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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7화 (17/204)

| 17화

17화. 길의 형태

* * *

“늦으셨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져서요.”

“…….”

“그렇게 바라보시기만 하면 저는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 몰라요.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블러쉬는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뭘 가리키는 거지? 입술?

나는 무의식적으로 블러쉬를 따라 손을 움직이다가 닿은 까슬거리는 감각에 미간을 찡그렸다.

아까 입술을 심하게 깨물어서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좀…….”

“연인입니까?”

“네?”

“그자말입니다.”

누가 누구랑 연인이라고? 플렌이랑 나랑?

나는 눈을 껌벅거렸다.

내 귀로 똑똑히 들었음에도 블러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것치곤 꽤나 각별해 보이시던데.”

“정말 아니……, 잠깐. 혹시…….”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 남자, 지금 내 상처가 뭐 때문에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지금 생각하시는 거, 절대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울컥해 소리쳤다.

“아닙니까?”

“절대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플렌이랑은 결코 그런 사이가 될 수 없어요.”

“너무 쉽게 확답을 내리시는군요.”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죠.”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플렌은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질색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그게, 음…….”

나는 입술을 깨물려다가 상처에 얼굴을 찌푸렸다.

플렌과 내가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플렌의 비밀을 공개해야만 하는 거라서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사내의 집요한 시선 속 최대한 그럴싸하고 무난한 대답을 떠올리려고 애쓰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잖아요.”

“취향?”

“저는 비쩍 마른 남자는 별로예요. 그런 남자는 든든한 맛이 없잖아요.”

“…….”

“솔직히 남자라면 펜보다 검이 잘 어울리는 편이 좋잖아요. 무거운 검을 아무렇지 않게 휙휙 휘두르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데요.”

실제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나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계속 플렌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 텐데, 미래를 위해 혹시 모를 오해의 여지는 미리 싹을 잘라두는 편이 좋았다.

단지 그런 생각이었는데…….

‘착각인가?’

나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찰나의 순간 지나간 터라,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약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블러쉬의 입술은 잠깐 호선을 그렸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당신이 틈만 나면 이렇게 보니까, 저도 따라 한 거죠.”

차마 방금 웃었냐고 물을 수 없어 적당한 핑계를 댔다.

“제가 부인을 그렇게 바라봤습니까?”

“네. 자주 그러시죠.”

나는 종종걸음으로 블러쉬에게 다가갔다.

“뭐 하시는 겁니까.”

“보여주려고요. 툭하면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서…….”

조금이라도 시야를 비슷하게 맞춰보고자, 까치발을 세우고 턱을 세웠는데 소용없었다.

키 차이가 있어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날렵한 턱선뿐이었다.

“잘생기셨네요. 보통 이렇게 올려다보면 못생겨 보이기 마련인데.”

“…….”

“평가하려는 건 아니었고 그냥 멋쩍어서 그런 거예요. 관찰당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려주고 싶었던 건데, 설마 키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죠.”

나는 슬쩍 뒤로 발을 뺐다.

다음에는 더 높은 굽을 신어볼까. 아니다. 워낙 키가 커서 키를 맞추려다가 내 다리가 먼저 부러질 거야.

“가만 보면, 부인께서는 지나칠 정도로 아무렇지 않으시군요.”

“뭐가요?”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거리가 좁혀졌다.

나는 불쑥 다가온 사내의 얼굴에 눈만 껌벅거렸다.

“보통 외간 남자가 다가오면 놀랄 법도 한데.”

“그야, 당신은 외간 남자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부인을 여자로 안 본다고요?”

“네. 그거예요.”

날 여자로 안 보는 사람을 남자로 볼 필요는 없지 않나.

피차 어떤 계약을 했는지 잘 알고 있는 사이에.

“걱정 안 해도 돼요. 내가 여기서 벗는다고 해도 당신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 알고 있어요.”

“…….”

“물론 저도 마찬가지고요.”

블러쉬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잘생긴 사내가 얼굴을 불쑥 내밀 때마다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어설픈 감정으로 일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감정 놀이가 아니니까.

