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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녀의 다툼 (2) (152/152)

외전2.

어느 부녀의 다툼 (2)

나이에 비해 똑똑한 편이라고는 해도 아이가 어른을 말로 이기기는 힘들었다. 엄마를 위해 그 정도도 못 하냐는 말에는 결국 말문이 막힌 레이나가 어버버 입을 벙긋거렸다. 말싸움에서 밀린 게 분한지 얼굴이 새빨개진 레이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빠 미워! 엄마는 아빠 같은 거 하나도 안 좋아하거든! 레이나를 제일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레이나 말부터 들어줄 거야!”

레이몬드는 이 패턴이 익숙하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반박했다.

“엄마는 아빠를 좋아해서 결혼했기 때문에 레이나를 낳은 거야. 그러니까 엄마는 아빠를 제일 좋아하는 거지.”

“그, 그건 레이나가 태어나기 전이라서 그런 거거든? 레이나가 있었으면 엄마도 레이나랑 결혼했을 거야!”

“아니, 클레어는 나를 제일 좋아해. 너는 그 다음이야.”

“엄마는 항상 맛있는 건 레이나부터 먹여주고, 레이나가 갖고 싶어하면 뭐든 다 주거든?”

“그래? 아빠는 뭐든 엄마부터 챙겨주는데. 너 말만 좋아한다 어쩐다 하지만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아니야?”

“아, 아니야! 레이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원래 좋아하면 상대에게 다 주고 싶은 거야. 너처럼 상대가 주는 걸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넌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지.”

레이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태양을 박아넣은 듯 화려한 금색의 눈동자가 일그러지더니 결국 으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레이나는 엄마 좋아해! 엄마가 제일 좋단 말이야!”

레스티아는 양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은 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제 겨우 8살인 꼬마 아가씨는 그렇다 치고, 자신의 상관마저 왜 비슷한 수준으로 정신연령이 끌어내려진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어린아이에게 한마디도 안 지고 받아치고는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눈으로 제 딸을 내려다보는 상관의 모습에 레스티아는 고개를 저었다.

“자, 자. 두 분 빨리 화해하시고 기분 푸세요.”

“레이나는 절대 화해 안 해! 아빠 미워! 세상에서 제일 미워! 앞으로 평생 말도 안 할 거야!”

“나도 욕심 많고 고집만 센 딸은 하나도 안 좋아해.”

레이몬드가 아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턱을 괴자, 레이나의 눈동자가 충격을 받은 듯 커졌다. 평소엔 어지간하면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는 상냥한 아빠가 오늘따라 강하게 나왔다. 거기다 레이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

레이나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지만, 그 다음으로는 아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충격이 꽤 컸다. 겨우 울음을 멈췄던 레이나의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레이몬드도 겉으로는 세게 나갔지만 속으로는 내심 레이나가 너무 충격을 받은 게 아닐까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레이나가 곤히 잠든 클레어를 흔들어 깨워서 온종일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응석을 부리고 피곤하게 할 게 틀림없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내를 푹 쉬게 해주고 싶은 그로서는 조금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레이나의 말대로 레이몬드도 요즘 클레어가 자신보다 딸아이를 더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 살짝 꽁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처음 클레어가 레이나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기뻐서 클레어를 안고 온 수도 안을 뛰어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내 아내고, 그런 아내가 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제가 기뻐하는 걸 보고 클레어 역시 환하게 웃으며 기뻐할 때는 정말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었다. 단순히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기대보다는 자신과 클레어 사이에 더는 떼어놓지 못할 연결점이 생겼다는 게 기뻤다.

이따금씩 클레어에게 버림받는 악몽을 꿀 때도, 이제는 조금은 덜 불안할 것 같았다. 선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니 클레어가 우리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못 본 척하면서까지 저를 떠나지는 못할 것 같아서.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클레어가 곧바로 입덧을 시작하면서부터 레이몬드의 눈앞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좋아했던 음식, 과일, 케이크를 포함한 다과들, 그 모든 걸 클레어는 거부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물조차 비린내가 난다며 마시지 못하는 상태로 클레어는 말라갔다. 클레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로도 헛구역질을 계속하고, 지쳐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상황에서 레이몬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었다.

