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5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될 줄 알았는데.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샤리에트를 살폈다.
다소 부스스한 은발 머리, 고생한 듯 거칠고 살짝 그을린 갈색 피부, 잔뜩 겁먹은 녹색 눈동자. 그리고 남의 옷을 훔쳐 입은 양 헐렁거리는 옷 사이로 보이는 빼빼 마른 몸까지.
은발에 녹안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지금의 샤리에트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고 보니, 원래 샤리에트는 저런 모습이었지.’
나는 속으로 쓰게 웃으면서도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불쌍한 행색을 한 샤리에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의 샤리에트는 저렇게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저것마저도 연기였지만.
샤리에트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초라한 몰골은 물론, 부족한 예절도 모두 그녀가 계획한 바였다.
그녀는 결핍 어린 모습을 통해 동정표를 얻는 것으로 쉽게 무리 안에 들어오고자 했을 뿐이었다.
나는 가만히 샤리에트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샤리에트가 자신의 것을 빼앗아간 날 미워한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감정을 죽이고 그녈 바라보자, 꼭 그것만이 이유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샤리에트는 항상 지나칠 정도로 계획적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준비했을지도 몰랐다.
“아, 안녕하세요…….”
연신 분위기를 살피던 샤리에트가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려 애쓰며, 그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이렇게 오신 걸 보니, 선약이 있으셨나 봐요.”
“약,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저는 이 시간이 되면 가, 각하와 함께 차를 마시는데 오늘은 오지 않으셔서…….”
샤리에트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몸을 달달 떨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는 겁에 질린 초식동물처럼 보였다.
얼마나 연기를 잘하던지 그게 연기라는 걸 아는 나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제 볼일은 끝났으니 그만 가볼게요.”
나는 짧은 심호흡을 뱉은 후,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울먹거리는 샤리에트를 보고 있자니 급격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녀가 저런 식으로 나올 때마다 나는 항상 죄인이 된 기분에 빠져야 했으니까.
모든 걸 끝내기로 결정한 지금에서까지 그녀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가려는 거니?”
“네. 가야죠.”
“조심히 가렴.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네, 그럴게요.”
아버지는 진심으로 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안타까워하면서도 결코 날 잡진 않는 태도는 그것이 어쭙잖은 죄책감이라는 걸 보다 분명하게 했을 뿐이었다.
“버, 벌써 가시게요?”
“네.”
“좀 더 있다 가셔도 되는데…….”
샤리에트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아뇨. 괜찮아요. 제 볼일은 끝났거든요.”
나는 샤리에트를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나를 탐색하는 동그란 눈을 무시하며 태연히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부디 그녀의 눈에 비친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길 간절히 바라면서.
* * *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로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영영 저택을 떠나는 것임에도 내 짐은 단출했다.
옷 몇 벌과 잡동사니를 넣어둔 트렁크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가져가라고 했지만 무엇도 욕심나지 않아 정말 필요하다 싶은 걸 제외하곤 전부 놓고 온 터였다.
‘처음 저택에 올 때만 해도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음을 다 잡아보려고 했지만, 지금껏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상황에서 그런 게 쉽게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상, 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내게 있어서 이것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됐다.
나는 저 멀리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의 상징인 모나차르트의 문장을 보며 거칠게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두려운 건 없었다.
뭔가를 잃을까 두려워하기엔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벼랑 끝에 서 있었다.
* * *
“엄마, 저게 야만인이야?”
“저쪽은 보지도 마렴. 괜히 병이라도 옮을지 몰라.”
“야만인들이 저렇게 당당히 수도에 있다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초행길이었음에도 모나차르트 대공이 머물고 있는 저택까지 찾아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굳이 모나차르트 대공 저택의 위치를 묻지 않아도 근처만 가도 사람들은 북부인들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기 바빴으니까.
‘그나저나 저 사람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네. 분명 사람들이 하는 소리들이 다 들릴 텐데. 덤덤한 건가, 아니면 익숙한 건가…….’
나는 덤덤히 저택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커다란 몸집과 유난히도 창백하고 새하얀 피부.
전형적인 북부인의 모습이 엿보이는 사내는 옷차림마저 이국적이라 아무리 봐도 수도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슬쩍 주변을 살핀 다음,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걸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나를 막아섰다.
별다른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은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게만 들렸다.
“모나차르트 대공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얼굴을 가린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북부인과의 대화 자체가 눈요깃거리였는지 벌써부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대공 전하와 따로 약속하셨습니까?”
