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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 (147/152)

에필로그 (2)

아카데미 100년 역사상 귀족가의 자제가 아닌 평민이 졸업생 대표를 맡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단상 위에 올라가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의 졸업생 대표 연설을 맡게 되는 건 그리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 해 졸업생들의 대표. 교수들의 평가를 통해 선발된 최우수 졸업생들 중에서도 졸업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한 단 한 명의 학생만이 맡게 되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원래는 레나인지 뭔지,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를 평민 따위가 아니라, 개국공신 가문으로 이름 높은 오르카 후작가의 일원인 듀젠 오르카 자신이 맡았어야 할 자리였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외모, 가문, 능력, 모든 면에서 우수한 귀족인 자신이 아니라, 외모며 출신이며 모든 게 한심하기 그지없고, 거기다 실력마저도 의심스러운 평민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상할 정도로 저 평민을 감싸고 도는 시오네트라 버젯 교수도, 편입 이후로 줄곧 수석 자리를 차지해온 저 평민에게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는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교수한테 편애받는 누구는 참 좋겠어. 다른 사람 흉내밖에 못 내는 하찮은 실력으로도 졸업생 대표로 뽑히고.”

“그거 지금 우리 레나더러 한 소린가요?”

반박할 말이 없는 건지, 그냥 무시하는 건지. 그를 돌아보지도 않는 본인 대신 옆자리의 다른 여학생이 듀젠을 노려보며 말했다.

리세라 엘런, 엘런 백작가의 영애. 또 저 여잔가. 듀젠은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은 아카데미가 참 우스운가 봐요. 여기가 실력도 없는 학생을 수석으로 졸업도 시켜주고 졸업생 대표 타이틀도 그냥 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나요?”

동급생끼리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는 게 규칙인 아카데미에서, 혼자 꼬박꼬박 존대하며 말하는 것도 오히려 더 빈정거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쾌했다.

“리세라 엘런. 네가 왜 난리야? 내가 누구라고 딱 집어서 이름이라도 말한 적 있어?”

듀젠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대신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면 네 평민 친구가 촌뜨기 흉내쟁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가?”

듀젠을 노려보는 리세라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그쪽은 그림 실력보다 언어 능력부터 좀 키우지 그래요? 본인 입으로 졸업생 대표라고 말해놓고 뭔 헛소리죠? 우리 레나가 졸업생 대표인데 그럼 우리 레나 말고 누구더러 촌뜨기 흉내쟁이라고 한 건가요?”

일부러 더 우리 레나, 우리 레나 하며 하며 상대를 향해 빈정거리던 리세라의 입가에도 비웃음이 떠올랐다.

“아아, 재학 내내 레나한테 한 번도 못 이긴 게 분해서 못 견디겠어요? 평민이라고 맨날 무시하던 레나가 그쪽보다 몇백 몇천 배는 더 잘 그리고, 교수님들 사랑을 독차지하니 질투가 나서 돌아버리겠나요? 진짜 찌질하고 한심해서 못 봐주겠네요.”

“이게 진짜.”

듀젠의 눈치만 보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리세라는 거칠 것 없이 그의 태도를 비난해왔다. 듀젠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가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픽 웃음을 흘렸다.

“평민 따위가 졸업생 대표라, 단상 위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꼭 레나가 무사히 졸업생 대표 연설을 마칠 수 없을 거라는 투의 악담이었다.

“찌질한 패배자가 뭐라고 지껄이는-.”

“괜찮아, 내버려 둬.”

결국 참다 못한 리세라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튀어나오려는 찰나였다. 그제야 입을 연 레나의 눈동자가 듀젠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앞머리와 두꺼운 안경알에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눈동자가 듀젠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은 여실히 전해졌다.

“내가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된 게 불만이면, 총장님께 직접 말해. 지난 2년간 한 번도 나보다 좋은 성적을 못 낸 네가 하는 말을 총장님이 어디까지 들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뭐?”

“졸업식 시작이야. 앞이나 보지 그래?”

레나의 말대로 그 직후 총장이 단상에 올라서서 졸업식 시작을 알렸다. 근엄한 총장의 눈동자가 단상 아래의 학생들을 둘러보는 걸 알아챈 듀젠도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섰다.

‘피곤해.’

겨우 불편한 시선들로부터 벗어난 레나, 아니, 클레어는 무거운 안경을 고쳐 쓰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덥수룩한 앞머리도, 두껍고 무거운 안경도,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도.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우리 언니 저렇게 예쁜데 아카데미에서 누가 치근덕거리거나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하면 어떡해? 난 절대 그 꼴 못 봐. 아카데미 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데, 우리 예쁜 언니 거기서 별 같지도 않은 놈들이 침 줄줄 흘리면서 쳐다볼 거 생각하면 열불 터져서 안 돼.

지금 이 모습은 2년 전 즈음, 아카데미 편입이 확정된 이후 노발대발한 유리 황녀가 거의 강제적으로 만들어놓은 거였다. 원래는 여기다 보기 싫을 정도로 얼굴에 주근깨도 잔뜩 그려놓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건 철회되었다.

아침마다 머리를 땋는 일도, 무겁고 불편한 안경에 콧등이 아픈 것도, 덥수룩한 앞머리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줄곧 귀찮고 힘들었었다. 그래도 이 모습도 오늘로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홀가분하면서도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스무 살의 클레어 헤더가 아닌 열일곱 살의 레나로서 아카데미에서 편입해 수학한 지난 2년간의 기억들이 천천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즐겁고 보람찬 기억들이 더 많았고,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다만 그동안 친하게 지내왔던 이들에게 본명도, 진짜 나이도 밝히지 못한 채 계속 거짓말을 해야 했던 건 줄곧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있었다.

