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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2화 (12/204)

| 12화

12화. 슬퍼하기엔

“다 입으셨으면 내리십시오.”

“여기서 내려야하는 이유가 있나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기서부터는 말을 타고 갈 수 없다고.”

“말이 아니라면, 혹시…….”

나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이내 두 손을 모았다.

모나차르트인들만이 사용한다는 특수한 이동 수단을 드디어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얼른 가죠.”

“…….”

나는 습관처럼 블러쉬를 올려다봤다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아…….”

내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블러쉬를 보자 새삼스레 정신이 번쩍 들은 탓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아무것도.”

나는 재빨리 대답하고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수도에는 신사가 마차에서 먼저 내려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게 예의였지만 이곳은 수도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는 내가 알고 있던 당연한 것들이 아니게 되는 순간들이 더 많이 찾아올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새삼스레 앞길이 막막해졌다.

‘나, 잘할 수 있으려나.’

한숨을 푹 쉬려던 내 눈에 거대한 짐승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민하던 것도 금세 잊고 페잔의 옆으로 갔다.

“이 짐승은 뭐야? 무척 신기하게 생겼네.”

“순록을 모르십니까?”

“응. 처음 들어봐.”

“하긴, 수도에선 보통 말을 타고 다니죠.”

“이곳에서 수도처럼 말을 타고 다니면 얼마 가지 못하고 다 함께 얼어 죽을 겁니다. 괜히 개나 순록을 길들여서 썰매를 끌도록 한 게 아니죠.”

옆에서 불쑥 끼어든 말라즈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자랑스레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이 독특하게 생긴 마차가 썰매겠네?”

“네. 그렇습니다.”

썰매는 마차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지만 바닥 부근에 바퀴 대신 앞이 들린 판자가 달려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신문물이 신기해 몇 번이고 썰매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슬쩍 순록을 바라봤다.

썰매도 썰매지만, 사실 거대한 짐승 쪽이 조금 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만져봐도 될까?”

“상관없긴 하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예민한 동물이거든요.”

“알았어. 조심할게.”

나는 충고를 마음속 깊이 새기며 순록에게 손을 뻗었다.

거대한 덩치와 큰 뿔이 위협적으로 느껴졌지만, 손에 닿은 체온이 따뜻해 무섭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몸이 되게 좋네. 되게 단단해. 힘도 무척 셀 것 같은데, 맞아?”

“괜히 남자한테 좋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닐 정도로 세죠. 원하시면, 제가 두 분의 결혼 선물로 한 마리 잡아서, 아악! 왜 때려!”

“대공비께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 거다.”

“필요 없긴! 그게 부부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잘 떠들던 말라즈의 목소리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덧 다가온 블러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전하께서는 순록이 없어도 잘하실 겁니다! 저번에 훈련할 때 보니까, 전하의 몸이 진짜-”

“페잔.”

“죄송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눈치를 살피던 말라즈가 애써 밝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퇴출을 명하는 블러쉬의 턱짓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 부하가 다소 방종 맞은 놈이라, 나중에 따끔하게 경을 쳐두죠.”

말라즈가 그대로 목덜미를 잡혀서 끌려가자마자, 블러쉬는 내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 예상과 달리, 그의 입술에선 쉽게 사과의 말이 나왔다.

“나쁜 뜻으로 말한 것도 아니라서 괜찮아요.”

무엇보다 지금 내겐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나는 순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짐승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울리지 않게 들뜬 모습이군요.”

블러쉬가 혀를 찼다.

“이런 짐승은 처음 보거든요.”

털이 북슬북슬한 순록은 수도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외형의 동물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순록들을 한 마리씩 살피며 상태를 체크했다.

거대한 순록은 온몸이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언뜻 봐도 웬만한 물건들은 거뜬히 끌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혹시 썰매는 이런 모양만 있나요?”

“이건 일반적인 썰매와는 좀 다릅니다. 사람을 운송하는 용으로 변형된 거죠.”

“그 말씀은 다양한 형태의 썰매가 있다는 거네요?”

“네. 모나차르트에선 필요에 따라 마차의 형태를 다양하게 변형해서 쓰고 있습니다.”

블러쉬의 말대로라면, 원하는 형태의 썰매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계속되는 질문이 성가실 법도 한데도 의외로 블러쉬는 성실하게 대답을 해줬다.

“그럼, 순록이 끄는 썰매는 구하기 쉬운 편인가요?”

“모나차르트에선 가정마다 썰매를 끕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면 썰매 끄는 법부터 배우게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그러면 더욱 좋네요.”

