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13화. 완벽한 침묵
“말랐군요. 좀 더 살이 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사이에 뭔가 오고 갈 거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방금 말은 너무 담백하지 않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막 결혼한 남편에게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고서야 비로소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무미건조한 사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감흥이 없어진 덕분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몸이 굉장히 좋네요. 너무 완벽해서 지적할 필요가 없겠어요.”
“…….”
“칭찬이에요.”
“그런 소리를 잘도 하시는군요.”
“남의 몸 평가를 먼저 한 건 당신이잖아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블러쉬는 그런 나를 보며 눈을 찌푸렸다.
“평가한 게 아닙니다.”
“그건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였나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
“아니면, 상대가 납득할 만한 변명이라도 있든지요.”
나는 팔짱을 낀 채 블러쉬를 흘겨봤다.
블러쉬는 덩달아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추위 때문입니다.”
“추위요? 갑자기 추위 이야기가 왜 나오죠?”
“부인의 몸을 보니 왜 그렇게 추위를 타는지 이해가 되었을 뿐입니다. 마를수록 추위를 많이 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게 다인가요?”
블러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짐승을 닮은 사내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솔직히 유쾌한 첫 만남은 아니었고, 지낸 시간 역시 그리 길지 않아 아직까진 블러쉬가 어떤 사람인지 완벽하게 정의 내리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거 하나 정도는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쭉 생각해봤는데 말이죠. 혹시 스스로를 오해 사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오해 사기 좋은?”
블러쉬가 헛숨을 뱉었다.
“의외로 다정하잖아요, 당신.”
“부인께서는 손바닥의 흉터가 누구 때문에 생겼는지 잊으신 모양입니다.”
“성까지 오기 전까지 제가 빌려 입었던 외투의 주인도 동일 인물이라서요.”
다시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말라즈를 대하는 블러쉬의 태도만 봐도 뻔히 보이니까.
블러쉬는 울타리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사람에게는 관대하나,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가차 없었다.
블러쉬가 내게 보인 배려는 내가 그의 울타리에 들어왔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퍽 기뻤다.
억지로 비집고 만든 것이긴 하나, 어쨌든 내 자리가 생긴 셈이니까.
“왜 갑자기 웃으시는 겁니까?”
“당신과 잘 지내고 싶어져서요.”
“하아?”
자신의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다는 건, 결국 한 번 쥔 것은 쉽게 놓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내가 제대로 가치를 입증하기만 한다면 블러쉬가 날 버리는 일 따윈 없을 것이었다.
“도대체 부인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당신과 잘 지내고 싶단 생각을 한다고.”
사람에게 배신당했으면서 결국 찾는 건 또 사람이다.
그 모순이 우스우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게는 사람이 필요했다.
티어드롭 공작 영애가 아닌, 나도 쓸모 있는 존재라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 * *
“급히 차리느라 변변치 않습니다.”
“아냐. 이것도 충분히 맛있어 보이는걸. 잘 먹을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군요. 두 분이 식사하시는 동안, 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벨을 울려주십시오.”
그럼 편안한 식사가 되시길.
에이든은 고개를 꾸벅 숙여 예를 표한 후, 뒤로 물러났다.
이제 식당에 남은 사람은 나와 블러쉬, 단 둘뿐이었다.
“드시죠.”
“당신도 얼른 드세요. 기껏 준비해준 음식인데 식으면 아깝잖아요.”
차려진 음식은 대공이라는 직위에 걸맞지 않게 단출했다.
식전에 준비된 묽은 수프에 이어서 술 한 잔을 곁들인 스테이크가 오늘 식사의 전부였다.
하지만 딱히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수프를 전부 비운 후, 다음으로 준비된 스테이크를 썰기 위해 나이프를 들었다.
“…….”
수프는 문제없이 먹었기에 스테이크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입에 넣고 나니 구역감이 치밀었다.
스테이크에선 고기 누린내가 진하게 났다.
나는 고기를 입안에 문 채 흘끔 블러쉬를 곁눈질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고기를 씹어 삼키고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달콤한 벌꿀 향과 달리 입 안에 머금은 술은 너무나도 독했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목구멍이 홧홧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나는 웃으며 고기를 포크로 집었다.
