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14) (144/152)

07. 나의 새언니가 되어주세요! (14)

클레어는 레이몬드에게 붙잡혔던 손을 빼내어 팔을 뻗었다. 레이몬드의 목을 끌어안고서 제 쪽으로 힘주어 당기자 그의 몸이 무력하게 제 몸 위로 무너져 내렸다.

“좋아해요, 레이몬드.”

클레어는 저를 향한 갈망으로 타버릴 것만 같은 금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작게 속삭였다. 욕망으로 흐릿해졌던 그의 눈동자가 움찔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놀라고 기뻐하는 표정의 그에게 클레어가 조금 초조한 목소리로 한 번 더 속삭였다.

“그러니 멈추지 마세요.”

힘겹게 억누르고 있던 갈증과 욕망이 그 순간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레이몬드의 이성을 날려버렸다. 다정하게,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사탕보다 더 달콤한 그녀의 입술을, 힘주어 끌어안으면 부서져 버릴 듯 연약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숨결만으로도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그녀의 존재 자체를 짐승처럼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만 싶었다.

이대로 정말 아무 데도 못 가게 만들고 싶어. 레이몬드는 늘 제 안에 머무르고 있던 음습한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다.

‘아이를 갖게 되면 이대로 이곳에 머물러주지 않을까. 아이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날 떠나서 멀리 날아가 버리지 않고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을까.’

읍, 흐읍.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불온한 상상을 이어가는 레이몬드의 귓가에 클레어의 신음이 들렸다. 게걸스럽게 입술을 탐하는 저로 인해 숨이 차는지 클레어가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 내가 너무 끈질기게 굴었죠.”

레이몬드는 그 즉시 입술을 떼고 클레어가 편히 숨을 쉴 수 있게 해준 뒤, 눈물이 고인 클레어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파르르 떠는 클레어가 안심할 수 있게 다시 다정한 척 웃어 보였다.

레이몬드는 그런 스스로를 향해 속으로 작게 비웃음을 흘렸다.

클레어가 이렇게 조금만 괴로워 보여도 아무것도 못 하면서, 제 구역질 나는 마음을 숨기기 급급한 주제에, 뭘 어쩌겠다고.

밤을 지나 이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레이몬드는 클레어에게 빈틈없이 밀착해있던 제 몸을 슬쩍 떼어내고 이불을 당겨 클레어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클레어의 옆에 누워 그녀를 이불로 감싼 채로 가볍게 당겨 안았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제 몸을 두꺼운 이불이 잘 감춰주기를 바라면서.

레이몬드는 제 것인지 클레어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남은 클레어의 입술을 손으로 조심스레 닦아주며 말했다.

“역시, 우리 첫날밤은…… 조금 미뤄도 될까요?”

클레어의 눈동자가 왠지 조금 불안한 빛을 띠는 걸 보며 레이몬드가 달래듯 말했다. 그리고 제 눈을 현혹하는 붉은 입술을 못 본 척 클레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클레어를 이불로 꽁꽁 감싸두고도 가라앉을 생각이 없는 듯한 제 몸은 그냥 무시해버렸다.

“오늘은 정말 그냥 클레어를 보고 싶어서 온…….”

“……왜요?”

클레어의 굳은 목소리가 레이몬드의 말을 잘랐다. 상처받은 듯 흐려진 목소리에 레이몬드는 놀란 눈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혹시 제가…… 더러워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클레어의 반응에 레이몬드는 당황해 패닉에 빠졌다. 레이몬드는 오해를 풀기 위해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나는, 그러니까, 제대로 된 청혼도 못 한 채로 이러는 건 아닌 것 같아서.”

레이몬드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레이몬드가 벌떡 일어나 초조하게 저를 내려다보며 쩔쩔매자 클레어의 굳은 눈동자가 스르르 풀렸다. 처음 보는 그의 낯선 모습이 왠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클레어가 조그맣게 웃자, 그제야 안심한 레이몬드가 다시 클레어의 몸을 끌어안으며 털썩 누웠다.

“아, 정말. 놀라게 하지 마요. 클레어가 그런 얼굴을 하면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라고요.”

클레어는 가만히 레이몬드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저도 전부…… 처음이면 좋을 텐데.”

“클레어.”

클레어가 혼잣말처럼 작게 내뱉은 말에 레이몬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다른 사람과의 과거에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계속 시선을 피하는 클레어의 눈동자를 억지로 붙들어 눈을 마주한 채, 자신의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호소하듯 말했다.

“한 번도 클레어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얼핏 불안해 보이던 표정이 그런 의미였었나. 레이몬드는 옅은 한숨을 삼키며 클레어의 몸을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불안해하지 않도록,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틈도 없도록. 제 사랑이 눈꽃처럼 내려 클레어의 마음을 뒤덮길 바랐다.

“의심스러우면 그때마다 내게 물어봐요. 매번 확실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테니까. 절대 혼자 끙끙 앓으면서 괴로워하지 마요.”

마주 안은 몸을 통해 서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온몸을 울렸다. 고작 그것뿐인데, 살면서 이토록 행복한 적이 있던가 싶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충만감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태어날 때부터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고, 타고난 힘으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에도 너무도 손쉽게 들어선 그였다. 그래서인지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엇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당연히 무언가를 원하는 일도 없었다.

