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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0화 (10/204)

| 10화

10화. 부부간의 존중

* * *

“아쉬운 건 없나.”

“없어요.”

덤덤히 대꾸하고 마차에 올랐지만, 수도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나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티어드롭 저택은 수도에서 황성 다음으로 크고 웅장해서 굳이 보지 않으려 해도 쉽게 눈에 들어왔으니까.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그냥 그렇게 바라보게 될 뿐이었다.

“어제, 티어드롭 후계자를 알리는 파티가 열린 걸 알아?”

“네. 들었어요.”

“소감은 그것뿐인가?”

“그 이상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나는 여전히 창문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애당초 블러쉬와 나는 감정을 공유하며 슬픔을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최근 몇 년간 티어드롭 공작가의 주요 일들은 티어드롭 영애가 주도한 일이라는 것까지 밝혀지면서 다들 그녀를 주목하고 있다고 하던데도?”

“…….”

“억울하지 않아?”

“억울하지 않아요.”

“정말?”

“어찌 되었든 간에 제게 티어드롭 공작의 비호 아래 살며, 많은 걸 누린 건 사실이니까요. 이제야 그 값을 치렀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들끓는 속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나는 속내를 삼켜내며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내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알지 못해서 더욱 속이 쓰렸다.

그들은 방해물이 사라졌다 생각하며 행복하고 있을 텐데, 정작 나는 완벽하게 그들을 잘라내지 못한 것 같아서.

“대단할 정도로 이성적이군.”

“그러지 않으면 도태될 뿐이니까요.”

나는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감정을 감췄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굴 때가 아니었다.

감정은 최대한 죽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였다.

“내가 보기엔 넌 도태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저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세요?”

“티어드롭 공작 영애의 업적을 들었지.”

“…….”

“최근 갑자기 나타난 진짜 영애께서 몇 년 전들을 했을 리 없으니, 당연히 그건 그동안 그 자리를 채우고 있던 사람이 한 거겠지.”

계속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얼굴에 느껴지는 집요한 시선은 포기를 몰랐다.

결국, 나는 속으로 포기를 선언하며 고개를 돌렸다.

승리를 거머쥔 사내의 입가에는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짜를 위해 업적을 만들었을 수도 있죠.”

“그러기엔 조금 전 그쪽 반응이 너무 덤덤해서.”

“절 떠보신 건가요?”

“가치를 가늠해본 거지. 내가 산 물건이 정말로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는지 말이야.”

사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그 사실이 좀 의외였다.

“그래서 만족하셨나요?”

“솔직히 많이.”

“…….”

“왜 그러지?”

“그런 말씀을 해주실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서요.”

“일단 같은 배를 탔으니 이제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도 없잖아.”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블러쉬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안심하기엔 나는 아직도 붕대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궁금해지기도 했고.”

“뭐가 궁금하신데요?”

“그쪽.”

내려다보는 시선에서 감출 수 없는 오만함이 엿보였다.

“제 어떤 점이 궁금하신데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 페잔을 이긴 힘부터 시작하면 좋겠는데.”

“저한테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신지 몰랐네요.”

처음 만났을 때는 나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굴더니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다니.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블러쉬를 흘겨봤다.

“손에 들어오기 전까진 욕심을 감추는 편이 유리하거든.”

“그러면, 저도 그래야겠네요.”

“뭐?”

“제가 원하는 걸 주시면,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나는 블러쉬가 한 것처럼 오만하게 웃었다.

우리의 결혼은 이미 승인되었다.

블러쉬를 적대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의 눈치를 살피며 설설 길 이유도 없었다.

“원하는 게 뭐지?”

“호칭이요.”

“호칭?”

“저는 이제 전하의 아내고 모나차르트의 대공비죠. 그에 따른 대우를 해주세요.”

“대우?”

블러쉬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제가 요구한 건, 전하의 아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와 의무고, 부부에겐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죠.

“그래서?”

“저를 부를 때, 말을 낮추지 마세요. 전하께서 절 함부로 대하신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테니까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당신 아내니까. 그리고, 당신이 내 남편이니까.”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양 입술을 끌어 올렸다.

“내가 못 하겠다면?”

“그럼 나도 그럴게.”

“…….”

미소를 지운 채, 그저 사내를 바라봤다.

