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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1화 (11/204)

| 11화

11화. 남아있는 온기

“그걸로는 부인께서 요정의 힘을 가진 이유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생각 이상으로 집요하시네요.”

“궁금한 건 못 참는 터라.”

블러쉬가 고개를 살짝 세웠다.

나는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의자에 상체를 기댔다.

“요정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집 삼아서 깃든다는 이야기를 아시나요?”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정의 눈물을 가장 먼저 떠올렸어요.”

“요정의 눈물이라고 하면……, 티어드롭 대대로 내려오는 목걸이로군요. 다이아몬드가 수백 개 박혔다고 하던가?”

“정확히는 666개예요. 무려 3,000캐럿짜리 목걸이죠.”

“듣기만 해도 비쌀 것 같군요.”

“비싸죠. 티어드롭 대대로 물려주는 가보라는 명성까지 더해지면 가격을 매길 수도 없을걸요. 그 덕분에 목걸이라는 역할 대신, 장식품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거고요.”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아직도 처음 요정의 눈물을 처음 봤던 순간을 기억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는 몰랐음에도 목걸이에 시선을 빼앗겼다.

크고 작은 다이아몬드를 일일이 엮어서 만든 목걸이는 어린 내게 내 눈에도 너무나 예뻐 보였다.

요정의 눈물을 목에 건 채로 데뷔탕트를 치르는 꿈까지 꾼 적이 있었다.

“그래서, 부인의 힘과 요정의 눈물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그다음은 뻔하죠. 요정의 눈물을 앞에 두고 요정을 부르는 주문을 썼어요.”

“요정의 눈물에 진짜 요정이 깃들어있었던 겁니까?”

“놀랍게도 요정을 부르는 주문은 진짜였고, 저 말고는 요정의 눈물에 감히 그런 시도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덕분이었죠.”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꺼내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요정은 지금 어딨습니까? 아직도 있습니까?”

“있었죠.”

“과거형로군요.”

“제가 바보 같은 선택을 했거든요.”

나는 쓰게 웃었다.

지난 내 미래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선택의 대가로 나는 오랜 친구를 잃어야 했지만, 덕분에 친구는 내가 겪은 비극에 휩쓸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당신이 뭘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서 요정의 힘은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제 기사를 이기지 않으셨습니까.”

“제대로 싸웠다면 졌을걸요.”

“겸손하시군요.”

“사실을 말한 거예요. 애당초 당신의 기사가 제게 패배를 선언했던 건 방심했던 스스로에게 실망했기 때문이었는 걸요. 절 죽일 의사도 없었고요.”

내 대답에도 블러쉬는 영 만족을 못한 눈치였다.

나는 그를 빤히 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사내의 손은 막상 잡아보니 예상보다 훨씬 더 딱딱했다.

눈을 감고 만지면 쥐고 있는 게 돌멩이인지, 사람 손인지 헷갈릴 것 같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차라리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블러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빨리 주문을 읊었다.

그러자, 마차 바닥에서 자라난 덩굴이 마치 수갑처럼 그의 손목을 결박했다.

“한 번 풀어보세요.”

얼떨결에 수갑이라도 차듯 두 손목을 묶인 그가 미간을 좁혔다.

줄기가 질긴 편이긴 해도 그의 힘이라면 어렵지 않게 풀 정도였다.

“작물을 키우는 목적으로는 괜찮지 않습니까?”

“노력하면, 꽃 몇 송이 정도는 피울 수 있긴 하죠.”

“그게 다입니까?”

“빠르게 성장한 만큼 금방 시들거든요. 오래 두고 보긴 어렵죠.”

나는 검지 끝으로 블러쉬의 손목에 감긴 줄기를 톡톡 건드렸다.

요정의 힘은 효력이 긴 편이 아니었다.

지금 불러낸 줄기도 조금만 지나면 금세 시들어버릴 것이었다.

“요정의 힘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어린애 장난 같군요.”

묶인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블러쉬가 짧은 평을 내놨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부분의 요정은 장난 좋아하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어요. 그리고 그들의 힘 역시, 마찬가지죠.”

“…….”

“실망하셨나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블러쉬는 묶인 손목을 풀 생각은 안 하고 날 빤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것보다는 의외라고 생각 중입니다.”

“의외요?”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해주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괜히 부풀려서 말했다가 너무 기대하게 만드는 것도 곤란해서요.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잖아요.”

“돌덩이에도 그럴싸한 말을 붙여서 파는 게 장사 아닙니까.”

