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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4화 (4/204)

| 4화

4화. 불쌍한 샤리에트

“오해하지 마렴. 샤리에트가 돌아왔다고 해서 널 냉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단다. 너도 내 딸인걸. 그것만큼은 맹세할 수 있단다.”

아버지가 재빨리 변명을 덧붙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거예요?”

나는 가만히 아버지를 응시했다.

“샤리에트…….”

“그냥,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돼요. 저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나는 다른 영애들에 비해 늦게 데뷔탕트를 치러야 했다.

아버지는 내가 남들에게 완벽한 사람으로 비춰지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고, 당시의 나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 데뷔탕트를 늦췄던 건 샤리에트를 위해서였다.

헛된 희망이라 여기면서도 혹시라도 돌아올 딸을 위해 마지막까지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런 말씀까지 하시는 거예요?”

“나는 네가 샤리에트에게 이름을 돌려줬으면 한다.”

이미 겪은 상황인데, 왜 나는 여전히 슬픈 걸까.

간절한 아버지의 표정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고작 이름일 뿐이야. 그것만 달라지는 거다. 네가 내 딸이라는 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고, 네가 누리고 있던 것들도 변치 않을 거야.”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아버지의 위로를 순순히 믿기엔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달라지는 건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제가 싫다면요?”

“샤리에트.”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버지를 노려봤다.

예정대로라면 순순히 그러겠다고 할 셈이었다.

하지만 오롯이 샤리에트만을 생각하는 아버지를 보니 약간의 심술이 치솟았다.

“네, 저도 샤리에트예요. 그 이름을 지어주신 건 다름 아닌 아버지셨고, 저를 샤리에트로 키운 것도 아버지셨죠. 그런데 이제 와서 저 보고 샤리에트가 되지 말라고요?”

“네가 괴로울 거라는 건 알고 있단다.”

“아버지께서 조금이라도 절 생각하셨다면, 최소한 이름 이야기는 나중에 하셨어야 했어요.”

아버지의 말대로 고작 이름일 뿐이잖아요.

내 말에 아버지는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다음, 곧장 말을 이었다.

“이럴 거라면 처음부터 절 샤리에트로 만들지 마셨어야죠.”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이해해주렴.”

아버지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이해요?”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하잖니.”

“……불쌍하다고요?”

울먹거리는 아버지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었다.

불쌍한 샤리에트.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고, 그건 나 역시도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항상 샤리에트에게 미안했고 그녀를 안타깝게 여겼다.

하지만 샤리에트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날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스스로 계단에서 떨어지던 샤리에트를 기억했다.

내가 기억하는 미래에서 샤리에트가 벌인 일들은 불쌍한 아가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설령, 그게 주변 사람들을 짓밟는 일이라 하더라도.

“너는 그간 부족함 없이 살았지만 그 아이는 아니잖니. 그 아이는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했어.”

“당연히 그렇겠죠. 제가 누린 모든 것들은 그 아이의 것이고, 저는 그 아이를 대신할 대용품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지 마렴.”

“하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샤리에트.”

“더는 절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그건 이제 제 이름이 아니잖아요.”

나는 고개를 똑바로 치켜세운 채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지금 아버지가 하고 있는 게 부탁을 가장한 통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웠던 건 샤리에트의 신분을 복귀시키기 위함이었으니까.

당시에는 까맣게 몰랐지만, 아버지가 내게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모든 게 정리된 후였다.

나는 이미 공식적으로 샤리에트라는 이름을 빼앗긴 상태였다.

“제가 이뤄낸 업적들을 샤리에트에게 주세요.”

“…….”

흔들리는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동안 나는 티어드롭의 후계자로서 가문의 주요한 일들에 참여해왔다.

내가 쌓아온 업적들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있다면, 샤리에트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었다.

“어차피 저는 그날, 데뷔탕트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고 다들 정신없어 절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까요. 정식으로 샤리에트를 위한 데뷔탕트를 열고, 그녀가 진정한 티어드롭의 후계자라 공표하세요.”

“……진심이니?”

“네.”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온 결과를 빼앗기는 것이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아깝다고 억지로 잡고 있어봤자, 지금의 내겐 그것들을 지킬 힘이 없었다.

미래의 나는 결국에는 모든 업적들을 샤리에트에게 빼앗긴 채, 그녀가 저지른 악행들을 뒤집어쓰고 죽을 예정일 뿐이었으니까.