두 번째 조각이라 해도 별반 다를 것 없이 누린내가 입안 가득 퍼졌지만, 이번에도 꾸역꾸역 삼켜 넘겼다.
고작 이런 일로 이방인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완벽하게 모나차르트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맛있네요. 덕분에 잘 먹었어요.”
오기로 접시를 전부 비우고서야 식사는 끝이 났다.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억지로 밀어 넣은 음식에 속이 메슥거렸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배도 채웠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죠.”
“성격이 급하시네요.”
“어차피 굳이 시간을 끌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장난으로 부인과 거래를 한 게 아닙니다.”
블러쉬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빈 잔을 채웠다.
술이 센 건지, 그는 연거푸 잔을 비우고도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셈이십니까.”
“아직 생각 중이에요.”
“모나차르트에 오면 대단한 걸 보여주겠다고 장담하신 건 부인이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블러쉬가 단호히 경고했다.
“물론 잊지 않고 있죠. 그게 저희 계약의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나는 슬쩍 블러쉬 쪽으로 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는 내 잔에 술을 채워주지 않았다.
“알고 계신다니 다시 한번 묻죠. 뭘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하여간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모나차르트의 가능성을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찾으셨습니까?”
마음에 드는 주제였는지 붉은 눈에 흥미가 서렸다.
“그렇기도 하고, 동시에 아니기도 해요.”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블러쉬의 두 눈썹 사이가 눈에 띄게 좁아졌다.
애매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검토 중이라는 뜻이죠.”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제야 검토 중이라고요?”
“선행 학습을 해오기엔 지금까지 외부에 알려진 모나차르트에 대한 정보가 현저히 적은 덕분이죠. 제겐 모나차르트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해요.”
“미래를 보신다는 분이 약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제가 볼 수 있는 건 굵직한 미래뿐이거든요.”
이 정도 변명은 미리 준비해뒀다.
나는 태연히 웃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너무 재촉하지 마세요. 솔직히 저희가 성에 들어온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잖아요?”
“그럼 그 대단한 결과는 언제쯤 볼 수 있는 겁니까.”
블러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도움이 있다면 좀 더 빨리 알 수도 있겠죠.”
나는 장난스럽게 술잔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조명 아래, 황금색 잔의 표면이 반짝거렸다.
“대신, 제대로 된 결과를 보여주셔야 할 겁니다.”
“그러죠.”
“대답이 너무 쉽군요.”
“그만큼 확신이 있거든요.”
나는 블러쉬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들이 부어진 알코올에 속은 여전히 불난 것처럼 뜨거웠다.
그렇지만 그 감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배 속에서부터 시작된 열기는 추위마저 잊게 했다.
“제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이곳에도 서고가 있다면 이용하고 싶어요.”
“그러도록 하죠.”
“제게 사람도 붙여주세요. 모나차르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래서 이곳의 사정을 무척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요.”
“노골적인 목적이군요.”
내 목적을 알아차린 블러쉬가 혀를 찼다.
나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보는 모든 일의 기본이잖아요.”
“좋습니다. 어차피 한 번 믿어보기로 했으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드리죠. 어려운 일도 아니니 바로 조치해드리겠습니다.”
쉽게 돌아온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다음 부탁도 들어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왕 부탁드린 김에 사람 하나도 찾아주셨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
“믿어보신다고 했으니 도와주셔야죠.”
나는 대놓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술기운 덕분인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넉살 좋은 웃음이 잘도 새어 나왔다.
“좋습니다. 그것도 해드리죠. 누굴 찾으시는 겁니까.”
“플렌 지오탈이라는 사람이에요. 최근까지 티티아나 상단의 유망주였던 인물이죠.”
“최근까지라는 부분이 걸리는군요.”
“죽었거든요. 습격당해서요.”
나는 두 손으로 잔을 감쌌다.
잔에 비친 여자는 애써 웃고 있었다.
“시신을 찾아달라는 겁니까?”
“그는 지난 5년간 티어드롭 공작 영애의 대리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자가 당했다?”
“지금의 티어드롭 공작 영애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정리가 필요했을 테니까요.”
죽음만큼 완벽한 침묵은 없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입 안에 남은 알코올 향이 유난히도 쓰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