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
레지나 왕립 아카데미 제 98회 졸업식.
아직 차가운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는 계절. 졸업을 코앞에 둔 학생들 대부분은 무척 들뜨고 설레는 감정을 안은 채 교정을 걷고 있었다.
2년간 기숙사에서 함께 웃고 울던 학우들과의 헤어짐, 아카데미를 떠나 가족들의 품으로, 혹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기분 좋은 설렘이 학생들을 들뜨게 했다.
“뭐가 졸업이고,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대는 거냐.”
물론 개중에는 졸업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시 아카데미에 남게 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기할 정도로 졸업 예정자들과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는데, 대부분이 우중충하고 삐딱한 얼굴로 졸업 예정자로 추정되는 이들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은 기숙사 방 안에서 베개로 눈물을 적시거나 이를 갈며 처음부터 다시 졸업작품을 구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나저나 올해 졸업식은 유독 좀 경비가 삼엄한 느낌이지 않아?”
올해 졸업에 실패한 비비안은 전자의 경우에 해당했다. 그녀는 대강당으로 모이라는 교수들의 지시에 따라 교정을 걸으며 주변의 하하호호 즐거워 보이는 졸업 예정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2년 동안 비비안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며, 지금 나란히 걷고 있는 졸업 예정자 제넌 알베르트 역시 그녀의 매서운 시선을 받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런가? 작년에도 비슷하지 않았어?”
제넌의 심드렁한 반응에 비비안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주위를 가리켰다.
“아냐, 19년 동안 내가 갈고 닦은 촉에 의하면 올해는 뭔가 있어. 아무리 봐도 필요 이상으로 경비병들이 많아. 올해 졸업식에는 분명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손님이 오는 게 틀림없어.”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런데 비비안, 19년 동안 갈고 닦은 촉이 졸업 시험 통과에는 딱히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라 안타깝다.”
“야, 너 졸업식 앞두고 테오르 강 건너고 싶냐? 잠깐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올 시간은 줄까?”
“아니, 미안. 잘못했어. 용서해줘.”
졸업에 실패한 자의 분노는 생각보다 더 거대해서, 제넌은 얼른 제 실언을 사죄했다. 그리고 친구의 살기등등한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경비병이 많은 건, 오르카 후작이 참석할지도 몰라서 그런 거 아니야? 차남이 올해 졸업생이잖아.”
“그런가. 그 성격 더러운 후작가 도련님, 결국 졸업생 대표 못 맡아서 얼마나 씩씩대고 있을지-.”
“실례합니다만, 레이디.”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며 대강당을 향해 걸어가던 비비안과 제넌의 옆으로 누군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나타나 불쑥 끼어들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상대에게 놀란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거기엔 어두운 색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장신의 남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입술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상대에게 경계 어린 시선을 던졌다. 아카데미 입구부터 줄지어 서 있는 경비병들을 통과했으니 당연히 졸업식 참석을 허가받은 사람이겠지만, 그래도 겉모습이 너무 수상해서 경계심이 마구 발동했다.
‘헉, 저거 아르세티아 아냐? 한 송이에 최소 10골드는 호가한다던데.’
그러던 중에 남자가 한쪽 팔로 끌어안고 있는 커다란 꽃다발에 시선이 갔고, 그 꽃다발이 현재 웬만한 보석보다 더 비싸다고 알려진 희귀한 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대체 누구의 보호자기에 저런 어마어마한 꽃다발을 졸업 선물로 가져온 걸까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와중에, 남자가 미안함이 깃든 목소리로 물어왔다.
“대강당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머, 이제 보니 목소리도 진짜 좋아.
호기심 가득한 비비안의 시선이 후드 아래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워낙 후드를 깊이 눌러써서 입술과 턱밖에 보이지 않지만, 척 보기에도 남자는 상당히 근사한 미모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다.
