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20화. 발판
* * *
“제가 왜 당신을 만나기 위해 무리를 했다고 생각하세요?”
“부인께서는 무리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태연해 보였습니다만?”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는데.
다소 짓궂은 사내의 얼굴을 보니 잠깐이나마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빠르게 심호흡을 한 후에 바로 입을 뗐다.
“그때의 저는 전혀 태연하지 않았고 솔직히 많이 초조했어요. 그때, 전하를 만나지 못하면 꼼짝없이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했거든요.”
“어째서입니까?”
“전 어떻게 해야 모나차르트로 갈 수 있는지 몰랐거든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죠.”
“그게 왜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상인들에게는 큰 문제죠. 그들이 자랑하는 빠른 말들은 설원의 땅에선 무용지물이고, 얼음은 지나치게 무겁잖아요. 솔직히 상인들 중 하나라도 썰매의 존재를 알았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예요.”
나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생각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정보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모나차르트에는 이런 일들이 많을 확률이 컸다.
그렇게 생각하자,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다고 한들, 그걸 운송할 수단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 없잖아요.”
물론 지금부터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겠지만요.
나는 보란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블러쉬는 이 땅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지만 내겐 꽝꽝 얼어붙은 땅이 기회로 느껴졌다.
“길을 내두면 사람은 모여들죠.”
“단순히 물건만 팔 생각이 아니었군요.”
“그런 거라면 상단을 꾸렸겠죠.”
사업을 좋아한다 해도 목표를 잊을 생각은 없었다.
결국 모든 계획은 블러쉬를 최대한 빨리 황제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저희는 자체적으로 상단을 운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의 시장을 제공할 거예요. 저희가 아니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모나차르트를 배 불려 줄 수 있게끔요.”
“세금을 부과할 셈이군요.”
“아쉽지만, 당분간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어요. 상인들을 모으기 위해서 일정 기간은 세금을 면제해줄 생각이거든요.”
일반적으로 개인 영지에서는 세금으로 많게는 수익의 50%, 적게는 5%를 가져간다.
그렇기에 상인들은 세금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세금이 적으면 적을수록 상인들에게는 호재였다.
일정 기간의 세금 면제는 자연스레 상인들을 유혹하는 미끼가 되어 줄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모나차르트의 배를 불린다는 겁니까?”
“모나차르트에서 물건을 운송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물건이 있잖아요.”
“…….”
“네. 예상하고 계신 게 맞아요. 앞으로 저희는 썰매 이용료를 받을 거예요.”
어차피 이제 막 시작하는 시장에 막무가내로 자본을 푸는 상인은 드물다.
초창기에는 다들 서로 눈치 보면서 모나차르트에서의 거래가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 재보는 시기가 될 테니까.
세금율을 높이지 않는 이상, 세금을 매겨놓는다 해도 그것으로 벌 수 있는 수익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었다.
세금은 포기하고 다른 곳에서 수익을 내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썰매는 모나차르트에서만 쓸 수 있는 물건인데다가 물건을 실기 위해서는 부피도 상당하죠. 상인들 입장에서는 썰매를 구입하는 것보다 대여를 선호할 수밖에 없어요.”
“가격은 어떻게 받을 겁니까? 여러 사람이 운행하는 만큼 가격을 정하는 기준이 다 다를 텐데요.”
“크기나 무게, 그리고 거리를 감안해서 기준을 정해놓으면 돼요. 일종의 정찰제죠.”
지금은 미비하지만 모나차르트는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시장이었고, 상업에서 유통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나쁜 생각은 아니군요. 상인들이 끌릴 만한 물건이 얼마나 모나차르트에 있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요.”
“말씀드렸잖아요. 모나차르트에는 보물이 있다고.”
나는 빠르게 호흡한 후,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앞으로 모나차르트는 많은 것이 달라질 거예요.”
“…….”
“다만, 상인들이 들어오는 게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닐 거예요. 급격한 변화는 많은 문제점을 초래할 수밖에 없거든요. 특히 이제 막 걸음마를 뗄 준비를 한 시장이라면, 거대한 자본에 놀아나기 쉽죠.”
“…….”
“그런데, 여긴 모나차르트잖아요?”
단점은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지도 위를 훑었다.
* * *
“등은 어때?”
“소개해주신 대장장이의 솜씨가 무척 좋더군요. 등의 사용 목적과 형태를 설명해주니, 금세 모나차르트에 어울리는 형태로 디자인을 변형해주었습니다.”
