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어느 봄날의 결혼식 (1)
“자아, 다 됐습니다. 알렌님.”
알렌은 기대 어린 눈으로 눈앞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다른 형님들처럼 깔끔하게 뒤로 넘겨진 머리칼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평소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은 느낌이 만족스러웠다.
알렌은 제 요구대로 머리를 만져준 시녀들을 고마움이 담긴 눈으로 돌아보았다.
뽀얗고 귀여운 이마가 드러나 커다란 눈동자가 더 돋보이는 알렌이 자기들을 돌아보자 시녀들이 꺅꺅 작게 비명을 질렀다.
“전하, 정말 멋있으세요!”
“오늘 우리 4황자 전하께서 식에 참석한 분들 중 누구보다 멋지실 거예요!”
사실 멋있다기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더 강했지만, 그녀들은 알렌이 제일 기뻐할 만한 말이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잔뜩 추켜세워주는 말에 알렌이 순수하게 기뻐하며 헤헤 웃었다.
“형수님도 그렇게 생각해주실까?”
“헤더 영애 눈에는 레이몬드 형님이 제일 멋지겠지.”
알렌의 뺨이 뚱하니 부풀었다. 알렌은 갑자기 옆에서 끼어든 제 셋째 형님인 로이안트를 뾰로통하게 올려다보았다.
사실 지금 당장 눈앞의 셋째 형님만 봐도 저보다 훨씬 더 멋있다는 걸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결혼식에서 알렌 제가 가장 멋있을 거라는 시녀들이 말이 진실이 아니란 것쯤은 알렌도 안다.
알지만, 조금 속상했다. 자기도 얼른 다른 형님들처럼 키가 쑥쑥 자라고 어깨도 떡 벌어지고 팔 다리고 쭉쭉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알렌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겠지만.”
로이안트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알렌의 눈에 부어올라 파랗게 멍이 들기 시작한 형님의 왼쪽 뺨이 보였다. 알렌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셋째 형님, 얼굴 왜 그래요?”
“왜겠어. 형님한테 시원하게 맞았지.”
로이안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등으로 제 뺨을 문지르며 답했다. 그러다 생각보다 통증이 심한지 움찔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 사람 왜 갈수록 괴물이 돼가는 거야? 마법사가 주먹까지 세지면 어쩌자는 거냐고.”
“아까 진짜 속 시원했지. 그동안 둘째 오빠 무서워서 계속 슬란테아에 숨어 지내다가, 이번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와서 처맞는 거 보고 속이 뻥 뚫렸어.”
로이안트와 나란히 방으로 들어온 유리가 알렌의 옆에 서서 낄낄 웃어댔다. 말 그대로 통쾌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요정처럼 예쁘게 꾸민 여동생을 향해 로이안트는 서운해 죽겠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는 퉁퉁 부어오른 뺨을 감싼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난 진짜 형님을 위해서였는데. 동생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네.”
“진짜 둘째 오빠를 위해서였던 거 맞아?”
“글쎄?”
“나한테도 맞아라!”
제 복부로 날아드는 유리의 자그마한 주먹을 잽싸게 붙잡은 로이안트가 우는 시늉을 했다.
“봐줘라. 나 지금 몸과 마음 양쪽에 다 상처를 입었다고.”
“정의의 발차기!”
“끄윽.”
주먹을 막았다고 방심한 사이에 유리의 구두코가 로이안트의 정강이에 작렬했다. 작고 연약한 여동생의 발차기라고 무시하기엔 생각보다 고통이 심했다. 로이안트가 윽, 신음을 흘리며 몸을 굽히자 유리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똑똑.
이미 활짝 열려있는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세 남매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왜 아직도 다 여기 있지.”
남매에게는 첫째 형님이자 오빠이며, 차기 이 나라의 황제가 될 황태자 미카엘 위르디난 카지스가 무심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의 곁에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태자비도 함께였다.
“첫째 형님!”
늘 바쁜 탓에 평소엔 황제나 황후보다도 더 만나기 힘든 미카엘의 등장에 알렌은 그대로 달려가 형님을 끌어안았다. 미카엘이 자연스럽게 알렌의 등을 토닥이듯 감싸는데, 로이안트가 뒤이어 다가가 황태자비와 짧게 인사를 나누고는 그에게 우는 시늉을 했다.
“미카엘 형님, 유리가 나 괴롭혀.”
“그 얼굴은 레이에게 맞은 거냐.”
미카엘은 로이안트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표정하게 묻고는, 입꼬리를 늘여 희미하게 웃었다.
“레이가 널 많이 아끼긴 하는구나. 그 정도로 봐준 걸 보아하니.”
