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6화. 짐승의 눈을 한 사내
“저는 이곳에서까지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시면 없었던 일로 해드리죠.”
“배려는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어쩐지 피하는 게 꽤 쉽다 싶었더니, 역시 봐준 모양이었다.
애초부터 사내는 나를 자신의 적수로 생각하지 않았느니 말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이제 더는 봐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는 창을 쥔 자세를 바꿨다.
그는 아까보다 훨씬 호전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나는 달려드는 사내를 피하며 짧게 주문을 읊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굵은 나무줄기가 튀어나왔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에 결국 한쪽 발목이 잡히고야 말았다.
“이게 무슨……!”
놀란 사내가 나무줄기를 거칠게 뜯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한 번 얽혀 들어간 나무줄기는 그가 뜯어내는 것보다 빠르게 그의 몸을 휘감았다.
“이러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싸울 수 없겠죠.”
나무줄기에 꽉 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살아난 이후, 샤리에트의 음모에 빠져 잃어버렸던 내 힘도 돌아온 터였다.
“당신, 마법사였습니까?”
사내가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
그와 제대로 맞붙었다면 이기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가 방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방심한 틈을 노려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저는 꼭 전하를 만나야 해요.”
“사과하지 마십시오. 패자에게 사과하는 승자는 없습니다.”
“당신이 방심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거예요. 저는 싸우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거든요.”
후계자 계승을 위해 검술과 체술 정도는 기본 소양으로 익혔지만, 그건 정말로 기본 수준이었다.
내가 싸우는 쪽으론 재능이 없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제가 방심했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건 당신이 이겼고 제가 졌다는 사실이니까요.”
사내가 표정을 풀고 긴 한숨을 뱉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그를 붙잡고 있는 줄기를 없앴다.
나무줄기는 서서히 크기가 줄어 처음 바닥에서 튀어나왔던 것처럼 땅속으로 들어가 영영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전하를 만나게 해주시는 건가요?”
“네. 약속은 약속이니, 만날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무줄기가 사라졌음에도 사내는 연신 땅 쪽을 보며 인상을 썼다.
패배를 인정하긴 했어도 고작 나무줄기에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혹시 지금 바로 전하를 만날 수 있을까요?”
“네. 지금 바로 보고를 올린 후, 만나실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다행이네요.”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뱉었지만 긴장을 완전히 풀진 못했다.
한고비는 넘겼다 해도 내겐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아 있었다.
* * *
“페잔 녀석이 졌다고 하길래 얼마나 대단한지 구경 왔는데 썩 강해 보이진 않네? 이봐, 괜찮으면 그 모자 좀 벗어보겠어? 모나차르트의 문지기를 상대한 작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한번 해봐야겠어.”
“입조심해라. 이분은 이제 전하의 손님이시다.”
“바보같이 져서 가뜩이나 피곤한 전하께 일거리를 늘린 부하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말라즈, 네놈은 기사가 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저잣거리의 말투를 버리지 못한 것이냐.”
금방이라도 싸울 듯이 투닥거리는 두 사내를 곁눈질로 구경하며 나는 애꿎은 차만 홀짝거렸다.
결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나차르트 대공과의 대면 약속이 잡힌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낯선 공간에 혼자 뚝 떨어진 기분이라 도무지 긴장이 풀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다고 해서 달라진 건 크게 없었다.
모나차르트 대공이 어떤 사람이든 어차피 나는 그와 같은 배를 타야 했으니까.
하지만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만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얼른 그와 만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똑똑-
그때였다.
“들어가지.”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오셨습니까, 전하.”
문이 열리자마자, 두 사내 모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나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모나차르트 대공에 대한 예를 갖췄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모차나르트 대공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혀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녀석인가? 페잔을 이겼다는 녀석이.”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애꿎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소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낮게 울리는 목소리는 듣기 좋단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라고 하던데?”
“…….”
“벙어리인가?”
“……아닙니다.”
“여자?”
모나차르트 대공이 말끝을 살짝 올렸을 뿐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확신할 순 있었다.
모나차르트 대공은 타고난 지배자였다.
그에게는 좌중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페잔을 이긴 게 여자라고요? 그럴 리가요. 아무리 저자가 삐쩍 말라 보이긴 해도 여자는…….”
“둘 다 나가서 대기하도록.”
모나차르트 대공은 귀찮다는 듯한 어투로 부하의 말을 끊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두 사내가 자리를 뜬 후에야 모나차르트 대공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채 침묵만을 유지했다.
“할 말이 있어서 날 보러 온 것일 텐데?”
“그게…….”