“좋다고요?”

블러쉬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썰매가 보급되어있다는 건 그만큼 썰매를 끌 사람이 많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글쎄요.”

나는 싱긋 웃었다.

괜찮은 계획이 떠올랐지만 아직은 알릴 때가 아니었다.

내겐 끝없이 이어진 설원의 땅이 어색했다.

아직은 이곳과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 * *

“이쪽입니다.”

대공이 돌아온 날이었음에도 모나차르트 성은 고요했다.

나는 옷깃을 단단히 여미면서도 블러쉬의 뒤를 쫓았다.

성안으로 들어섰음에도 서늘한 공기는 변함없었다.

모나차르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춥고 삭막했다.

“추우십니까?”

“수도의 겨울은 이렇게까지 춥지 않거든요.”

“축복받은 땅인 거죠. 정작 그곳에 사는 인간들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이라는 걸 모르지만 말입니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블러쉬의 말에선 가시가 느껴져 나는 잠시 말을 삼켰다.

그가 의도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그저 습관 같은 것이었다.

블러쉬가, 아니 모나차르트가 품고 있는 분노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뿌리가 깊은 듯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오시는 동안 불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짜증 나는 황실 놈들의 낯짝을 보고 있는 것보단 낫지.”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잔소리할 생각은 그만해.”

블러쉬는 짧게 한숨을 쉰 후,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제야 그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집사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인사하시죠. 모나차르트 성을 관리하고 있는 총괄 집사 에이든입니다.”

“에이든 필슨입니다.”

“반가워요, 에이든. 저는 심포니아라고 해요.”

“비 전하에 관해선 이미 들었으니 부디 말씀 낮추시고, 편히 대해주십시오.”

머리가 새하얗게 센 노령의 집사가 내게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에이든의 인사를 받았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하는 말씀입니다.”

에이든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뭐 하나 흠잡을 것 없이 깔끔한 몸짓이었다.

“그나저나 두 분 모두 아직 식사 전이시지요? 괜찮으시다면, 요리장에게 음식을 준비해두라 일러두겠습니다.”

“음식보다는 목욕을 먼저 하는 편이 좋겠군.”

블러쉬가 내 쪽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움츠러든 내 어깨를 향해 있었다.

“그렇다면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리 방을 정리해둔 참이거든요.”

에이든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히 손짓했다.

그는 등을 보이기 전까지도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그 미소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연륜으로 잘 감췄을 뿐이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노집사의 시선에는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블러쉬의 뜻에 따르면서도 내심 수도 출신 대공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서운하진 않았다.

편견과 차별의 시선은 앞으로 내 일상이 될 터였다.

이 정도로 슬퍼하기엔 아직 일렀다.

* * *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나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내며 나른한 숨을 뱉었다.

모나차르트로 들어선 순간부터 항상 뜨거운 목욕물이 간절했던 참이었다.

뜨끈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오래 씻으시는군요.”

“…….”

“왜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제 방에 와계실 줄은 몰랐거든요.”

“여긴 제 방이기도 하니까요.”

“……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반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는 서둘러 심호흡을 하고 곧장 말을 이었다.

“당신의 방이기도 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저희 같은 방을 쓰는 건가요?”

“부부가 침실을 공유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죠. 수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지만, 아까 분명 다른 곳으로 가셨잖아요. 그래서 전 당연히 모나차르트에서는 부부는 방을 따로 쓰는 줄 알았죠.”

“이 방에 딸린 욕실은 하나뿐이라, 저는 훈련장의 욕실을 썼을 뿐입니다.”

“아…….”

또, 문화가 다른 줄만 알았는데 그냥 배려였나?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군요.”

“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에요.”

미리 눈치챘다면, 좀 더 제대로 차려입고 나왔을 텐데.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충 여민 가운 끝을 만지작거렸다.

시중을 들던 하녀를 제외하곤 누군가에게 흐트러진 차림새를 보인 건 이번 처음이라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게 결혼을 먼저 운운하셔놓고 너무 놀라시는군요.”

“…….”

“정 불편하시면, 다른 방을 준비하라 하죠.”

“아뇨. 괜찮아요.”

잠깐 혼동이 왔을 뿐이지, 이미 각오는 충분히 다지고 왔었다.

후계는 귀족의 의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결혼한 이상, 손만 잡고 잘 순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무리 안 하셔도 됩니다.”

“솔직히 누군가와 같은 방을 써본 적이 없어서 낯설긴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잖아요. 저희가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닌데 얼른 익숙해지면 좋죠.”

“익숙이라…….”

블러쉬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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