어릴 때부터 무엇 하나 탐내지도 자기 것이라 정하는 법도 없던 녀석이 처음으로 욕심을 낸 상대를 감히 건드렸으니, 아예 걷지도 못하게 흠씬 두들겨 맞지 않은 게 다행일 터였다.
그런 미카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로이안트도 짧게 웃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로이안트는 무심코 웃다가 뺨과 찢어진 입가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동생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미카엘이 못마땅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 그 꼴로 참석할 거냐?”
“아니, 신관 불러놨어. 마침 저기 오네.”
미카엘이 그 대답에 안심하며 돌아보자,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신관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로이안트가 손짓하자 신관이 후다닥 다가와 그의 뺨에 있던 시퍼런 멍을 깨끗하게 지워냈다.
언제 봐도 신기한 신성력에 의한 치유를 알렌과 유리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지켜보는데, 미카엘이 제 동생들을 한 명 한 명 차분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로이, 유리, 알렌.”
언젠가 황위에 오를 자로서 어릴 때부터 감정을 죽이는 법에 익숙해진 무감각한 눈동자와 달리, 사랑하는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셋 다 황실의 일원답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구나.”
미카엘은 로이안트의 흐트러진 옷깃을, 유리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여운 막냇동생의 뺨을 차례대로 한 번씩 매만져주었다.
“하지만 그저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아름답고 기품 있게. 황실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언제 어디서든 누구의 앞에서든 언행에 주의해라.”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네-에.”
“네!”
“알렌의 대답만 마음에 드는군.”
넷째와 막내는 물론, 고작해야 4살 차이의 셋째 동생도 로이안트 눈에는 전부 아직도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들일 뿐이었다. 그는 흐릿하게 웃고는 자신의 비의 손을 잡고 먼저 방을 나섰다.
“가자, 꼬마들.”
로이안트도 한 손은 유리의 손을, 다른 한 손은 알렌의 손을 잡고 기운차게 걸음을 옮겼다.
알렌의 거처를 나와 식이 열릴 중앙정원으로 걸어가는 내내, 식에 초대받은 귀족들과 그들을 따라온 사용인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화려한 황가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걸어가고 있으니 자연히 집중적으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미카엘과 로이안트, 유리와 알렌 역시 그 시선이 익숙한 태도로 태연히 걸어갔다.
“어, 형수님 친구다.”
그 와중에 알렌이 정원의 입구 쪽을 가리키며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입구 근처에서 호위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묘하게 낯이 익다 싶어 보니 클레어의 졸업식에 참석했을 때 그녀가 유일하게 제 친구라고 소개해주었던 여자가 틀림없었다.
클레어의 초대를 받고 혼자 참석한 것인지, 낯선 황성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주위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알렌은 조금 안쓰러웠다.
때마침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가 알렌들이 서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알렌과 유리를 알아본 듯 그녀가 허둥지둥 허리를 깊이 숙였다.
“첫째 형님, 나 저 사람이랑 얘기하고 싶어요.”
“곧 식이 시작할 텐데.”
알렌이 앞서 걷던 미카엘에게 조르듯 말하니,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답했다.
“잠깐이라도 안돼요?”
“로이.”
알렌의 간절한 시선에 미카엘이 로이안트에게 눈짓했다. 네가 알아서 데려갔다가 무사히 데려오라는 의미를 알아챈 로이안트가 살짝 성가신 얼굴을 했다.
“아, 귀찮은데.”
로이안트가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자 알렌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풀이 죽어서 아예 고개까지 푹 떨어뜨리는 동생의 모습에 당황한 로이안트가 허겁지겁 변명했다.
“아니, 우리 귀염둥이가 귀찮다는 게 아니라! 나한테 아무 득도 없을 것 같은 사람한테 굳이 가까이 가기 싫다는 의미였어! 응? 미안! 자, 가자. 어서! 저 여자애한테 가면 되지?”
“나도 언니 말고 다른 사람한텐 관심 없어. 먼저 자리에 가서 앉을래.”
로이안트가 곧장 여자가 있는 방향으로 가려 하니, 유리가 로이안트의 손을 놓고는 미카엘을 따라 가버렸다.
알렌은 로이안트의 손을 잡은 채 씩씩하게 리세라를 향해 다가갔다. 제가 다가올 때까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제자리에 서 있던 리세라에게 알렌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형수님 친구지!”
“안녕하세요. 저, 전하.”
클레어를 통해 이미 리세라가 제국어도 유창하게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알렌이었다.
“너와는 꼭 얘기해보고 싶었어!”
