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화. 기대하죠
* * *
“그녀는?”
“변함없습니다. 서재에서 책을 읽으시거나, 산책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시죠.”
“여유로운 모양이군.”
“대단한 사기꾼이거나,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거겠죠.”
시비스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모나차르트 성의 수석 재무관인 그는 갑작스러운 상관의 결혼에 크나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이란 무릇 장사였고, 출신 높은 귀족의 결혼은 더욱 그랬다.
성의 재정을 두둑하게 챙겨줄 뒷배 대신, 출신도 불분명한 여자에게 대공비 자리를 빼앗긴 건 굳이 계산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밑지는 장사였다.
“그녀가 사기꾼처럼 보이나?”
블러쉬는 턱을 괬다.
시비스는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입니다.”
말라즈는 방 안 풍경을 쭉 둘러보다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제 눈에는 사기꾼처럼은 안 보였습니다.”
“노름하다가 전 재산을 날린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신빙성이 확 떨어지는군요. 안 그렇습니까?”
“방구석에 박혀서 펜대만 잡은 놈보단 내 감이 훨씬 믿을 만할걸?”
“감에 따라 움직이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겠죠.”
“저게 진짜-”
“전하 앞이다.”
페잔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블러쉬는 턱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페잔에게 시선을 뒀다.
“페잔, 네 생각은?”
“제겐 대공비 전하를 평가내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녀에게 대공비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 역시, 제가 논할 부분은 아닙니다.”
페잔은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공비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
“말해. 명령이다.”
“말라즈와 의견이 같습니다.”
“나와 내 놈의 의견이 동일한 건 오래간만인데.”
금세 기가 살아난 말라즈가 눈을 빛났다.
페잔은 시끄러운 동기를 옆으로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는 산책 중인 심포니아와 멜시가 보였다.
“사기꾼처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멜시도 부쩍 잘 따르고요.”
“원래 진짜 사기꾼은 그런 티를 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럴싸한 말로 사람을 현혹하고 흔들어놓죠.”
시비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는 이번 결혼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현혹이라…….”
블러쉬의 시선이 짧게나마 손에 닿아 떨어졌다.
표정 없는 사내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생각을 읽기 어려웠다.
그때였다.
“그자는?”
“언질해 주신대로 바론 마을에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비 전하의 말씀대로 살아있을 확률이 큽니다.”
“조금 더 파봐. 신변을 확보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페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러쉬는 배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린 채 느릿한 숨을 뱉었다.
미세하지만 그의 미간은 좁아져 있었다.
* * *
“플렌!”
“아가씨?”
날 발견한 플렌이 급히 달려왔다.
나는 시큰거리는 눈을 모른 척하며 재빨리 플렌의 손을 잡았다.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얼굴이며, 손이며 할 것 없이 플렌의 피부는 거칠어져 있었다.
“괜찮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아닙니다. 도망자치곤 양호하게 살았습니다. 크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오는 데 힘들진 않았고?”
“괜찮았습니다.”
“다행이다.”
나는 비로소 안도하며 웃었다.
“기쁘신가 보군요.”
“아,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닙니다.”
블러쉬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나로선 그 모습조차 좋게 여겨졌다.
어쨌든 블러쉬는 나와 플렌을 만나게 해준 은인이었다.
“제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래야 우리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플렌이 왔으니, 이제부터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오랜 시간 함께 일하며 합을 맞춰온 플렌은 내게 있어선 가장 든든한 아군이었다.
나는 보란 듯 잡은 플렌의 손을 블러쉬에게 내보였다.
블러쉬는 맞잡은 우리의 손을 한참 응시하다가 이내 입을 뗐다.
“기대하죠.”
* * *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믿었던 구석이 모나차르트 대공이라니 놀랐습니다.”
“약간 도박을 해봤지. 원래 리스크가 클수록 이익도 커지는 법이잖아.”
“모나차르트 대공이 그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겁니까?”
플렌이 미심쩍은 눈을 했다.
다른 곳도 아닌, 모나차르트에 모든 걸 거는 게 영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그간 정리했던 노트를 플렌에게 건넸다.
