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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용품이었다-1화 (1/204)

나는 대용품이었다

1화

1화. 두 명의 샤리에트

모든 것은 샤리에트가 사라지면서 시작되었다.

티어드롭 공작 부부의 유일한 자식이자, 모두가 사랑했던 아가씨.

샤리에트 블랑 티어드롭.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공작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며 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끝내 딸을 찾지 못했고 그의 아내는 딸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예 미쳐버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은 한 가정을 송두리째 지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났을까.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공작은 드디어 잃어버렸던 딸을 찾았다.

비루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탐스러운 은발을 가진 어린 소녀.

다시 찾은 샤리에트는 실종 당시의 기억이 없는 상태였지만 공작은 개의치 않았다.

공작은 혹시라도 다시 찾은 딸을 잃을까 항상 전전긍긍했고, 딸을 위해서라면 뭐든 했다.

그리고 샤리에트는 그런 아버지의 헌신에 점차 마음을 열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 완벽한 공작 영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두 사람은 완벽한 부녀처럼 보였고, 그들 이야기는 어느 동화의 결말처럼 영원히 행복할 것 같았다.

공작 영애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비슷한 외모와 나이. 그리고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샤리에트.

그녀를 마주한 샤리에트는 자신이 ‘대용품’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진짜가 나타난 이상, 대용품은 필요 없어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대용품을 사랑한 게 아니라, 공작 영애 그 자체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대용품이 어떻게 몰락하고, 망가지든 간에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도 억울한 누명을 쓴 그녀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처리하기 귀찮은 골칫덩어리에 불과했다.

모두가 그녀를 외면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녀를 잊지 않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나는 철장 너머의 흐릿한 불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순간, 끼익하고 문이 열렸다.

나는 감옥 안으로 들어오는 샤리에트를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사실 나는 대용품이었던 그녀를 잊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저 잊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안녕, 샤리에트.”

그녀는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

“귀여운 동생아, 그동안 잘 지냈니?”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한, 진짜 샤리에트가 싱긋 웃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차려입은 그녀는 정성껏 빚어낸 도자기 인형인 양 어여뻤다.

그녀의 입가에 머금은 미소조차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롭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버지께서 내일이면, 네 사형을 집행할 거랬어. 단두형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주변의 눈도 있으니 독형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

“…….”

“물론 독형이라고 해서 안심하지 마. 내가 널 위해 특별한 독을 준비해뒀으니까. 결코 곱게 죽진 못할 거야.”

온몸의 피가 마르고 내장이 전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초라하게 죽어갈 뿐이지.

샤리에트의 양 입꼬리가 위를 향해 한껏 올라갔다.

“그래. 드디어 내가 진짜 샤리에트가 되는 거야.”

말을 꺼내기만 해도 만족스러운지, 샤리에트의 두 뺨이 홍조로 물들었다.

“나는 티어드롭 가문의 후계자로서 모든 걸 물려받을 거야.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누구보다 행복해질 테지.”

나는 누가 뭐래도 샤리에트 블랑 티어드롭이니까.

가슴에 두 손을 올린 채 샤리에트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웃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나와 다르게 네 존재는 영영 사라지고, 혹시라도 널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공작의 딸을 사칭한 사기꾼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를 뿐일 테지만 말이야.”

샤리에트가 부채 끝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을 보게 했다.

풍성한 속눈썹 사이로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동자는 더러운 감옥 안에서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더러워라.”

“…….”

“그래도 네게는 이 꼴이 훨씬 잘 어울려. 개처럼 바닥을 기는 네 꼴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달까? 천한 핏줄에게 딱 어울리는 모습이지.”

조롱하는 말들에 수치감이 들 법도 했건만, 이제 나는 그마저도 느낄 수 없었다.

손과 발이 모두 묶인 것도 모자라, 개처럼 재갈까지 물린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에게 수치심 같은 감정은 사치였다.

“보통 이러면 아니라고 대들기라도 할 텐데, 너는 그런 반항조차 하지 않는구나? 수치를 모르는 자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데 말이지.”

아니면, 천한 핏줄이라서 수치 자체를 모르나?

재갈 탓에 내가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샤리에트는 모른 척 짓궂게 눈매를 휘었다.

모두가 천사 같다고 칭송하던 공작 영애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내겐 그 모습이 더 익숙했다.

그녀가 내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은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었잖아. 그동안 누리고 산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지.”

샤리에트는 킥킥거리며 부채로 내 뺨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차마 그녀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내가 이런 신세가 된 것이 샤리에트가 파놓은 함정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앞에서 당당해질 수 없었다.

내가 정말로 잘못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대용품에 불과했으니까.

진짜가 돌아온 이상, 가짜가 설 자리는 없으니까.