“따로 잡은 약속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에요. 실례라는 걸 알지만, 대공께 한 번만 언질을 해주실 수 있나요?”
북부는 타지방들과 달리 유난히 폐쇄적인 집단으로, 만남은커녕 한 번 연락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 때문에 나는 지금껏 계속해서 모나차르트 대공과 연락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뭡니까.”
“이렇게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전하를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해요.”
“그렇다면 더욱 안 되겠군요. 죄송하지만 이만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돌아가라고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않습니다. 그게 규칙입니다.”
사내는 들고 있던 창으로 입구를 막으며 또 한 번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중요한 일이에요.”
“정말로 그 일이 중요한 것인지 제겐 판단한 권리가 없습니다. 정 원하면, 대공 전하와 공식적으로 만남을 약속하십시오.”
“연락이 어려워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그 역시, 제가 알 바가 아닙니다. 저는 이곳의 문지기로서 입구를 지킬 뿐입니다.”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 사내에게선 일말의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전하와의 약속을 잡을 수 있죠?”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전하께 보고가 올라갈 겁니다.”
“그렇다면 연락처를 남기도록 하죠. 만남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모릅니다. 저는 보고를 올릴 뿐입니다.”
사내가 기계적으로 답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대공께서는 조만간 수도를 떠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네. 그렇습니다.”
쉽게 나온 사내의 대답과 달리,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많은 말들이 오고 간다 해도 결국 모나차르트 역시, 제국의 땅이었다.
제국에 있는 네 명의 대공들에게는 매년 한 번씩 수도를 방문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이번 주야말로 의무를 행하는 주였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모나차르트 대공을 만나게 되는 건 북부로 직접 가야 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상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북부는 교통수단조차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혹한의 땅이었다.
북부인들이야 특별한 방법으로 수도를 오고 간다고 하지만, 그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나로선 북부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모나차르트 대공 일행이 수도에 왔을 때, 그와 만나야 했다.
“그 말씀은 하염없이 대공 전하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으란 소리인가요?”
“만남을 허하시는 건 대공 전하의 판단이지, 제 판단이 아니니까요.”
“그럼 전하께서 만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북부로 돌아가시면요?”
“그렇다면, 그 후를 기약하셔야겠죠.”
“…….”
대공이 수도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일주일.
그 안으로 답이 오지 않는다면, 나는 꼼짝없이 일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제겐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요?”
“저를 쓰러트리면 됩니다.”
“……당신을 쓰러트리라고요?”
“그게 아니라면, 기다리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자신을 쓰러트리라는 말을 쉽게 뱉는 사내에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북부인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결투로 원하는 걸 얻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쉽게 대답한 사내와 달리, 선뜻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내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얼핏 봐도 알 수 있었다.
체격만 놓고 봐도 확연히 차이가 났지만, 무엇보다 사내의 눈빛은 매순간 날카로웠다.
저런 건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눈이었다.
저 사내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냉혹한 삶을 살았을 테고, 그만큼 강할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제가 여기서 당신을 이기면, 대공 전하를 바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네. 가능하시다면요. 제 목숨을 걸고 만나게 해드리지요.”
내가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한 건지 사내는 쉽게 장담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켠 채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싸울게요.”
“……진심이십니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를 만나야 해요.”
설령 그게 목숨을 거는 일이라 해도.
고집스럽게 노려보는 내 시선에 사내의 매끄러운 미간이 좁혔다.
“원하시면 결투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하게 아셔야 할 겁니다.”
“그게 뭐죠?”
“패배하는 순간, 당신이 하는 모든 행위가 모나차르트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될 겁니다. 무례를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승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니 말입니다.”
경고를 담은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였다.
“그 말씀은 이기면 전부 괜찮다는 거군요?”
“당신은 절 이기지 못합니다.”
사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나는 싱긋 웃으며 반박했다.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더 후회할 거예요.”
“……좋습니다. 도전을 피할 이유는 없으니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죠. 무기를 드십시오.”
사내는 등에 메고 있던 창을 뽑아 들었다.
구불거리는 칼날이 달린 창은 수도에선 처음 보는 무기였다.
“제겐 무기가 필요하지 않아요.”
“자만은 화를 부를 뿐입니다.”
사내가 높게 창을 들어 그대로 바닥에 꽂는 순간, 쾅하고 바닥이 울렸다.
그의 창이 꽂힌 돌바닥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다행히 피하긴 했지만, 저런 걸 직통으로 맞았다면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