“이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거라면 나는 그만 돌아가지.”
“아뇨! 그러지 마세요!”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처음으로 마주친 모나차르트 대공의 얼굴은 내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고개를 까닥거릴 때마다 이마를 쓸어내리는 머리카락이 유난히도 새카맸고, 그 아래로는 그려놓은 듯한 날렵한 턱선이 엿보였다.
짙은 눈썹 아래에서 자리 잡은 핏빛 눈동자는 소문처럼 동공이 가늘어 짐승을 연상케 했지만 흔히들 말하던 야만인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이 사냥감을 목전에 둔 맹수를 닮아 있단 생각이 들 뿐이었다.
‘소문이랑 맞는 게 하나도 없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과장된 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너무 닮지 않아서 당혹스러울 정도로 모나차르트 대공은 그를 둘러싼 그 어떤 소문과도 닮아 있지 않았다.
소문과 흡사한 건 고작해야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 정도일 뿐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보지 그래. 무슨 일이기에 내 문지기를 쓰러트리면서까지 날 만나러 온 건지.”
물론 그 칙칙해 보이는 모자는 벗은 후에.
모나차르트 대공이 고개를 삐딱하게 세우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어설픈 손짓으로 모자를 벗었다.
“진짜 여자로군.”
“제가 여자라는 게 문제가 되나요?”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모나차르트 대공은 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한 치의 손색없이 말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으나, 빈말이라도 그가 신사 같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모나차르트 대공이 정말로 신사였다면 저런 짐승 같은 눈을 할 리 없었으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어떤 용무 때문에 날 보자고 한 거지?”
“전하께 팔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입니다.”
“내게 팔 물건이 있다고? 그게 뭐지?”
사내의 날카로운 시선은 금방이라도 나를 찢어버릴 듯해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럼에도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려고 애썼다.
“전하의 계획을 앞당겨줄 물건입니다.”
“내 계획?”
“전하께서 이것을 사신다면, 못해도 삼 년 안에는 전하의 계획을 이루실 겁니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모나차르트 대공이 턱을 괸 채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딱 봐도 그는 내게 별다른 기대를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빠르게 심호흡을 한 후, 곧장 말을 이었다.
지금은 최대한 모나차르트 대공의 흥미를 자극해야만 했다.
“저는 지금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목숨?”
“전하의 계획은 결코 새어나가면 안 되는 것이니까요.”
이 거래를 제안한 순간부터 내 운명은 정해졌다.
모나차르트 대공이 준비하고 있는 건 소꿉장난이 아니었다.
계획을 언급한 나를 순순히 보내줄 리 없었다.
결국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죽거나, 살거나.
“그걸 알면서도 내게 거래를 청하겠다?”
“네.”
“왜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다행히 모나차르트 대공은 내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긴장을 놓을 순 없었다.
“제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살기 위해서? 이상한 말을 하는군.”
“샤리에트 블랑 티어드롭.”
고작 이름일 뿐인데, 뱉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썼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며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티어드롭 공작의 여식 이름이군.”
“한때, 제 것이었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티어드롭 공작의 딸이 실종되었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꽤 유명한 사건이었으니 당연히 기억한다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모나차르트 대공에게 모든 걸 걸기로 했다.
나는 내가 보인 바닥이 그에게 신뢰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그때 티어드롭 공작은 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그 딸이라도 된다는 건가?”
모나차르트 대공의 눈에 의심이 서렸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다면 뭐지?”
“저는 공작의 가짜 딸입니다.”
순간의 자존심에 어설픈 거짓을 뱉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눈빛부터가 집요한 사내였다.
거짓을 말해봤자, 어떻게서든 내 뒤를 캐서 진실을 알아낼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숨김없이 드러내고 신뢰를 얻어내는 편이 나았다.
“스스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공작은 당시 아픈 아내를 위해 가짜 딸을 만들었고 그 딸을 친딸처럼 키웠습니다.”
“그게 너라는 건가.”
“네.”
“그렇다면 더 이해가 안 되는군. 티어드롭 공작 영애 정도면 가짜도 분에 넘치지 않나? 내가 알기론 공작은 꽤나 제 딸을 아낀다고 들었는데.”
“최근에 진짜 공작 영애가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진짜일지는 모르지만.
샤리에트의 정체에 대해선 일부러 침묵했다.
그녀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져 봤자, 지금으로선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을 테니까.
그런 건 싫었다.
나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으면 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감정을 죽이려고 했지만 역시 완전히 지우는 건 어려웠다.
덤덤하게 굴려고 했음에도 날 절망에 빠트린 이들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