한때 모두가 사랑하던 공작 영애였던 나는 이제 존재 자체가 죄인 존재가 되었다.

“반응이 없으니 영 재미없네.”

“…….”

“아, 그렇지! 죽기 전에 내가 좋은 거 하나 알려줄까?”

침묵으로 일관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연신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거리던 샤리에트의 얼굴이 일순간 밝아졌다.

그건 못된 장난을 발견한 아이 같은 미소였다.

“사실 나도 가짜야.”

샤리에트의 고백에 나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샤리에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생글생글 웃으며 부채로 내 뺨을 톡톡 두들겼다.

“읍, 으, 우으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재갈 때문에 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야 반응을 보이네.”

발악하는 내 모습에 샤리에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왜? 내가 가짜라니까, 이제라도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아, 우, 으으!”

“착각하지 마.”

샤리에트는 만면에 가득했던 미소를 지운 채 싸늘한 시선으로 날 내려다봤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해준 건 네게 일말의 희망도 없기 때문이야.”

“으으, 읍-!”

“진실을 다 알면서도 한 마디도 못 한 채 죽어야 하는 네 꼴만큼 우스운 게 없을 것 같아서.”

샤리에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공작 영애의 가면을 썼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비참한 내 꼴과 다르게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샤리에트는 우아한 공작 영애, 그 자체였다.

내겐 그 사실이 가장 잔인했다.

“잘 가, 샤리에트.”

이제 그 이름은 오롯이 내 것이지만.

샤리에트의 부채 끝이 부드럽게 내 뺨을 스쳐 가고 그녀의 미소가 심장에 꽂히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샤리에트가 내게 준 게 희망이 아닌, 절망이라는 사실을.

애당초 샤리에트의 말이 진실이라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가 가짜든, 아니든 간에 내가 대용품이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살아남는다 해도 내겐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나는 그제야 바닥에 웅크린 채,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 * *

“아아아악-!”

나는 고통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튕겨 나가듯 몸을 일으켰다가 눈에 들어온 풍경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하는 와중에도 내 몸은 공포에 질려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여, 여긴…….’

반사적으로 스스로를 끌어안고 가쁜 숨을 내쉬며 심호흡을 했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혈관을 타들어 가는 감각이 여전히 생생해 미칠 것 같았다.

“아가씨,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제대로 몸도 지탱하지 못하고 겨우 숨만 헉헉거리면서 쉬고 있는데, 하녀가 급히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하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가 손에 느껴지는 푹신한 감각에 인상을 썼다.

내가 누워 있었던 곳은 침대였다.

어릴 적부터 내가 쓰던, 그러나 샤리에트가 나타나고는 빼앗겼던 내 침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도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눈만 깜박거렸다.

나는 분명 죽었다.

혈관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생을 마감했다.

수도 없이 살려달라 외쳤지만 입에 물린 재갈도, 몸을 구속한 사슬도 끝까지 내게 자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차가운 감옥 안에서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자비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의사를 부를까요?”

“……벨벳?”

“네, 아가씨. 부르셨나요?”

안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는 벨벳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벨벳은 어린 시절부터 날 모셨던 전속 하녀로, 내겐 자매나 다름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다고 착각했을 뿐이지만.

신분에 상관없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 혼자뿐이었다.

샤리에트가 돌아온 이후부터 벨벳은 변했다.

동료 하녀들과 떠들면서 내 흉을 봤고, 그것도 모자라 내 죄를 심판하는 재판장에서 악질적인 증언을 했다.

그녀는 내 편이 아니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아무렇지 않게 나를 고발하던 벨벳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했다.

그렇지만 티 낼 순 없었다.

나는 애써 분을 삼켰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아직은 지켜봐야 할 때였다.

애당초 샤리에트가 나타난 이후부터 내 말을 무시하던 벨벳이 나를 신경 써주는 것부터가 수상쩍었다.

“오늘이 며칠이냐뇨? 당연히 오늘은 아가씨가 마지막으로 열아홉 살이신 날이죠.”

벨벳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열아홉 살이라고?”

“내일이 아가씨의 스무 번째 생일이니, 아가씨께서는 아직 열아홉이시죠.”

벨벳의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아직 샤리에트가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저택 안의 샤리에트는 나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힘이 쫙 풀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내가 비틀거리자, 벨벳이 다급하게 흔들리는 내 몸을 잡았다.

나는 벨벳의 도움을 받아 겨우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댔다.

샤리에트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누르고 있던 거대한 돌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진짜 의사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냐. 괜찮아. 쉬면 좋아질 거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세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나쁜 꿈을 꾼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보다 악몽을 꾼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했다.

게다가…….

‘내 스무 번째 생일날이었지.’

나는 무릎을 모은 두 팔에 힘을 줬지만 몸이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날은 샤리에트가 돌아온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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