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3)
갑작스럽게 나타난 레이몬드의 존재에 동요하며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레이몬드는 오로지 클레어밖에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그대로 클레어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그리움이 짙게 밴 목소리를 흘렸다.
“정말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주변의 소란 따윈 나 몰라라 클레어를 품에 안고, 클레어의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정말 미쳐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보고 싶었고, 그리웠다. 수십 수백 번도 더 제 의무와 아카데미의 교칙을 무시하고, 클레어의 꿈마저 외면한 채 다시 제 곁으로 데려오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아왔다. 운 나쁘게 클레어와 자신의 시간이 맞지 않아 만나지 못하는 지난 몇 달간은 정말 불안함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클레어가 저 같은 건 잊어버리고 혼자 먼 미래로,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는 꿈을 몇 번이고 꿨었다. 그때마다 꿈인 걸 알면서도 너무 괴로워서 무턱대고 황성 밖으로 뛰쳐나오곤 했었다. 찬 바람을 맞고 정신이 들고 나면 다시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은 채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었다.
지난 2년간은 그에게 있어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보낸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힘든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지금 클레어를 만나고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니 이제야 겨우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교수들 중 하나가 다가와 졸업생 대표 인사를 하게 클레어를 놓아주십사 부탁할 때까지도, 레이몬드는 꼼짝도 하지 않고 클레어를 끌어안고 그녀가 제 곁에 있음을 확인하고 만끽했다.
레이몬드는 클레어의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일부러 덥수룩하게 내린 앞머리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여전히 제 마음을 흔들어놓는 아름다운 연갈색의 눈동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조용히 기쁨을 드러내는 눈동자가 레이몬드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클레어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줄곧 안경과 앞머리에 가려져 있었던 클레어의 얼굴이 드러나 주변을 놀라게 만든 것에 이어, 레이몬드가 클레어의 이름을 언급한 파장은 상당했다.
“클레어? 황자가 지금 클레어라고 한 거 맞아?”
“설마 클레어 헤더?”
“말도 안 돼, 진짜 그 클레어 헤더라고?”
단순히 카지스 제국의 황자가 졸업식에 모습을 드러낸 상황 이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큰 동요가 일었다. 다들 놀라움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고, 어쩌다 보니 누구보다 더 가까이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듀젠 오르카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클레어…… 헤더?”
듀젠이 멍하니 중얼거린 목소리를 들은 클레어가 먼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클레어와 눈이 마주친 듀젠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덥수룩한 앞머리와 두꺼운 안경알이 사라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내려앉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토록 동경하고 뒤를 쫓았던 존재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의 여인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런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줄곧 질투하고 멸시하며 괴롭혀왔을 확률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저를 외면하는 클레어의 시선에 듀젠은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절망했다.
클레어는 듀젠 오르카에게 뭐라고 한마디를 더 쏘아 붙여줄까 하다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오늘처럼 좋은 날, 기쁜 날에 저런 인간을 굳이 더 상대해서 불쾌한 마음을 안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서 놀라 굳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리세라에게 미안함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밝혀지기 전에 리세라에게는 먼저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불가능해져서 아쉽고 미안했다.
“리세, 미안해. 나중에 다 설명할게.”
이제는 시온까지 다가와서 단상 위로 올라가 줄 것을 재촉하기에, 클레어는 리세라를 향해 초조하게 말했다. 그에 놀란 눈만 깜빡이던 리세라도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그에 클레어도 겨우 안심한 표정을 짓자, 계속 클레어의 얼굴만 주시하던 레이몬드가 클레어를 안은 채 성큼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 단상 앞에 선 레이몬드가 클레어의 몸을 천천히 내려주었다.
“다리 괜찮아요? 혼자 설 수 있겠어요?”
“네, 괜찮을 것 같아요.”
클레어가 단상을 붙잡고 혼자 힘으로 설 수 있게 도와준 다음, 레이몬드가 어딘가를 향해 손을 까딱이자 커다랗고 화려한 아르세티아 꽃다발이 그의 손에 안착했다.
“졸업 축하해요, 클레어.”
레이몬드는 커다란 꽃다발을 클레어의 품에 안겨주며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아직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던 클레어는 레이몬드가 단상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는 모습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레이몬드는 클레어가 무사히 졸업생 대표 인사를 마칠 수 있도록 단상 아래로 내려와 원래 클레어가 서있던 자리로 가 섰다. 아직도 경악을 감추지 못한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따갑게 달라 붙어왔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시선마저도 즐길 수 있을 만큼 최고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렇다 해도 클레어를 다치게 만든, 지금은 제 옆에서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 오르카 후작가의 차남을 그냥 보아 넘길 생각은 없었지만.
“아, 안녕하세요.”
레이몬드 덕분에 무사히 단상 위에 선 클레어는 그가 준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동시에 제게 향하자 당장이라도 여기서 내려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클레어는 굳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들었다.
