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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15) (145/152)

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15)

“방금 유리님이었죠?”

먼저 일어나 앉은 레이몬드를 따라 클레어도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레이몬드는 흘러내린 이불을 아예 클레어의 어깨에 둘러주며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네, 뭘 단단히 오해하고 도망갔어요. 전부 오해는 아니지만.”

“왠지 엄청 기분 좋게 웃고 계신 것 같지 않았어요?”

그 짧은 찰나에도 비실비실 웃고 있던 유리의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웃음기 어린 클레어의 말에 레이몬드도 결국 픽 웃어버렸다.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던 클레어를 깨워놓은데다, 기분 좋은 둘만의 아침 시간을 방해당한 게 무척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걸로 다시 여느 때와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썩 나쁘진 않았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오해하게 두는 게 클레어가 무사히 아카데미에 편입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 같죠?”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우연히 밤늦게 중앙정원에서 만나 함께 돌아온 두 사람을 보고, 둘이서 데이트를 했다고 착각한 유리가 며칠 동안 잔뜩 들떠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두 사람이 데이트를 했다는 사실이 왜 저렇게 기쁜 걸까 이해가 되질 않았었는데. 포악하고 단순하지만 귀엽고, 귀엽지만 때론 잘 이해가 되질 않아서 걱정스러운 유리 황녀는 전혀 변한 게 없었다.

그때의 기억과 함께 조금 전 빨개진 얼굴로 허둥대던 유리의 모습이 떠올라 클레어와 레이몬드는 동시에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한 클레어가 웃고 있는 레이몬드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췄다. 잠시 놀라던 레이몬드도 눈을 감으며 클레어의 입술을 받아주었다.

이 이상 늦으면 진짜 혼날 텐데, 이게 다 클레어 때문이에요.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는 레이몬드의 말에 클레어가 대답할 새도 없이 더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클레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저와의 입맞춤에 열중하는 레이몬드의 근사한 얼굴을 눈에 새길 듯 응시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콩닥콩닥 뛰는 제 심장의 두근거림이 좋았다.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이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면서도 두려웠다. 아직도, 제 안에는 언젠가 레이몬드에게도 버려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남아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클레어는 바랐다. 제가 사랑하는 이 사람과 함께 하는 미래에 늘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한 클레어의 바람에 신이 응답하듯,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눈부신 햇살이 두 사람의 위로 찬란하게 내려앉았다.

* * *

“……생, 정신 차려! 학생!”

누군가 제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학생들, 정신 좀 차려봐!”

누군데 시끄럽게 이 난리야. 재현은 철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눈을 떴다. 갑자기 시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재현은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깜빡였다.

“어, 이쪽 학생 정신 차렸네!”

겨우 빛에 익숙해진 시야로 웬 낯선 아저씨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이 아저씨는 뭐야.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재현은 처음 보는 아저씨를 멀뚱멀뚱 올려다보기만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것처럼 머릿속이 몽롱했다.

“아니, 학생들 갑자기 그렇게 차도로 뛰어들면 어떡하나! 내가 진짜 십년감수 했네!”

차도로 뛰어들어?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난 차도로 뛰어든 게 아니라 멍청한 유리 황녀를 붙잡다가 곁다리로 같이 떨어진 것뿐인…….

몸을 일으키려 팔꿈치를 세워 딱딱 아스팔트 바닥을 짚었을 때였다.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던 재현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아이고, 학생도 정신이 들어?”

옆에서 다른 아주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들렸다. 무심코 돌아본 재현의 눈에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시커먼 아스팔트 바닥 위에 주저앉아 있는 자신과 똑같이 이제 막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고 있는 여학생.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도로 가운데 멈춰선 차들까지.

낯선 풍경이었다. 재현은 충격을 받은 눈동자로 주변의 높은 건물들과 신호등, 표지판 같은 것들을 하나 하나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돌아왔어.’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진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음을.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재현은 손을 움직여 다시 제 몸을 확인하며 시선을 내렸다. 회색 티셔츠와 남색 운동복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자신의 몸, 신재현의 몸이었다.

“차랑 부딪치지도 않았구만 둘 다 갑자기 픽 쓰러져선 정신도 못 차리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학생들!”

쓰러지기 직전 눈앞에서 달려오던 차가 기억났다. 아마 자신을 흔들어 깨운 아저씨는 그 차의 운전자인 듯했다. 갑자기 도로 쪽으로 뛰쳐나온 저로 인해 놀란 탓인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아마 운전자 아저씨가 급하게 차를 멈추거나 틀어서 다행히 사고는 피한 것 같았다. 팔과 손바닥 쪽에 가벼운 상처가 있긴 하나, 그 외에 불편한 곳은 전혀 없었다.

“크게 다친 데는 없어 보이지만 일단 그래도 119 불렀으니까 타고 가봐.”

재현이 자꾸 몸을 더듬으며 뭔가를 확인하자, 다친 곳을 확인한다고 생각했던지 아저씨가 투덜거리는 투로 말했다.

재현은 아저씨의 말을 못 들은 양 고개를 돌려 여학생 쪽을 돌아보았다. 저와 마찬가지로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은 여학생도 혼란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여학생을 바라보던 재현의 눈에 신은지와 같은 학교의 교복 위 명찰이 들어왔다.

김유리.

그 이름을 본 재현의 표정이 굳었다.