트뷔에 백작부인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제 이름이 지나치게 유명세를 탄 덕분에, 이름을 숨기고 편입하고자 했던 건 클레어 본인의 의지였다.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았다. 다만 언젠가는 가깝게 지냈던 이들에게만이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다.

“오늘 같은 날까지 추하게 질투하는 꼴이 진짜 한심하네요.”

증폭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를 통해 총장의 목소리가 대강당 전체에 울려펴지는 가운데, 리세라가 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클레어는 그런 그녀를 달래듯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2년 동안 계속 같은 클래스에서 수학하며, 처음부터 귀족이니 평민이니 하는 편견 없이 제게 먼저 다가와준 리세라는 그중에서도 더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클레어는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리면서도 늘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좋은 일들만 있었다고는 할 수 없는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리세라가 큰 의지가 되어주었다.

“저 인간이 원래 그 트뷔에 벨린의 그림을 좋아하는 걸로 유명했거든요. 그러니까 원래는 클레어 헤더라는 화가의 그림이죠.”

리세라가 아예 대놓고 손가락으로 옆 클래스의 줄에 선 듀젠 오르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작품을 좋아해서 은근히 비슷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랬는데, 레나가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서 제 2의 클레어 헤더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질투해서 저러는 거예요. 거기다 자기보다 성적도 훨씬 좋고, 교수님들로부터 인정받는 수준도 다르니까.”

평소엔 늘 차분하고 침착한 그녀인데, 오늘은 유독 화가 나는 듯 씩씩대던 리세라가 멈칫하며 클레어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그렇다고 레나가 저 인간처럼 그 사람의 화풍을 따라 했다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전 레나의 그림이 훨씬 더 좋아요. 늘 따스하고 온화해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 정말 좋아요.”

“고마워, 리세.”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클레어 역시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했다. 클레어가 듀젠 오르카의 헛소리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웃자, 리세라도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듯 그제야 미소지었다.

총장은 늘 말이 길었다. 오늘도 분명 학생들 대부분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쯤에나 총장의 축사가 끝날 것임을 짐작했다. 클레어는 품 안에 넣어두었던 연설문을 꺼내 한 번 더 확인하며 보호자석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제 보호자는 아무도 오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 구태여 눈으로 다시 확인해서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다.

레이몬드도, 유리도, 알렌도,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레이몬드와는 두어 달 전부터 거의 만나지 못하게 되어서 불안하고 서글픈 마음이 커져 갔는데, 오늘 졸업식마저도 참석하지 못한다는 걸 듣고 밤새 혼자 몰래 울기도 했다.

연락용 마력구 앞에서는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였지만, 사실은 아카데미에 편입한 걸 후회할 만큼 쓸쓸하고 괴로웠다. 혹시나 정말 그에게 다른 아름다운 여성이 생긴 건 아닐까, 제게서는 완전히 마음이 떠난 게 아닐까. 며칠간 불안해서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이제 보호자들도 거의 다 입장했나 보네요.”

클레어가 연설문을 읽으며 점검하는 사이, 대강당 출입문이 닫히는 걸 본 리세라가 말했다.

“그럼 다음으로는 졸업생 대표의 인사가 있겠습니다.”

때마침 총장의 축사도 끝난 모양이었다. 사회를 맡은 시온의 밝은 목소리에 클레어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옆에 서 있던 리세라가 작게 힘내요, 라고 외치는 게 들렸다. 클레어는 리세라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웃어 보인 후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채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클레어는 무언가에 발이 턱 걸려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주위에서 안타까움이 섞인 혀 차는 소리와 누군가 “야, 이……!”하고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틀어막힌 듯한 소리가 뒤이어 울렸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넘어진 클레어는 놀란 얼굴로 옆을 바라보았다. 넘어질 때 접질린 발목이 아팠고, 그새 무거운 안경은 어디로 갔는지 콧등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이런, 미안. 내가 다리가 좀 길어서.”

듀젠 오르카는 오만한 미소를 띤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일어나서 단상까지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레나!”

도와줄 마음 따윈 조금도 없어 보이는 태도의 그 대신 리세라가 다급히 다가와 손을 내미는 찰나였다.

클레어의 몸이 빛에 둘러싸인 채 두둥실 떠오르더니, 누군가가 허공에서 바닥에 착지하듯 클레어의 앞으로 사뿐히 다가왔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장신의 남자는 그대로 클레어의 몸을 안아 들었다.

익숙하게 저를 안아 드는 남자를, 클레어는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레이몬드?”

설마 하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클레어를 안아 들지 않은 손으로 남자가 후드를 벗어젖혔다.

후드가 뒤로 넘어가고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주위에선 또다시 헉, 놀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이어졌다.

태양처럼 찬란한 금빛 머리칼과 눈동자, 그보다 더 빛이 나는 듯한 화려한 남자의 외모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생각났다.”

그 속에서 남자를 우연히 먼저 만났던 제넌 알베르트의 외침이 조용한 대강당 안을 울렸다.

“마탑의 주인,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대강당 안을 울린 제넌의 외침에 학생들과 보호자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아카데미의 총장과 교수진들을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마탑주라고? 제국의 황자?”

“카지스 제국의 황자가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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