“처음 이곳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에 왔던 날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네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따뜻한 계절이었는데, 줄곧 제 꿈이었던 아카데미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던 순간의 감동을 저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증폭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를 통해 나직이 이어지는 클레어의 목소리가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같은 날 입학시험을 치르고 입학한 여러분과 달리 저는 도중에 따로 편입 시험을 치르고 들어왔기에 여러분과 시작점도 달랐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와 낯선 환경으로 인해 잔뜩 위축되어있던 저는 큰 불안감을 안고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게는 과분할 정도로 좋은 친구,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 걱정과 달리 무사히 아카데미 생활을 마치고 지금 여기 이곳에 졸업생 대표로서 서게 되었습니다.”
옅은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대강당 안에 있는 모두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 자리에서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사실 제 이름은 레나가 아닌 클레어 헤더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자신이 미리 준비했던 졸업생 인사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무섭고 떨렸지만, 클레어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원치 않게 누군가의 대리 화가로서 살아가던 저는 진창을 뒹굴던 제게 손을 내밀어준 한 명의 천사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아마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좁고 어두운 방 안에 갇힌 채 그림을 그리는 가축처럼 살다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황녀 전하. 저는 기적처럼 그분을 만나고, 세계를 넓혀 꿈꿔왔던 것들을 하나씩 이뤄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걸 찾아내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행복한 기억들을 선물 받았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그분처럼 다른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감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항상 현재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졸업생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든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의 졸업생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훌륭한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상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 졸업생 대표, 클레어 헤더.”
인사를 마친 클레어가 단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깊이 허리를 숙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아, 그리고.”
누구 하나 빠짐없이 클레어를 향해 박수를 치는 와중에, 클레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단상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자리를 사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잠깐만 이 자리를 빌리겠습니다.”
의아한 시선들과 함께 잠시 박수 소리가 멎은 틈을 타 클레어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클레어는 조금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응시하다 눈을 꾹 감고서 단숨에 제 마음을 내어 보였다.
“레이몬드, 좋아해요. 정말 정말 좋아해요.”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레이몬드를 향한 마음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고는 힘껏 외쳤다.
“제가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리고 두려움에 감았던 눈을 간신히 뜨고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저지만, 그래도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클레어의 시선을 따라 대강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도 레이몬드에게로 향했다. 상상도 못 한 클레어의 공개 고백과 청혼에 놀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레이몬드는 그런 사람들 중 누구보다 놀란 얼굴로 멍하니 클레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클레어의 눈동자가 레이몬드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에 겨우 정신이 든 레이몬드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뭔가 믿기지 않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눈물을 참는 듯 이를 악물던 레이몬드의 얼굴에도 겨우 미소가 피어올랐다. 레이몬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클레어를 향해 대답했다.
“네, 기꺼이요.”
쿠당탕! 쿵!
“으악! 안 됩니다!”
“눈치 챙기세요, 제발!”
다들 한 마음으로 레이몬드의 대답을 기다리며 숨죽였던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보호자석이 시끌벅적하기에 뭔가 하고 돌아보니, 제국의 황자와 똑같은 화려한 금발 머리에 똑닮은 남매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로 단상 쪽으로 두다다다 달려오고 있었다.
“언니이이이이이!”
“형수니이이이임!”
“으아악! 유리님, 알렌님!”
그 뒤로는 당황한 호위들이 허겁지겁 남매를 뒤쫓고 있었고, 남매의 정체를 눈치챈 아카데미 총장 이하 교수진들은 또 한 번 좌절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제국의 황녀랑 막내 황자잖아!”
학생들도 금세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를 알아 보고는 흥분에 차서 소리를 질러댔다.
레지나 왕국과 카지스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는 2년 동안 모습을 감췄던 클레어 헤더와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거기에 제국 황실의 귀염둥이 남매까지.
하나 같이 주목을 끌 수밖에 없는 인기인들의 등장에 대강당 안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클레어!”
단상 쪽으로 사람이 몰리는 걸 보고 표정을 굳힌 레이몬드가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라 클레어의 곁으로 다가갔다. 클레어는 욱신거리는 발목 탓에 비틀거리며 걸어가 레이몬드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레이몬드는 클레어의 손을 잡자마자 보호하듯 클레어를 와락 끌어안았다.
세상의 그 어떤 위협과 두려운 것들로부터 자신을 끝까지 지켜줄 것만 같은 레이몬드의 품 안에서 클레어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웃었다.
더 이상의 불안도, 쓸쓸함도, 그리움도 없이. 이제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미래로 나아갈 때였다.
걱정 마, 너도 곧 행복해질 거야.
스물세 살이 된 클레어 헤더가 말했고,
고마워, 네가 행복해져서 진심으로 기뻐.
여덟 살의 레나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