클레어 헤더는 그런 그가 처음으로 간절히 바라게 된 존재였다. 무릎을 꿇고 애원해서라도 곁에 있고 싶었고, 억지로 가둬서라도 제 곁에 두고 싶었던 유일무이한 사람. 그런 존재가 지금 제 품 안에 있었다. 제게 좋아한다 말해주고, 입을 맞춰주고, 왜 저를 안아주지 않느냐 불안해하고 있었다.

클레어가 불안해하는 건 싫었다. 하지만 그 불안해하는 마음이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만은 기쁘고 행복했다.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았고,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존재가 혼자 불안해할 만큼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이대로 클레어를 안고 황성 안을 춤추면서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오늘 멈춘 건…… 당장 피임을 할 방법이 없어서요.”

레이몬드는 괜히 자신의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에둘러 말하지 않기로 했다. 클레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솔직하게 이유를 털어놓았다.

깊은 밤, 둘만 남겨진 방 안, 필요 이상으로 매혹적인 클레어. 분위기에 휩쓸려 잠깐 이성을 잃고 달려들긴 했으나 생각해보니 정말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다. 흑심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순수하게 클레어가 잠든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어서 온 것뿐이었으니까.

“오늘 하룻밤으로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죽을 만큼 기쁘겠지만……. 클레어는 줄곧 꿈꿔온 미래로 발을 내딛는데 힘들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 나도 정말 이 악물고 참은 거예요.”

레이몬드는 그래서 지금도 솔직히 괴로워서 죽을 맛이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몸이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클레어를 제 품에 안고 있는 행복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그 뒤로 두 사람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던 창밖이 점점 밝아올 때까지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난 아마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그때는 아직 내 마음을 깨닫지 못했을 뿐. 자꾸만 클레어에게 눈길이 가고, 만나지 못하면 보고 싶고, 어떻게든 만나러 갈 구실을 만들던 게 전부 클레어를 좋아하게 됐기 때문이었겠죠.”

“저는…… 정말 멋지고 근사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유리님만 아니었다면 나와는 절대 엮일 일이 없는 아주 먼 곳의 사람이라고.”

“그건 그냥 아무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죠?”

“아, 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괜찮아요, 어차피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저, 정말 아무 관심도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나와는 인연이 없는 아득히 먼 곳의 사람이니까 애초에 마음을 주지도 말자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위로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때 내가 봐도 클레어는 나한테 눈길도 안 주는 느낌이었으니까.”

“그치만 정말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는 걸요. 남자인데도 저보다도 더 예쁘시고 또 너무 너무 잘생기셨다고 생각했어요. 키도 정말 크고 피부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또 어깨도 넓고 팔다리도 길고 손이 크고 손가락은 길고 예뻐서 만져보고 싶었고…….”

“안 보는 줄 알았는데 은근히 자세히 보고 있었네요.”

“그렇게…… 자세히는 아니었어요.”

“정말 내가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네, 이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멋진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어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어쩔 수 없이 가짜 약혼을 시작했던 기억과 다시 멜린트 영지에서 재회했던 시간들을 천천히 되새겨나갔다.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레이몬드는 다시 마법진 복구를 위해 떠나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잠이 부족했던 클레어는 레이몬드의 품에 안긴 채로 졸린 눈을 깜빡이며 졸고 있었다. 클레어가 잠깐이라도 푹 잘 수 있게, 레이몬드가 아쉬움을 접고 몸을 일으킬 때였다.

문 너머에서 우당당탕 시끄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패턴에 레이몬드의 굳은 눈동자가 문가를 돌아보았다.

“으악, 오늘은 진짜 안 됩니다! 황녀 전하!”

“진짜, 진짜로 안 됩니다!”

“오늘따라 왜 이래, 이것들이! 죽을래? 빨리 비켜!”

“으악!”

익숙한 목소리의 폭군이 한바탕 난동을 부리더니,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방앞을 지키던 클레어의 호위기사들은 쫓기듯 눈을 질끈 감은 채 문을 등지고 돌아섰다.

“언니! 이건 또 무슨 소리예요, 아카데미 편입이라니!”

제 앞을 막아서던 기사들의 심정도 모른 채 호탕하게 발로 문을 차서 열어젖힌 유리가 씩씩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심지어 거기 최소 2년이나 다녀야 한다던데, 이게 갑자기 뭔 슬라임이 이단옆차기 하는 소리……!”

유리의 난동에 놀라서 깬 클레어가 졸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고, 레이몬드는 그런 클레어에게 이불을 더 당겨 덮어준 뒤 질렸다는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앞섶을 거의 풀어 헤친 채로 클레어의 침대에 누워있는 레이몬드를 먼저 발견한 유리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둘 다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저건 어떻게 봐도 밤을 함께 보낸 연인의 모습이었다.

팟! 하고 유리의 머릿속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불꽃이 펑펑 터지는 느낌이 났다.

문밖의 기사들이 필사적으로 저를 뜯어말렸던 게 이런 이유였나. 이 자식들, 그런 거면 좀 더 확실하게 말렸어야지.

당황한 유리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허둥대기 시작했다.

“아, 아하핫! 아휴, 내가 또 눈치 없이 방해를 했네! 미, 미안! 난 그럼 이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흘리던 유리가 잽싸게 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그 와중에도 문을 손수 다시 닫고 나가는 건 잊지 않는 게 참 대단하다 싶었다.

1