오죽하면 옆에서 다른 이들이 볼 때 클레어보다 레이몬드가 먼저 잘못되겠다며 걱정할 정도였다.

어떻게든 클레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레이몬드는 대륙의 모든 먹을거리를 가져다 클레어 앞에 대령해 봤지만 클레어는 대부분 보기만 해도 속이 좋지 않다며 거부했다.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쁜 건 정말 잠깐이었다. 레이몬드는 이러다 클레어가 잘못 될까 두려워 클레어와 똑같이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괴로워했다.

하루하루 말라만 가는 아내를 보며 결국 레이몬드가 견디지 못하고 클레어를 끌어안은 채 눈물을 터뜨렸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배 속의 아이마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클레어가 이토록 고통받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배 속의 아이도, 레이몬드 자신도 죽도록 미웠다.

이대로 제게서 클레어를 앗아간다면 설령 신이라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제발 제 아내를 제게서 빼앗아 가지 말라고, 클레어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원망 섞인 기도에 신이 응답했음인지, 기적적으로 클레어가 거부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생겼다. 여기엔 형수님을 걱정한 로이안트의 노력도 제법 들어있었는데, 슬란테아의 바다를 건너 먼 동양의 나라에서 발견한 과일과 차였다.

클레어는 간신히 그것들을 먹고서 기운을 차렸고, 입덧도 점점 가라앉아서 다른 음식들도 차츰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에 겨우 레이몬드도, 클레어를 아끼고 사랑했던 모든 이들에게도 평화가 찾아왔다.

그즈음 레이몬드는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살찌우는데 필사적이었다. 클레어가 조금이라도 먹고 싶은 게 있거나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와 그것부터 해결해 주려 노력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끔찍했던 탓인지, 레이몬드는 지금도 클레어가 뭔가를 먹는 걸 보는 게 제일 기쁘고 흐뭇했다.

다행히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고, 그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가 클레어가 아닌 레이몬드 자신을 똑 닮았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도 아이도 무사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레이몬드는 신께 감사했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3살이 되었을 무렵 클레어가 슬쩍 둘째를 원하는 기색을 내비쳐왔지만, 레이몬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레이나가 태어나고 한참이 지나서도 클레어가 잘못될 뻔했다는 트라우마에 한동안 관계마저도 거부한 그였다.

그래도 결국 사랑하는 아내의 유혹에 완강히 버틸 순 없었지만 최소한 또 아이를 갖지 않도록 늘 조심해왔다. 아이는 레이나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두 번 다시 클레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하루하루 메말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놓고 오늘 새벽에는 깜빡 실수하긴 했지만.’

레이몬드는 뒤늦게 오늘 새벽 자신이 반쯤 정신을 놓고 아내를 안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잘못하면 이번엔 레이나까지 그때 제가 느꼈던 두려움을 겪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더 커졌다.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고 먼저 화해하자고 손을 내미는 게 좋을까. 레이몬드는 일단 레이나가 클레어 말고 달리 관심을 가질 만한 걸 찾아서 꾀어내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히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을 할 때는 언제고 서로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부녀를 지켜보던 레스티아는 헛웃음을 삼켰다.

둘이 똑같이 생겨선 하는 행동도 어쩜 저렇게 똑같은지, 피라는 게 참 무섭다 싶었다.

레이나도 고집이 좀 세긴 해도 평소엔 제 아빠를 닮아 차분하고 이성적인 편인데, 엄마인 클레어에 관해서만 저렇게 유독 떼를 쓸 때가 많았다.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역시 저 부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분이 계셔야 하는데. 지금은 모셔올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고민이었다.