워낙 키가 커서 눈에 띄기 쉬운데다, 후드를 눌러써도 비집고 나오는 미인의 아우라에 실제로 벌써 주위를 지나치던 학생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거기에 남자가 들고 있는 커다란 아르세티아 꽃다발도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한몫했고.
“다, 다른 학생들을 따라 이쪽 길로 계속 쭉 걸어가시면 돼요. 저기 끝에 보이는 건물이 대강당이에요.”
“감사합니다.”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허둥지둥 대답했고, 남자는 그런 비비안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걸어가 버렸다. 남자가 고맙다며 고개를 살짝 숙일 때 얼핏 보인 금색 눈동자를, 비비안과 제넌은 놓치지 않았다.
“야, 봤어? 봤어? 저 사람 뭐야, 대체 누구 보호자야?”
남자가 후드를 다시 깊이 눌러쓰며 사라진 뒤, 비비안은 잔뜩 흥분한 채로 제넌의 팔을 잡고 흔들며 외쳤다. 제넌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봤어, 잠깐 봤지만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사람인 건 확실해.”
“혹시 저 사람이 오늘 저 많은 경비병들을 세우게 된 손님 아냐?”
“음, 글쎄. 그런데 저 사람 왠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제넌이 고개를 갸웃하며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는데, 제자리에 멈춰선 두 사람의 등 뒤에서 약간의 소란이 느껴졌다. 또 뭔가 하고 돌아보니 다른 학생들도 이미 두 사람과 비슷한 표정으로 소란의 원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조금 전에 본 근사한 미남자와 비슷하게 후드를 깊이 눌러 쓴 여자와 그보다 한참 작은 남자아이였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뒤로 호위로 보이는 남자들이 잔뜩 뒤따르고 있었다. 평범하게 사복을 입었지만 허리춤에 찬 검이며 풍기는 분위기가 최소 어디 고위 귀족가에 속한 기사들 같았다.
“아, 둘째 오빠는 그새 어디로 간 거야! 우리 몰래 혼자 언니 보러 간 거 아니야?”
“쉿쉿, 오늘은 비밀리에 오신 거잖습니까.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해주십시오.”
“듀, 어디로 가야 형수님 만날 수 있어?”
“당장은 만나실 수 없습니다. 졸업식 끝날 때까지는 얌전히 계셔야 합니다. 아카데미에도 절대 눈에 띄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참석을 허락해준 거니까요.”
“웃겨, 지들이 뭔데 우리더러 이래라 저래라야? 애초에 보호자가 왜 졸업식 참석을 허락받아야 하냐고!”
“듀, 빨리 형수님! 빨리!”
“흑흑, 두 분 다 제발 얌전히 계셔주세요.”
자기들 딴에는 작게 얘기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은데, 비비안과 제넌의 바로 옆을 스쳐가며 나누는 대화라 전부 빠짐없이 다 들렸다.
어쩌면 어딘가의 고위 귀족이 아니라 타국의 왕족이 방문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까 그 잘생긴 미남도 같은 일행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비비안은 묘하게 거들먹거리는 얼굴로 제넌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오늘 엄청난 손님이 올 거 같다고 했지.”
* * *
대강당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졸업식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있는 학생들과 하나둘 자리를 채우기 시작한 학생들의 보호자들로 가득 들어차 있는 탓이었다.
학생들은 따로 멀리 떨어진 보호자석을 힐끔거리며 자신의 보호자가 왔는지 확인하기도 하고, 각 클래스마다 모여 두 줄로 나란히 서서 저마다 친한 학우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트뷔에 벨린, 그 여자 결국 패소했다며.”
졸업 예정자인 제 1클래스의 줄에 서 있던 남학생 한 명이 말을 꺼내자, 주변에서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하던 그의 클래스메이트들도 관심을 보였다.
“항소하고 난리 치면서 질질 끌더니 결국 그렇게 됐나.”
“뭐가? 누가 뭘 해?”