“그건 장사가 아니라, 사기죠.”

“…….”

그리고 저는 사기꾼이 아니라, 당신의 동업자고요.”

나는 다시금 블러쉬의 손목에 손을 뻗었다.

그는 딱히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라 해도 내가 신경 쓰였다.

내겐 애꿎은 사람을 묶어놓는 취미 같은 건 없었다.

“급한 건 없으니 하나씩 천천히 해요. 서로 간의 신뢰를 쌓는 데에 비싼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대충 중얼거리며 줄기를 푸는 일에 집중했다.

다행히 줄기가 칭칭 감겨있는 거라서 묶인 손목을 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기대라면 상관없지 않나요.”

“절 만족시켜주실 수 있을지 걱정도 안 되시나 보군요.”

“완전히 믿지도 않은 상대에게 기대해봤자 얼마나 하겠어요.”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친 시선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우리 지금 너무 가까운 것 같지 않나요.”

“뭐 어떻습니까. 부부 사이에.”

여전히 탐색하기 바쁜 시선을 하고는 부부 사이 같은 소리를 잘도 하네.

나는 차마 뱉지 못하는 말을 삼키며 빤히 블러쉬를 올려다봤다.

상대가 궁금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블러쉬라는 사내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보통 제가 이렇게 바라보면 먼저 눈을 피하곤 하는데.”

“상대에게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었나 보죠.”

“부인께서는 아니시고요? 제가 보기엔 누구보다 비밀이 많아 보이시는데.”

“당연히 비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비밀 한두 개쯤은 품고 사는 법이잖아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블러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한 채 싱긋 웃었다.

“당신이 절 믿어준다면, 제가 먼저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죠.”

“말로는 뭐든 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그럴 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저도 제가 아는 어떤 이들과 다를 바 없어지거든요.”

“…….”

“그럼 제가 먼저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쩌긴요. 저는 그날부로 끝인 거죠.”

일순간 블러쉬의 눈에 힘이 풀렸다.

“목숨 걸고 저를 찾아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나는 죽은 후에 과거로 돌아왔다.

어쩌면 다음번에도 이런 기회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게 무수히 많은 기회가 남아 있다고 한들, 내겐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지쳐있었다.

버틸 자신 같은 건 없었다.

그걸 알기에 나는 더 절실했고, 또 그만큼 미련이 없었다.

벼랑 끝에 섰다는 건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언제든 도망칠 구석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 * *

“벌써 모나차르트에 도착한 건가요? 생각보다 빠르네요.”

“아뇨. 도착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그런데 왜 다들 내릴 준비를 하는 거죠?”

“지금부터는 말을 타곤 갈 수 없으니까요.”

블러쉬는 짧게 대꾸하고는 마차 문을 열었다.

문이 조금 열렸을 뿐인데, 훅 파고든 한기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추우십니까?”

“참을 만해요.”

블러쉬의 눈이 천천히 내 머리부터 발끝을 훑어내렸다.

나는 괜히 멋쩍어 곧장 입을 뗐다.

“북부의 추위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예요.”

“모나차르트의 땅은 제대로 밟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씀은 혹시, 앞으론 더 추워진다는 말씀이신가요?”

블러쉬는 대답 대신,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내게 내밀었다.

“걸치십시오.”

“당신도 춥잖아요.”

“안 춥습니다.”

블러쉬는 단호히 말하며 또 한 번 내게 외투를 내밀었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나와 달리, 블러쉬는 외투를 벗었음에도 아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외투를 건네받았다.

“걸치고 계시면 좀 나을 겁니다.”

“외투가 너무 크고 길어서 바닥에 끌릴 것 같은데 괜찮나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일행 중 부인만큼 작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누굴 걸 입어도 그럴 겁니다.”

저건 무시인가, 아니면 배려인가.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블러쉬를 노려봤다.

별 표정 없는 그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지만, 어쩐지 기분은 울적해졌다.

나도 나름 수도에서는 큰 편이었는데, 일행들이 워낙 체격이 좋아 비교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더 추워질 텐데, 안 입으실 겁니까?”

“아뇨. 입을 거예요.”

지금은 자존심 내세울 때가 아니지.

모나차르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감기라도 걸리면 나만 손해잖아.

나는 서둘러 블러쉬의 외투를 걸쳤다.

예상했던 것처럼 외투는 끝이 질질 끌리긴 했지만, 그래도 한 겹 더 껴입었다고 아까보단 따뜻했다.

외투에는 여전히 원래 주인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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