알렌은 그동안 클레어가 즐거운 듯이 아카데미에서 지냈던 일들을 말해줄 때마다 리세라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알렌은 로이안트의 손도 놓고 아예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서 리세라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아카데미에서 클레어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클레어를 너무 너무 좋아하는 두 사람으로서는 서로에게 최고의 대화 상대였다.
“그래서, 그래서?”
“그때도 레나가, 아니, 클레어님이 실력으로 그것들 기를 팍 눌러버리셨죠. 심사위원이 전원 만점을 준 건 그때가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이었다고 했어요. 그때 클레어님을 무시하던 놈들 표정을 전하께서도 보셨어야 했는데!”
“우리 형수님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네, 거기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시죠!”
옆에서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하는 로이안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둘은 잔뜩 신이 나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주로 리세라가 얘기를 하고 알렌이 맞장구를 치는 식이었지만 대화는 제법 잘 이어졌다.
“아니, 저는 사실 전부터 레, 클레어님이 엄청 예쁘신 거 알고 있었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우리 클레어님보고 촌스럽다느니 어쩌니 할 때마다 가소롭더라니까요.”
“맞아, 맞아.”
“그래도 그동안 우리 클레어님 제일 많이 괴롭혔던 인간이 지금은 완전 다 죽어가는 몰골인 걸 보고 어찌나 통쾌했는지 몰라요.”
“우리 형수님을 괴롭혔어?”
“네, 졸업식 때도 보셨죠? 일부러 클레어님 발 걸어서 넘어뜨린 인간이요.”
“알렌도 기억나, 그 사람 진짜 나빠!”
“네. 그래놓고 레나가 클레어님이라는 걸 알고는 태도가 싹 바뀐 게 정말 웃기죠. 졸업식 때도 그랬지만, 클레어님이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신 뒤부터 저희 저택에 부지런히 찾아와선 클레어님과 연락할 방법이 없냐면서 거의 애원을 하더라니까요.”
리세라는 그때 제가 느꼈던 황당한 감정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 잘난 자기 아버지한테 말하지 왜 저한테 그러냐니까. 아버지가 이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라면서, 다시는 그분께 관여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했나. 그때 그 자식 울었어요. 아버지한테 죽어라 처맞고 정신이 나갔는지 저한테 무릎 꿇고 빌면서 클레어님하고 연락하게 해달라면서. 진짜 미친 인간인 줄 알았…… 아, 죄송합니다.”
말을 잇다 보니 무심코 험한 말을 중얼거렸던 리세라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듀젠 오르카에 대한 분노를 토해냈을 뿐이라고는 해도, 황족 앞에서 버릇없이 무슨 소릴 지껄인 거람.
“괜찮아!”
알렌은 쩔쩔매는 리세라의 팔을 토닥이며 이해한다는 시선을 던졌다.
“오르카 후작의 아들 말하는 거지?”
그때 줄곧 두 사람에게 시선도 주지 않던 로이안트가 덤덤하게 물어왔다. 제게도, 제가 하는 말에도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이던 그가 갑자기 질문을 던져오자 리세라는 당황했다.
“앗, 네!”
허둥대던 리세라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대답했다. 클레어의 반려인 레이몬드 2황자도 정말 비현실적이다 싶을 만큼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로이안트 3황자도 만만치 않았다.
유리 황녀나 알렌 4황자도 그렇고, 제국 황가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하나같이 다들 잘난 사람밖에 없는 것인지.
어린 황자는 아직 어린아이라는 느낌이라 그나마 괜찮았지만, 레이몬드 2황자와 비등할 만큼 잘생긴 눈앞의 3황자는 영 대하기가 어려웠다.
“오르카 후작이라면 레이몬드 형님한테 장난 아니게 압박받아서 지금도 오금이 저릴걸. 아들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한 죄로 벌벌 떨고 있을 거야.”
“아, 역시 그랬군요. 하긴, 둘째 아들이라면 껌뻑 죽는 오르카 후작이 왜 그렇게 두들겨 팼나 했죠. 일부러 그런 건지 신관 치료도 못 받게 한 것 같던데.”
“앞으로도 그럴 거야. 겁도 없이 클레어 헤더를 건드리는 이가 있으면 누구든 비참한 꼴을 당하겠지.”
“셋째 형님처럼요?”
“윽, 알렌. 그건…….”
알렌이 천진하게 날린 한마디에 로이안트는 가슴 깊이 내상을 입은 표정으로 제 동생을 돌아보았다.
“3황자 전하, 4황자 전하. 말씀 중에 죄송하오나 이제는 자리로 가셔야 합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기사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하객들도 대부분 자리에 착석하고, 이제 곧 정말로 식이 시작될 분위기였다. 늦으면 혼나겠지. 로이안트는 알렌의 손을 잡고서 성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