“이제 그만 자죠. 내일은 할 일이 많을 테니까요.”

손에 살짝 힘을 주자, 블러쉬는 쉽게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시선만큼은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었다.

“자꾸 그렇게 보면, 절 좋아한다고 멋대로 생각할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블러쉬가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답지 않게 눈에 띄는 표정 변화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듣고 싶지 않으면 얼른 자요. 아니면, 저 씻는 거나 도와줘도 되고요?”

나는 장난스럽게 턱짓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비누 향이 나는 그와 달리, 나는 아직 씻지 않은 터였다.

“진심입니까?”

“진심이면 씻겨주시려고요?”

“제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할 거라는 걸 아는 거죠. 이건 계약 조항에 없었던 사항이고, 당신에게 이득이 되지도 않을 테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농담을 툭툭 뱉을 수 있는 건, 블러쉬를 어느 정도 파악했기에 가능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리, 모나차르트 대공은 너그러운 구석이 있었다.

“저랑 농담 따먹기라도 할 게 아니라면, 얼른 자요. 내일부터 바빠질 거라는 건 진심이니까요.”

모나차르트에 적응하기 위한 유예기간은 끝났다.

약속한 기간 내에 블러쉬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블러쉬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이번에도 블러쉬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안 자면-”

“씻으실 때까지 기다리죠.”

“이건 예상하지 못한 답변인데요.”

“굳이 아침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지만, 집요한 시선은 도무지 떨어질 줄 몰랐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씻고 나왔을 때, 블러쉬는 침대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채 앉아있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가 이내 침대로 올라갔다.

굳이 침실까지 일을 끌고 올 생각은 없었지만, 서로 합의된 상황이면 괜찮을 것이었다.

밤도 늦었고 이야기를 나누다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중요한 건……, 잠시만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등 뒤로 휙 넘겼다.

급히 말리고 와서인지 머리카락 끝은 다 마르지 않고 젖어있었다.

“아직 논의할 것투성이긴 하지만, 정리된 것만 말씀드릴게요. 최종 결정을 하기 위해선 당신의 의견도 종합해 봐야 하니까요.”

“참고하도록 하죠.”

블러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들리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나는 몇 번 목을 가다듬고 입을 뗐다.

“플렌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같은 결론이 났어요.”

“어떤 결론입니까?”

“길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거죠.”

나는 블러쉬를 빤히 올려다봤다.

예상했던 대로 블러쉬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모나차르트가 어떤 땅인지 모르시는 것 같군요.”

“방심하면 눈으로 덮여 왔던 길조차 헷갈리는 땅이죠.”

“그런데, 도로를 정비하시겠다고요?”

“수도의 상권을 발달시킨 건 기동력이죠. 수도 전체에 있는 수로를 길 삼아서 배로 물건을 운송하면서 상업이 발달한 거예요. 상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도로 정비는 꼭 필요해요.”

“필요하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할 수 없는 거예요.”

나는 눈에 힘을 바짝 줬다.

처음부터 포기해버리면 결코 문제를 풀 수 없었다.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항상 풀기 위해서 고심한 쪽이었다.

“그럼 부인께서 하고 있는 생각은 뭡니까?”

“수도에 있는 가로등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가로등이요?”

“수도에 있는 가로등은 사람이 하나씩 일일이 켜지 않아요. 모든 가로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연료만 넣어주면 동시에 모든 가로등이 켜지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가로등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겁니까?”

“눈이 와도 빛은 보이잖아요. 이어진 등이 도로를 밝혀주면 밤에도 얼마든지 운송이 가능해질 거예요. 아, 물론 그 전에 수도의 가로등과 다르게 추위에도 견딜 수 있게 개조를 할 필요가 있겠지만요.”

특히 가로등 자체에서 어느 정도 열을 낼 수 있게 하면 더 좋겠지. 열기가 있다면 내리는 눈에도 가로등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끝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길의 방향이 잡힌다면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지도를 끊임없이 확인할 필요도, 길을 헤맬 필요도 없잖아요.”

꼭 길이 도로 형태여야 하는 건 아니다.

오고 가는 방향만 제대로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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