“그렇게 만들어야지.”
“이게 뭡니까?”
“네가 오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모나차르트에 대해 조사해봤어. 우리에게 이곳은 미지의 땅이잖아. 공부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았지.”
내 손짓에 플렌은 노트를 빠르게 넘겼다.
대충 훑어보는 수준이었지만, 안경 너머의 두 눈은 빛나고 있었다.
“흥미로운 부분이 많네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너무 모험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원래 개척의 길은 어려운 법이지.”
“가볍게 말씀하실 게 아닙니다.”
“어렵게만 생각할 주제도 아니지.”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플렌은 그런 나를 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말씀 드리고 싶진 않지만, 이제 아가씨는 티어드롭 공작 영애가 아닙니다.”
“알아.”
“이제 아가씨의 실패는 단지 경험을 쌓은 것만으로 치부되지 않을 겁니다. 이제 아가씨를 지켜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그걸 모르고 목숨을 걸지 않아.”
나는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플렌은 한참 나를 응시하다가 인상을 썼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니.”
“솔직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게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하고 몰래 연락을 하신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지금 아가씨는…….”
“내가 뭐?”
“죽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습니다.”
“…….”
확 찔린 정곡에 나는 쓰게 웃었다.
나름 잘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치 빠른 플렌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공작께서 아가씨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직은.
나는 뒷말을 삼키며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긴 꿈을 꿨어.”
“…….”
“그 꿈속에서 너는 죽었고 나는 아버지를 놓지 못했어. 그래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날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잠에서 깨어나고 놀랐어. 내가 꾼 꿈이 현실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거든.”
“그게 무슨…….”
“미친 소리 같지? 나도 그렇게 믿고 싶었어. 그런데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할 수 없더라고.”
“…….”
“나는 이제 잘 모르겠어. 과연 내가 꿨던 건 정말로 꿈이었던 건지. 아니면, 다가올 미래였던지.”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꽉 쥔 주먹은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솔직히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다신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거야.”
“…….”
“그런 일을 겪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뜨거운 숨이 잇새 사이로 흘러나온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렇다면, 굳이 모나차르트 대공이 아니어도 되지 않습니까.”
“평범하게 사는 건 어떠냐고 묻고 싶은 거야?”
“돋보이는 삶만이 특별하진 않으니까요.”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평생 내 존재를 감춘 채 숨죽이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할 거야. 언제 아버지가 날 처리하러 올지 괴로워하면서 말이지.”
“설마 공작께서 그러시려고요. 저는 몰라도 아가씨는-”
“아버지는 이미 날 버렸어.”
한 번 버렸는데, 두 번 못 버릴까. 원래 가장 어려운 건 처음인데.
입안에 싸한 맛이 퍼졌다.
인정하기 싫어도 할 수 없었다.
날 노릴 만한 사람은 샤리에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필요에 의하면 언제든 날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티어드롭 영애의 비밀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야. 만약, 그녀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퍼지면 자연스레 내가 용의선상에 오를 테고, 최악의 경우에는 처리 대상이 될 수도 있어.”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플렌을 응시했다.
그는 더는 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뜻에 거스르지 않고 순종하며 살 생각이 아닌 이상, 나는 아버지가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해.”
“…….”
“그리고, 필요에 따라 아버지를 끝낼 수 있는 사람도 되어야 하고.”
샤리에트가 결점 없는 공작 영애로 남기 위해서 나는 결코 드러나선 안 되는 존재였다.
내 존재를 드러낸다는 건 사실상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니, 이런 짓을 벌인 거지.”
“하지만…….”
“더 이상 약한 소리는 그만둬. 내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
“나와 함께할 마음이 없으면 돌아가도 좋고.”
“제가 없으면 이 계획들은 어쩌시려고요.”
“네가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거든.”
나는 뻔뻔하게 웃었다.
플렌은 날 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다시 허리를 고쳐세우며 내 노트를 펼쳐 보았다.
“일단 아가씨가 꾸셨다는 꿈에 대한 이야기부터 들어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