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어느 봄날의 결혼식 (2)
“가자, 알렌.”
“안녕! 다음에 또 봐, 리세!”
클레어가 자주 부르던 제 애칭을 알렌이 친근하게 외치자, 잠깐 움찔하던 리세라가 기쁜 듯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다른 하객들 틈에 섞여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알렌은 그런 리세라를 뒤로하고는 로이안트의 손을 잡고 총총 걸어갔다.
그리고 황태자 부부의 양옆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던 로이안트와 알렌은 얼마 못 가 또 멈춰 섰다. 근처에서 줄지어 호위를 서고 있는 기사들 중 익숙한 얼굴이 보인 탓이었다.
“여여, 공작. 아직 무사히 황성에 남아 있었어?”
상대를 먼저 알아본 로이안트가 그에게 다가가며 진심으로 반가운 마음 반, 비꼬는 의도 반을 섞어 말했다. 리하르트도 로이안트와 알렌을 발견하고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네, 황제 폐하와 미카엘 전하 덕분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참 공작을 아낀다니까.”
로이안트는 놀랍지도 않다는 투로 말하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공작은 우리 형님한테 안 맞았어?”
“네, 차라리 두들겨 맞는 게 낫겠다 싶을 때는 많았습니다만.”
푸핫! 그의 대답이 재미있었는지 로이안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리하르트는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는 걸 느끼며 살짝 불편한 얼굴을 했다.
“형수님은 우리 둘째 형님 거야!”
로이안트의 등 뒤에 숨은 채 슬쩍 슬쩍 리하르트를 훔쳐보던 알렌이 용기를 내어 외쳤다. 어린 황자의 호기로운 외침에 리하르트는 무미건조한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에 알렌이 움찔하며 더더욱 로이안트의 뒤로 숨는 찰나, 리하르트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도 뭐든 영원한 건 없지 않겠습니까. 4황자 전하.”
어조는 공손하지만 대놓고 심기를 긁는 말에 로이안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는 그럼 다른 곳으로 이동해보겠습니다.”
리하르트는 이거 봐라? 싶은 표정의 로이안트와 고개를 갸웃하며 저를 올려다보는 알렌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자리를 떴다.
“알렌 너, 방금 공작이 한 말 무슨 의미인지 알아?”
멍하니 리하르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알렌이 이번엔 반대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로이안트를 바라보았다. 로이안트는 귀엽지만 맹한 막냇동생을 내려다보며 짧게 혀를 찼다.
“너 그렇게 천재라고 떠받들리더니 아직 저 정도도 해석 못 해?”
로이안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예 알렌의 몸을 번쩍 안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니다, 됐다. 그래, 우리 귀염둥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순수하고 천진하게 있어 줘. 내 천사.”
“형수님한테 갈래요!”
“안돼, 너무 늦었어. 지금 가면 바로 쫓겨나. 자리 가서 앉자.”
“히잉.”
로이안트는 알렌을 안은 채 미카엘의 눈총을 받으며 황가의 사람들만 모여 앉은 자리로 가 앉았다. 줄지어 늘어선 기사들을 지나 앉으니, 바로 옆자리의 유리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벌써부터 펑펑 울어댈 태세였다.
로이안트가 유리와 저 사이에 알렌을 앉히고 고개를 들자 곧바로 식이 시작됐다.
꽃과 보석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중앙정원의 한가운데.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하객들을 심드렁한 눈으로 응시하던 로이안트의 시야에 흰색의 예복을 갖춰 입은 레이몬드가 들어왔다.
평소에도 늘 한결같이 잘생기고 멋있고 근사하고 완벽한 자신의 형님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 잘나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자신뿐만은 아닐 테고. 주변을 보니 레이몬드가 등장하고부터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완전히 넋이 나간 눈으로 제 형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이안트는 괜히 제가 다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이라, 흐뭇하게 마침 제 앞을 스쳐 가는 둘째 형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제게 넋을 잃은 주변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심히 주례를 맡은 교황 앞으로 걸어갔다.
로이안트는 생각할수록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례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교황을 바라보았다.
교황이 제국 황자의 결혼식에 주례로 참가하다니. 제국에서 먼저 성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는 해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마 그만큼 클레어 헤더가 마음에 든 거겠지.’
원래 시오네트라 버젯이 맡게 됐던 신전의 제단화는 거의 클레어가 배턴을 받아 그리기로 내정된 상태였다. 시오네트라의 손이 생각보다 빨리 회복되지 않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교황이 개인적으로 클레어의 그림을 무척 좋아하는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여러모로 대단하네, 정말.’
로이안트는 성국이 이 정도로 저자세로 나오게 만든 클레어에게 순수한 감탄을 하며 팔걸이에 턱을 괬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잠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라 여겼던 자신의 짧은 판단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유리가 질리기만 하면 언제든 쫓아낼 여자, 주제도 모르고 제 소중한 형님과 동생들에게 접근하는 귀찮은 여자.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그래서 더 경계하게 됐던 그녀의 존재가 이토록 제 소중한 이들의 안에 크게 자리 잡게 될 줄이야.
로이안트는 세상일은 참 어떻게 될 지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레이몬드가 나타났을 때처럼 주변이 한순간 숨을 멈추며 조용해지는 게 느껴졌다. 생각에 잠겨있던 로이안트는 하객들의 시선이 모인 곳을 돌아보았다가, 그 역시 하객들과 마찬가지로 숨을 멈췄다.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클레어가 똑바로 레이몬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그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고 청초한 모습으로 오로지 레이몬드만을 바라보며 그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레이몬드 역시 그런 클레어를 기다리며 더없이 사랑하는 존재를 바라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서로를 사랑하는 게 느껴지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환하게 미소짓는 클레어의 미소에 레이몬드 역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얼굴로 미소지었다.
두 사람의 손이 닿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힘껏 마주 잡았다.
교황의 주관 아래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맹세와 함께 맹세의 입맞춤이 이어졌다. 하객들의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이어졌다.
로이안트 역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위한 박수를 보냈다.
서로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클레어와 레이몬드를 위해 기도했다.
두 사람의 미래가 늘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영원한 것도 분명 존재한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기를. 그래서 리하르트 아델이나 저 같은 시시한 놈들이 괜히 넘보지 못하게. 천년만년 서로 사랑하며 잘 살아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