미세하지만 블러쉬의 눈가가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이내 도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깍지 낀 손을 허벅지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당신이 절 존중하고 그에 맞게 대우해주신다면, 저도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시겠다면 저 역시 그럴 뿐이에요.”

부부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사이였다.

그는 더는 내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것에 홀려가지곤.”

블러쉬는 깊은 한숨과 함께,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드러난 그의 이마가 반듯하니 보기 좋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도로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수도를 완전히 벗어난 건지, 창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 광활한 평야만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멀리 나와 본 건 처음이네.’

아버지는 내 존재가 부각되지 않길 바랐기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티어드롭 저택에서만 보냈다.

티어드롭 저택은 물론, 아예 수도를 벗어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괜히 기분이 미묘해졌다.

물론, 그 기분은 예상치 못하게 들린 목소리에 금세 잊혔지만.

“……부인.”

“네?”

“제가 이런 식으로 말씀하길 원하신 게 아닙니까. 부인.”

“아…….”

방금 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가 아는 사내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블러쉬를 발견하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사내는 노골적으로 하기 싫다는 티를 역력하게 내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목소리는 자연스러웠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목소리 자체가 워낙 좋아서 질색하고 있는 표정만 보지 않는다면 설렜을지도 몰랐다.

“……왜 웃는 거지?”

“잘 어울려서요.”

“이딴 게?”

블러쉬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숙녀를 존중하는 건 신사의 미덕이죠.”

나는 웃음을 갈무리하려 애쓰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신사의 미덕은 무슨.”

“하지만 저는 아까보다 지금이 훨씬 좋은걸요.”

“……이런 게 좋다고?”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지만 차츰 신경 쓰다 보면 금세 입에 붙으실 거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런 소리는 됐고, 얼른 말해.”

나는 대답 대신, 손바닥으로 내 입술을 가리켰다.

그러자, 겨우 풀렸던 순간, 블러쉬의 얼굴이 도로 일그러졌다.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내게까지 들렸지만 나는 모른 척하며 웃었다.

악명만 들었을 때는 걱정했는데, 눈앞의 사내는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는 모양이었다.

“제 힘은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게 진짜 마법이라면 대단한 것일 텐데요.”

“실망시켜드린 것 같지만, 제 힘은 마법은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블러쉬가 다소 아쉬운 듯 엄지로 턱 끝을 매만졌다.

“오래된 가문들이 다들 그렇듯, 티어드롭에도 유명한 전설이 있잖아요?”

“요정의 혈통을 말하는 겁니까?”

오래된 가문들은 다들 전설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는데, 티어드롭의 경우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부터가 요정의 날개를 본떠서 만들 정도로 요정과 관련된 전설이 많았다.

“네. 맞아요. 제 힘은 그 요정과 관련된 거예요.”

“요정의 힘은 티어드롭의 핏줄에게만 주어지는 힘이 아닙니까?”

블러쉬가 빤히 나를 바라봤다.

굳이 뒷문장을 말하지 않아도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티어드롭도 가지지 못한 힘이죠. 고대의 힘 같은 건, 이젠 전설에 불과한 힘일 뿐이니까요.”

정말로 특별한 힘이 존재했는지는 모르나, 이제 전설은 진실이라기보단 가문의 권위를 높여 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더 이상하군요. 그럼 부인께서는 어떻게 그 힘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어린 소녀는 항상 최고가 되고 싶어 했고 스스로가 티어드롭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거든요.”

“…….”

“티어드롭 저택에 있는 오래된 책을 읽었어요. 고대의 힘 같은 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린애답게 마법 같은 일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죠.”

티어드롭은 내게 있어서 자랑이었기에, 티어드롭다운 힘을 갖고 싶었다.

요정의 힘이 내 세대에서 부활한다면 그야말로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성공했음에도 아버지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크게 화를 냈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칭찬만 쏟아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아버지가 내가 한 일을 비난하며 책망한 것은.

떠오르는 기억에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뜨거운 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왜 내게 화내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다신 이 힘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외치며 용서를 빌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화를 낸 것도, 힘을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한 것도 결국 같은 이유에서라는 걸.

‘내가 티어드롭의 힘을 훔친 도둑같이 느껴졌던 거겠지.’

나는 힘없이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과연 진짜 샤리에트가 요정의 힘을 손에 넣었다 해도 아버지가 화를 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찰나였지만, 나는 그날 화를 내던 아버지의 표정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단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건 딸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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