“트뷔에 벨린 백작부인 그 여자, 대리 화가 사실이 밝혀지면서 컬렉터들이 단체로 소송 걸었잖아.”
“아아, 그거 결국 졌어? 돈을 쏟아부은 그 대단한 변호인단도 소용없었네. 변호인단 구성하느라 빚도 어마어마하게 졌다던데.”
“그 상태에서 감옥에 처박히는 거야? 진짜 한순간에 바닥의 바닥까지 추락하네.”
“다 본인이 자초한 거지.”
혀를 차는 소리에 이어 트뷔에 벨린을 향한 비웃음과 조롱 섞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애초에 대리 화가라고 할 수도 없지 않아? 그림도 억지로 빼앗은 거라며. 그건 그냥 범죄지. 브로커와 주고받은 편지로 다 들통났잖아.”
“한 패였던 놈들이 자백하는 바람에 그 대리 화가를 납치했던 사실까지 드러나서, 감옥에 처박힌 채로 그 재판도 진행될 거라던데.”
“재판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가 무려 카지스 제국의 황실! 이제 감옥에서 살날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만 기대하면 되겠어.”
“이제 그 여자도 불쌍해 보일 지경이네. 하필 건드린 상대가 제국 황자의 약혼녀라니.”
“이름이 클레어 헤더였던가. 듣기로 그림 실력도 실력이지만, 진짜 엄청난 미인이라던데.”
트뷔에 벨린에게서 어느새 화제는 클레어 헤더라는 인물에게로 넘어갔다. 한때 레지나 왕국을 뒤흔들었던 작품들의 진짜 작가가 언급되자, 학생들의 눈동자에 호기심과 선망 어린 빛이 반짝였다.
“그 대단한 마탑주와 제국 황실의 마음을 통째로 사로잡은 여성이니까. 얼마나 대단한 미인이겠어. 멀리서라도 좋으니까 딱 한 번만 보고 싶다.”
“그런데 왜 아직도 황자비로 안 들인 걸까? 제국 황실에서 꽁꽁 숨기고 있어서 그런지 2년 전부터 알려진 소식이 하나도 없어.”
“그러게, 여러 말들이 돌긴 하던데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네.”
대륙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 것치고는 알려진 정보가 극도로 적은 탓에 클레어 헤더에 대한 얘기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어쨌든 역시 우리 버젯 교수님이 현명했어. 유일하게 트뷔에 벨린 그 여자가 아카데미 교수직에 못 앉게 끝까지 반대하셨잖아. 만약 버젯 교수님이 찬성해서 그 여자가 교수로 들어왔어 봐. 생각만 해도 끔찍해.”
“아카데미의 명예도 품격도 그 여자랑 같이 길바닥에 처박혔겠지.”
“난 이미 처박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싸늘한 비웃음이 깔린 목소리가 순간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다. 대화를 나누던 학생들은 물론, 주변의 다른 클래스의 학생들까지 제 1클래스의 첫 번째 줄에 선 듀젠 오르카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문 학생들을 알아챈 듀젠 오르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는 바로 옆 클래스인 제 2클래스의 첫 번째 줄에 선 이를 향해 조소하며 말했다.
“저딴 촌뜨기 흉내쟁이가 최우수 졸업생으로 뽑힌 것도 모라자 졸업생 대표라니.”
듀젠 오르카의 말에 모두의 눈동자가 약속이나 한 듯 제 2클래스의 제일 앞줄로 움직였다.
거기엔 갈색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고, 유행이 한참 지난 촌스러운 안경에 덥수룩한 앞머리까지 더해져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에도, 듀젠 오르카의 시선에도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듀젠 오르카는 그 모습조차 거슬린다는 듯 신랄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카데미도 격이 떨어질 때로 떨어졌지.”
오르카 후작가의 차남이자,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들어와 입학 당시부터 모든 교수와 학생들의 주목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듀젠 오르카의 눈동자는 상대를 향한 증오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