“유리, 황녀……?”

무심코 떠올린 이름을 중얼거리자 김유리란 이름의 여학생도 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겁에 질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재현은 순간 그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김유리에게 다가갔다.

“유리 황녀, 맞아?”

재현이 다가가는 만큼 점점 더 겁을 집어먹은 김유리가 제 주변에 서 있던 아주머니의 옷을 붙잡으며 말했다.

“도, 도와주세요. 저 사람 이상해요.”

“나 모르겠어? 나 성녀 아리아…….”

“꺄악!”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여학생의 비명에 재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주변의 사람들도 그를 향해 도대체 뭔 짓을 했기에 애가 저렇게 무서워하냐는 듯 비난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재현은 멈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뭐지, 유리 황녀가 아닌가. 아니, 애초에 왜 저 애를 유리 황녀 라고 생각한 거지. 유리라는 이름 때문에?

혼란스러운 눈으로 물러서던 재현의 눈에 김유리의 옆에 떨어진 녹색 노트가 보였다. 재현은 다시 주춤거리며 움직였다. 아주머니 등 뒤에 숨은 김유리가 잔뜩 경계 어린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재현은 일부러 느릿느릿 걸어가 녹색 노트를 주워들었다.

주워든 노트를 멍하니 바라보던 재현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노트를 펼쳐 들었다. 노트의 첫 장에는 『이 세계 소녀, 성녀 되다?!』라는 익숙한 제목이 아닌 처음 보는 낯선 제목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마치 부제처럼 문장 하나가 조그맣게 쓰여있었다. 제 사촌 동생의 것이 분명한 글씨를 읽은 재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 어어! 학생! 학생!”

다음 순간 재현은 달리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노트를 주워들고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그를 이상한 사람 보듯 하며 피했다. 재현은 시간 내에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듯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다.

XX 병원.

찾고 있던 건물을 발견하고 그 앞에 섰을 때에서야 겨우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건물 주위를 지나다니던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재현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재현은 턱 끝에 맺힌 땀을 소매로 닦으며 입구 쪽으로 걸어가다 멈칫했다.

얼핏 기억하기로 지금은 중환자실 면회가 불가능한 시간인 게 떠올랐다. 들어가 봤자 소용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들어갈 수도 없으려나. 게다가 의식도 없는 애한테 가서 뭐 하려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아니면 돌아올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재현은 들고 있던 노트를 힘주어 꾹 쥐고는 제자리에 푹 쭈그려 앉아 머리를 감쌌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병원의 직원이 다가와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다른 분들의 출입이 불편하다며 재현에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재현은 죄송하다고 대답하고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피해 움직여 구석에 있는 벤치로 가 앉았다.

한참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만 있던 재현의 시선이 지금껏 손에 쥐고 있던 노트에 가닿았다. 재현은 기운 없이 노트를 펼쳐 들고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무표정하게 노트를 읽어 내려가던 재현의 눈동자에 서서히 웃음기가 어렸다.

“푸핫, 처음에 이랬던 거냐. 헤더 영애 진짜 황당했겠네.”

“참 나. 여기서 이걸 받아주니까 뒤에 가서 그 바보가 또 그런 거 아니야.”

“아, 맞아. 이때 이렇게 만났었지. 내가 일부러 기다렸다가 접근한 거였으니까.”

“헤더 영애 생각보다 더 고생했었네. 마음 아프게.”

“에이든 헤더 이 새끼는 뭐야? 아, 이 개새끼 죽여버리고 올걸.”

“흐음, 성녀 아리아는 이런 식으로 얼버무린 건가. 리하르트 아델도 이렇게 보니 좀 안 됐다 싶기도 하고.”

노트에 쓰인 글을 집중해서 읽으며, 혼자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화가 나서 욕설을 내뱉기도 하던 재현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성녀 아리아에 빙의했던 자신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이야기들이 생각보다 더 놀랍고 흥미진진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뭐야, 진짜? 헤더 영애가……? 대단한데.”

마지막에 가까워진 내용을 읽으며 재현은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중얼거렸다. 재현은 다음 장을, 또 다음 장을 진지하게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장.

클레어는 레이몬드 2황자와 결혼하여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도 함께.

진부한 문장이긴 하지만, 여느 동화책들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에 재현은 기뻐하며 웃었다. 뒷이야기가 더 그려지지 않은 게 아쉽긴 하지만 독자인 자신이 볼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듯했다.

재현은 노트의 마지막 온점까지 전부 읽은 뒤 뻐근한 목을 뒤로 젖혔다. 여전히 지독할 만큼 맑고 푸른 하늘을 응시한 채로 재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넌 결국 나한테 마지막까지 이 이야기를 읽게 하고 싶었던 거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네가 쓰고 싶은 진짜 이야기를.”

그 상태로 꼼짝도 않고 하늘만 올려다보는 재현의 귀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재현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 뜬 「아버지」 세 글자를 확인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눌렀다.

“네, 아버지. 저 지금…….”

“재현아, 은지 눈 떴단다! 의식이 돌아왔대! 엄마 아빠는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갈 건데, 너 지금 어디야. 재현아, 신재현?”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커진 재현의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더니, 휴대폰을 쥔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재현은 쥐고 있던 노트와 휴대폰을 가슴에 끌어안으며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심하게도 줄줄 흐르는 눈물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감춘 채, 재현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감사 인사를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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