“중요한 건, 모양이 아니라 제대로 움직이느냐지.”
“시험 삼아 몇 개를 만든 후, 여러 테스트를 거쳤습니다. 문제없이 설치 가능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네.”
“제가 언제 아가씨를 실망시켜 드린 적 있습니까?”
플렌이 의기양양하게 턱을 추켜들었다.
“하긴, 그렇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넘겼다.
확인해야 할 사안은 등만이 아니었다.
“보시는 대로 썰매는 규격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눠서 디자인했고, 이후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종류를 늘릴 예정입니다.”
서류에는 운송을 위해 따로 개조된 썰매의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꼼꼼히 설계도를 살피다가 한 곳에 시선을 뒀다.
“흐음…….”
“수정하고 싶으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이대로는 조금 밋밋하니, 이쪽에 인장을 새겨보는 건 어때?”
“인장이요?”
“모나차르트의 정식 운송 업체라는 흔적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흐음, 괜찮을 것 같군요. 다른 일반 썰매들과 구분되기도 할 테니까요. 작은 것보다 아예 눈에 확 띄게 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괜찮네. 그럼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하자. 그리고, 다음은…….”
나는 다음으로 넘긴 서류를 찬찬히 읽은 후, 펜을 들어 적힌 문장을 쭉쭉 그어 지워버렸다.
단어 하나에도 말의 의미는 달라지고, 노련한 상인들은 틈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이익이 날 만한 꼬투리가 있으면 악착같이 붙어서 이익을 뜯어내려고 할 테니, 불안 요소는 미리 차단해놓는 편이 좋았다.
“최대한 서둘러서 준비하고 있어서 그런지, 확실히 수정할 곳이 많네.”
“어쩔 수 없죠. 원래 시작이 가장 어려운 법 아닙니까.”
“그럼에도 다들 잘해 주고 있지.”
나는 턱을 괸 채로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 머릿속은 연신 괜찮은 문장을 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모나차르트 사람이라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던 터라…….”
“문명에 뒤처진 야만인?”
내가 짓궂게 눈을 찡그리자, 플렌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치게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아닌 척 고상하게 포장하려 해도 소용없잖아. 솔직히 모나차르트에 오기 전까지 내심 그와 비스무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걸.”
“…….”
“정작 마주한 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말이야.”
나는 플렌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때였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멜시가 왔나보다. 들어와.”
“…….”
“못 들었나?”
“제가 나가보죠. 아가씨는 앉아 계세요.”
플렌은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막고는 문으로 갔다.
끼이익-
플렌이 문을 열자, 갈색 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멜시였다.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해?”
“그게……”
멜시가 울상이 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시 보니, 그녀의 손에는 있어야 할 것이 들려있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설마, 또야?”
“죄, 죄송해요!”
“사과하지 마. 이건 네가 사과할 게 아니야.”
나는 단호히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쁜 시기에 굳이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계속 참았더니, 점점 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눈감아주는 것도 무리였다.
“설마 직접 수석재무관을 찾아가시려는 겁니까?”
“아니. 안 찾아가. 어차피 찾아가봤자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을 텐데, 뭐.”
“그럼 왜 일어나신 겁니까?”
“수리 요청 좀 하려고.”
“수리요?”
“응. 수리.”
원래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당연히 주인에게 가서 따지는 법이잖아.
* * *
호기심 어린 시선이 빠르게 날 훑는다.
나는 내게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훈련장을 유유히 걸어갔다.
“안녕.”
“아, 안녕!”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기합이 잔뜩 들어간 소년들이 어설프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기보다는 그냥 당황해 날 따라 인사를 한 모양이었다.
“이놈들이,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말을 낮춰!”
“으아앗, 죄송해요!”
“브라운 경, 잘못했어요!”
“혼내지 않아도 돼. 몰라서 그런 거잖아.”
“하지만…….”
“괜찮아. 귀엽잖아.”
“방금, 저 물건들이 귀엽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멜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귀엽지 않아?”
“저놈 하나 무게가 비 전하의 두 배는 될 텐데요. 저건 귀엽다기보다는 징그러운 거죠.”
“그런가?”
앳된 티가 남은 얼굴로 수줍게 웃는 모습이 나름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멜시에게 혼났음에도 소년들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으음, 역시 내 눈에는 귀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