비스의 펜을 빼앗아 대신 쥐었다.

그리고, 그가 적어놓은 숫자 위에 줄을 그어버리고 그 옆에 새로운 숫자를 썼다.

시비스가 적어놓은 얼음의 가격을 딱 100분의 1로 나눈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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