어차피 빼앗길 업적이라면서 일찍 내어주고 이득을 챙기는 편이 나았다.

“큰 결심을 해줬구나.”

아버지가 감동한 얼굴로 내 손을 꽉 잡았다.

“저는 아버지께 반항할 생각 같은 건 없어요. 뭐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저도 그럴 테니까.

나는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이해? 아니. 이건 이해가 아니었다.

그저 현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왜 급하게 샤리에트의 신분을 회복시켰는지 알고 있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딸이 돌아왔다는 건 감동적인 이야기였지만, 아름다운 이면만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나 그게 여자라면, 더욱 나쁜 소문에 휩싸이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막기 위해 나와 돌아온 샤리에트를 동일 인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만 한다면, 샤리에트는 완벽한 티어드롭 공작 영애가 될 수 있으니까.

“대신,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세요. 그것만 들어주시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저택을 떠날게요.”

“부탁?”

“말라타 영토를 제게 주세요.”

샤리에트가 돌아온 이상, 티어드롭 저택에 남아 있어봤자 비참한 꼴만 당할 뿐이었다.

필요한 것만 얻고 영영 저택을 떠나는 편이 나았다.

“말라타? 그곳은…….”

아버지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저도 알아요. 그 땅이 어떤 곳인지.”

“그런데도 말라타를 달라는 거니?”

“네. 말라타는 풍경이 아름답긴 해도 땅 그 자체로서의 가치는 없죠. 아버지께도 그렇게 무리한 부탁은 아닐 거예요.”

“정말로 그걸로 되는 거니? 필요한 게 있다면 더 말해도 된단다.”

“아뇨.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내게 필요한 건 말라타에 감춰져 있는 보물이었다.

모나차르트 대공의 도움을 받기 위해선 그것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제가 계속 수도에 있어봤자, 아버지께 폐가 될 거예요.”

아버지는 지금까지 내게 떠나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가 떠나는 것은 아버지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미안하구나.”

내 눈치를 살피던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우습게도 아버지의 표정은 처음보다 한결 편해져 있었다.

“제게 미안하실 것 없어요.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니까요.”

그것이 진짜 제자리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뒷말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아버지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가 나를 골리기 위해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아니면 그것이 진실이었는지는 나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샤리에트의 말이 진짜였다면 아버지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네가 부탁한 건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하마.”

한시라도 빨리 내가 떠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본심을 발견하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약간의 정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 * *

“받으렴. 네가 부탁했던 거란다.”

아버지가 건넨 서류에는 말라타의 소유권을 입증하는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천천히 서류 내용을 확인하다가 잠시 멈췄다.

서류에는 샤리에트 대신, 심포니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제 샤리에트가 아니었다.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서류를 정리해 소중히 품에 안았다.

“아니다. 내가 더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얼굴에 쏟아지는 시선에선 여러 감정이 담겨 있어 나 역시도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언제쯤 떠날 생각이니?”

“질질 끌 필요는 없으니, 오늘 밤에 바로 떠날 생각이에요.”

모두 감정에 젖어 있었지만 정말로 딱 거기까지였다.

아버지도, 나도 현실을 잊진 않았다.

“혹시 몰라서 말라타에 있는 별장에 사람을 보내 수리를 해두었다. 쓰는 데에 별 불편함은 없을 거야.”

“네, 감사해요. 하지만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더는 절 도와주실 필요 없어요.”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의지하게 될 뿐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아버지라면 더욱 그랬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봤자 내게 좋을 건 없었다.

“샤리에트.”

“그 이름으로 부르시지도 마시고요. 저는 이제 아버지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서류가 구겨졌지만, 표정을 유지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나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아버지를 응시했다.

그럼에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하렴.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줄 테니 말이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서운할 수도 있단 건 알고 있단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날 이해해줄 순 없는 거니?”

“이해하기 때문에 떠나는 거죠. 이것만이 제가 아버지께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니까요.”

상처 입었다 해서 아버지에게 받은 것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티어드롭 공작 영애로서 많은 것을 누린 건 사실이었다.

“…….”

“건강하세요, 아버지. 그리고…….”

나는 습관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뱉으려다가 멈췄다.

그 말은 이제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끼이익-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죄, 죄송해요! 저는 혼자 계신 줄 알고……!”

그리고 곧장 이어진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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