똑똑.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때마침 울리는 노크 소리가 세 사람의 시선을 모았다. 레이몬드가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자 익숙한 얼굴의 마법사가 후다닥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법사는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제 품에 안고 있던 마력구를 세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저, 황자비 전하께서 연락을 해오셨는데요.”

그 순간 꼭 닮은 부녀의 눈동자가 동시에 반색하며 반짝거리는 걸 레스티아는 보았다.

레이몬드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고, 레이나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것도 거의 동시였다. 두 사람은 마법사가 들고 있던 마력구를 강탈하듯 빼앗아 마력을 불어넣었다.

“레이몬드.”

마력구가 푸른빛으로 둘러싸이더니 이내 졸음이 덜 가신 클레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막 잠에서 깨어나 살짝 부어있는 얼굴마저도 예쁜 아내를 보는 레이몬드의 눈동자에 애정이 가득했다.

“클레어.”

“엄마!”

반가움이 가득한 부녀의 외침에 클레어가 졸린 얼굴로 미소지었다.

“레이나, 거기 있어요?”

“엄마! 나 여기 있어!”

레이나는 엄마가 제 이름을 불러준 것만으로도 기쁜 듯 폴짝폴짝 뛰며 제 존재를 알려왔다.

“오늘 같이 놀기로 했는데, 엄마가 늦잠 자서 미안해.”

“괜찮아! 레이나 착하게 잘 있었어. 떼도 안 쓰고, 아빠랑 착하게 있었어.”

클레어가 미안해하자 레이나가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대답했다. 레이몬드는 이 녀석 갈수록 거짓말이 느는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모른 척해주었다.

“오늘은 둘 다 언제까지 마탑에 있을 거예요?”

외모만 닮은 게 아니라 타고난 마력의 양이 방대한 것마저도 제 아빠를 꼭 닮은 레이나였다. 고작 8살의 나이에 벌써 성인 마법사들을 훨씬 웃도는 마력을 지닌 레이나는 이미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자연히 제 아빠를 따라 마탑을 놀이터처럼 드나드는 레이나였고, 다른 마법사들을 기함하게 만드는 수식을 만들어와 마탑을 들썩이게 하는 일도 흔했다.

마탑 소속 마법사들 사이에서 이대로면 마탑주의 계승이 직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클레어는 오늘도 레이나가 마탑에 놀러 갔다 생각하고 언제쯤 올 건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레이나가 지금 당장 엄마한테 달려갈 기세로 대답하려는 찰나, 클레어가 어딘가 조금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둘 다 보고 싶어요.”

거의 코를 갖다 박는 수준으로 마력구를 들여다보던 부녀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눈동자만 굴려 서로를 바라본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답했다.

“지금 당장 갈게.”

“레이나는 뛰어갈 거야.”

레이몬드는 마력구의 연결을 끊지도 않고 옆에 대기중이던 마법사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 뛰듯이 걸어가 레이나의 겉옷부터 챙겨 입힌 뒤, 본인의 상의도 대충 집어 들었다. 그 과정에서 딸 레이나 역시 군말 없이 척척 아빠의 행동을 따랐다.

“가자, 딸.”

“응, 아빠!”

그러고는 둘이 언제 싸웠냐는 듯 손을 꼭 잡고 씩씩하게 외치며 문을 열고 나섰다. 성큼 성큼 걸어서 점점 멀어져가는 부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스티아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이야.’

언제 봐도 유쾌한 부녀를 일별한 레스티아는 두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정리하며 피식피식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저렇게 바보 같고 유치하게 변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때때로 지금처럼 그 관계가 부러워지곤 했다.

왜냐하면 클레어도, 레이몬드도, 레이나도 서로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 보였으니까. 가끔 싸우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여도,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게 느껴지니까.

아! 그래도 가끔 저렇게 유치찬란하게 8살짜리 어린아이와 싸우는 상관의 모습을 봐야 할 때는 빼고 말이다.

레스티아는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의자를 테이블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저 세 사람처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외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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